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말렌은 소문의 출처를 찾으려 매일같이 마나를 끌어 올리며 집중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젠장, 젠장, 젠장!”
말렌 렌드만에게 소문이란 출처를 밝히고자 하면 근원지에 당도하듯 소문이 퍼진 경로가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리 마나를 올려서 집중해도 물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소문의 출처를 찾으라는 마드리안의 명령을 받은 후, 그는 줄곧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에 초조했다.
거듭되는 추적 실패에 지하의 흑마법사들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마나가 발현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들은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내 줄뿐이었다.
멍청한 자식들!
이런 걸 하라고 교황님께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계시거늘!
하지만 분노는 곧 공포로 사그라들었다.
그의 추적을 가장 기다리는 건 마드리안이었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고,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번만 다시 시도해보자…….
젖 먹던 힘까지 마나를 끌어 올려서 집중했다.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마나의 시야가 거칠게 흔들리면서 안개 낀 주변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말렌 추기경은 집중력을 더 높였다.
그때였다.
캉……!
마나의 시야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말렌은 핏줄이 터지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시야를 조절해서 앞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캉! 소리가 전보다 더 크고 정확하게 들려왔다.
불길했다.
마나의 시야가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
말렌은 뒤늦게 자신의 마나가 강도 높은 유리 같은 막 안에 갇혀버렸음을 깨달았다.
소름 끼치는 예감이 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쳤다.
함정이다.
* * *
그 시각.
하임은 페브리아 교황청 약제 연구실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카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어서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카사시아는 교황청에서 전폭적으로 뿌려댄 해독제 덕에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 또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손에 꼽을 정도……?
자조적인 웃음에 죄책감이 어렸다. 한 명이든, 몇 명이든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했던 자기 손에 의해서.
인간의 죽음은 죽은 자의 목숨만 앗아가지 않는다.
고인을 사랑했던 이들의 인생까지 뒤흔든다. 주변에 남은 인생들을 얼마나 무너지게 했을지, 하임은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손에 꼽을 정도의 목숨이라니.
그는 깊은 한숨을 터트린 후 책상 밑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담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였다.
입에 물자, 문득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담배를 몰래 피우다 걸린 녀석은 놀란 얼굴로 굳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의 잔상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불을 붙이고 깊게 머금었다.
잔상은 내뱉는 연기에 조용히 흩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였을까.
이번에는 귓가에 중후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궁정 약제 연구원 제인은 사망 처리되었으나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황청에서 암암리에 수색 중입니다.
마드리안이 궁정 소속인 제인을 교황청에서, 그것도 암암리에 수색 중이라고 했을 때 하임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마드리안이 그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진행하세요.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하임의 말에 마드리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 안에는 일렁임조차 없었다.
-제인을 찾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거지요.
하임은 그대로 눈을 떴다.
내뿜는 연기에 짙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는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어 계속해서 담배를 피웠다.
연구실은 고요했다.
꼭 혼자 있는 것처럼.
하임이 희미하게 웃었다. 기척을 보아하니 암살자는 아니었다.
그럼 뭘까.
그가 벽 뒤의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느긋하게 말을 걸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다리가 불편해서요, 도망은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 갔다.
“그러니, 같이 피우실래요?”
* * *
말렌은 머리가 아찔했다.
소문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사용했던 마나가 어딘가에 갇혔다.
안 돼……!
쓸모없는 인간이 되면 안 돼!
마드리안의 휘하에서 쓸모없음은 목숨과 직결되었다.
말렌은 마나가 갇힌 곳을 미친 듯이 복기하려고 애썼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그곳이 시가지 중심에 있는 분수대 근처 골목길이라는 걸 깨닫고 경비병들과 함께 헐레벌떡 뛰어갔을 때였다.
“커헉!”
“컥!”
숨 고를 틈도 없이 경비병들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히면서 정신을 잃었다.
“!”
말렌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마법을 쓰다니!
페브리아에서 교황청을 통하지 않고는 마법이 억눌려서 발휘된다. 그것도 100분의 1 정도로. 하지만 방금 경비병들을 날린 마법은 무척 가벼웠다.
그만큼 가지고 있는 마나의 강도가 막강하다는 방증이었다.
바닥에 처박힌 경비병들을 멍하니 보던 말렌이 겁에 질린 얼굴로 허리춤에 찬 칼을 만지작거렸다.
어두운 골목길 안.
누군가가 달빛 아래로 사뿐히 걸어 나왔다.
여자였다.
검은 복면을 쓴 검은 눈동자의 여자가 기절한 경비병들을 쓱 훑어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꼭, 날려버릴 생각은 없었다는 듯이.
“이런…….”
프시오가 고개를 위로 슬 젖히며 생각했다.
결계가 풀렸어.
벌써 결계의 원천을 구속했을 줄이야.
프시오가 복면 안에서 대견한 듯 조그맣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쓰러진 경비병들을 보다가 미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실로 경비병들을 기절시킬 생각이 아니었다.
벽에 잠깐 붙여놓고 결박 마법을 걸고자 했으나, 페브리아의 결계를 의식해서 마법 강도를 약간 더 올린 게 화근이었다.
그 사이 결계가 풀렸으니 원래의 강도대로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기특함과 난감함 사이에 오도카니 서 있는 프시오에게 말렌이 대뜸 소리쳤다.
“……누구냐! 주제도 모르고 감히!”
프시오는 대답 대신 손으로 그린 마법진을 말렌에게 날렸다.
말렌에게 날아간 마법진이 빛을 발하면서 유리막 같은 돔을 형성했다.
꼼짝없이 돔에 갇혀버린 말렌이 갑자기 귀를 틀어막았다. 호엘리반이 퍼트린 소문이 한데 뒤엉켜서 그의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를 내었다.
말렌은 이내 괴성을 질러댔다.
“아아악!”
프시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역시 들은 대로 독특한 갈래의 마법을 가지고 있군요.”
하지만 그녀는 호엘리반의 함정이 훨씬 지독하다는 걸 알았다.
호엘리반이 말렌의 마나를 구속할 마법 주문을 포획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은 페브리아에 퍼지도록 지시 내렸던 소문 그 자체였다.
수많은 소문이 일시적으로 압축되어 들리니 괴로운 것이었다.
몸을 웅크린 채 격렬하게 고통스러워하던 말렌이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프시오가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붉은 구슬이 떠올랐다.
“당신 마법을 잠시 구속하겠습니다.”
* * *
프시오가 말렌의 마나를 구속하기 1시간 전.
페브리아 안에 