131.
밀리타는 그대로 뒤로 빠져서 벽 조명을 발로 밟고 최대한 높이 올라갔다.
이내 숨을 고른 후, 마물들의 그림자를 몽땅 한 데 그러모았다. 그리고 반죽하듯 밀도를 높였다. 손이 덜덜 떨렸다.
커다란 장막은 만들어 본 적 없는데.
가능하려나…….
그사이 카이가 압도적으로 마물들을 밀어붙였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카이를 보자 밀리타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윽고 손에 쥔 그림자를 허공에 띄우고 넓게 펼쳤다.
마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밀리타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고가 없는 마물들은 넓게 펼쳐진 그림자 안으로 거침없이 뛰어 들어갔다.
덕분에 카이는 그림자 안쪽에 있는 나머지 마물들만 처리하면 끝이었다.
카이가 마지막 마물을 베자마자 밀리타가 아래로 착지했다.
“바로 저거야.”
밀리타의 손짓을 따라간 곳에는 자줏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저게 결계의 근원이야. 저 나무 아래에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어.”
“구속해.”
“응.”
밀리타가 품 안에서 호엘리반이 준 투명한 마법 구슬을 꺼냈다. 그녀는 구슬을 공중에 띄우고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자줏빛 나무 아래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흘러넘치는 드래곤의 마력이 구슬 속으로 거칠게 빨려 들어갔다.
마력에서 엄청난 저항력이 느껴졌다.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구속되지 않고 바깥으로 터져나갈 기세였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몇 번이나 저항에 구속이 깨질 뻔했으나, 밀리타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한 방울의 마력까지 모두 구속했다.
그리고 곧, 자줏빛 구슬이 그녀의 빨개진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페브리아의 결계가 사라지자 숨 쉬는 게 훨씬 편해졌다.
밀리타는 안도의 한숨을 터트리며 나무를 응시했다.
풍성했던 자줏빛 나무는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어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이가 빨갛게 달아오른 밀리타의 손바닥을 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가자.”
“제인에게 가봐야 하…….”
“거긴 프시오에게 맡기고.”
카이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치료부터 받아.”
* * *
밀리타와 카이가 결계의 근원을 구속하고 있던 그 시각.
교황청 건물 곳곳에 수면 마법과 안개 마법이 짙게 깔려 있었다. 복도 바닥에 금속 끌리는 소리만이 음산하게 울렸다.
스릉, 스릉…….
달빛에 빚어진 그림자가 우뚝 멈췄다.
커다란 장검을 질질 끌고 오던 마드리안이 자리에 선 채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복도 바닥을 둘러보았다.
수면 마법에 널브러져 잠든 경비병들을 훑어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대가 결계를 무너뜨린 자인가?”
달빛에 가려진 벽에 서 있던 루가 등을 떼고 바르게 섰다. 루는 물끄러미 마드리안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수면 마법이 듣지 않았다면 역시 마석을 몸에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루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마드리안 교황이 장검을 사선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렴, 침묵이란 좋은 대답 중 하나지.”
보기에도 위협적인 장검이 눈 깜짝할 새에 루의 코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어느새 마드리안의 뒤로 온 루가 웃음을 흘렸다.
“칭찬은 고마운데.”
“……!”
마드리안이 돌아서는 동시에 발을 물리며 장검을 휘둘렀다. 검 끝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루의 목덜미에 닿지 않았다.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난폭하게 구는 덴 그리 취미가 없어서.”
마드리안이 그대로 서서 루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릇 인간이라면 그녀와 마주할 때 누구든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에게는 어디에서도 경직된 감각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마드리안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지?”
“……음, 나쁜 짓 좀 하러 온.”
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줄곧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눈 깜짝할 새 검을 든 마드리안의 손을 비틀고 그녀의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도둑.”
“!”
마드리안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다급하게 루의 손을 뿌리치고 재차 장검을 휘둘렀으나 그는 이미 멀찍이 떨어진 후였다.
검의 무게마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몸이 휘청거렸다. 수면 마법이 마드리안의 몸을 잠식했다.
“후우…….”
그녀는 그대로 장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검을 쥔 채 눈을 벌겋게 뜨고서 잠에 취하지 않으려 버텼으나 눈앞이 일그러졌다.
쿵……!
마드리안이 마법에 취해 쓰러지자, 어둠 속에서 달빛을 머금은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해사한 얼굴을 드러냈다.
“겨우 재웠네.”
뒤를 돌아본 루가 다시 생각해봐도 우스운지 재차 킬킬거렸다.
“나를 날강도로 만든 값은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제인.”
“사랑하는 사이에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제인이 웃으며 묻자 루가 그녀의 허리를 당기고 무언가 속삭였다. 제인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채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너는, 진짜, 이 와중에!”
루가 몹시 즐겁게 웃으며 마드리안의 목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마법을 무효화하는 마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야. 꽤 정교하게 만들었어. 일단은 내가 가지고 있지.”
“응, 고마워.”
제인이 뒤돌아서 쓰러진 마드리안 쪽으로 갔다.
“그럼, 다녀올게.”
“그래.”
인사를 끝으로 제인은 빛의 돔을 형성했다. 루는 안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돔에서 시선을 돌리고 창가에 앉았다.
이내 즐거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인 쫓아다니는 개가 따로 없군.”
* * *
“다리 좀 봅시다.”
하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커트 머리의 여자가 담배인지 뭔지 모를 것을 피우며 근처에 있던 책자를 쥐고 하임의 다리를 툭툭 쳤다.
“바지.”
“…….”
“내리란 것도 아니고 무릎까지 걷어 올리라는 건데, 뭘 그렇게 보죠?”
하임은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여자는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휴대용 재떨이에 꽁초를 넣었다.
“……말 들으시죠. 원래도 성격 더러운데 요새 잠을 통 못 자서 더 개 같거든요.”
그건 하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건지 차분하게 복기해 보았다.
30분 전.
하임은 연구실에 숨어든 그림자를 향해 담배를 권했다. 그러자 옅은 황갈색 커트 머리에 밤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하임이 권한 담배를 받지 않았다.
하임이 물었다.
-나를 죽이러 온 건가?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담배나 마저 피우죠. 바로 가야 하니까.
그때부터였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하임이 다소 복잡한 얼굴로 담배를 다 피우자, 여자는 벽에 이상한 공간을 만들었다.
제인이 돌연 나타난 남자와 함께 사라졌던 공간과 비슷했다.
여자가 말했다.
-거, 후딱후딱 들어갑시다.
-……?
하임은 그제야 당신은 누구냐, 절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냐고 물었으나 여자는 피곤해 죽겠네, 하더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눈을 뜨자 낯선 연구실이었다.
하임은 이내 화들짝 놀라 기겁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커트 머리 여자가 제 바지에 손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그리고 제 다리는 왜 보여달라는 겁니까? 여기 데려온 이유도 말하지 않고…….”
“세실. 제 이름이고. 치유 마법사고. 당신은 한동안 페브리아에 있는 것보다 여기에 찌그러져 있는 게 안전해서 데려왔고. 됐죠?”
……되긴 뭐가 돼.
하임은 고개를 흔들며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를 보던 세실은 착잡한 얼굴로 파탐을 꺼내 피우며 제인이 전한 말을 떠올렸다.
-참, 부탁드릴 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자연스럽게 부탁하지 마라.
-우선은 수면 마법 좀 가르쳐 줄래요?
-……수면 마법은 왜.
-여러모로 쓸모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요.
세실은 그때 진지하게 생각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같이 개 같은 것들밖에 없는데, 이건 주변 인간들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내가 문제인 걸까.
제인이 말을 이었다.
-페브리아가 어수선해지면 꼭 하임을 데려와 주세요. 제 이름을 말하면 안 오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이어지는 제인의 말에 세실은 확신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전자라고.
-납치가 좋겠어요.
-……지금, 납치를 부탁하는 거니?
-네.
-…….
-아, 그리고.
-부탁이 두 가지라고 하지 않았니? 두 가지라면 이미 다 했는데?
-하임을 만나면 왼쪽 다리 한 번만 봐주세요, 세실.
-…….
-도와주세요.
세실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했다. 후자일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고. 이건 주변만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이것들이 다 들어주니까 부탁하는 거다. 호엘리반을 좀 보라. 그 씹어먹을 새끼는 부탁이라는 것을 안 하는데도 들어줬었지 않은가.
내 탓이다. 다 내 탓.
“젠장맞을.”
세실의 욕에 하임은 어처구니가 가루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봐도 젠장맞을, 하고 욕해야 할 사람은 하임이었다.
담배도 아닌 이상한 걸 피우는 저 여자가 아니라.
세실이 말했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 꼴통 새끼…….”
세실은 두 번째 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으며 다시 말을 덧붙였다.
“제인이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
제인.
그 이름에 하임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였다.
“고작 스물하나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도와줘요, 어른이 돼서.”
* * *
제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드리안의 내면으로 들어온 그녀는 수백, 수천 개의 마음의 문을 바라보며 어느 문부터 박살 내버릴지 행복한 고민을 했다.
치유 마법사로서 가당찮은 이 짓은 소스키엘에게 소소하게 시험해 봤을 때부터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일이었다.
제인은 새벽의 상쾌한 공기 냄새를 맡는 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가장 밑바닥부터 부숴버리자.
자꾸만 이죽거려지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해서 마음의 문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 아주 먼 곳에 너절한 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모든 직감이 그 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인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낡아빠진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화악-!
순식간에 눈도 못 뜰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고 눈을 감자, 기시감이 들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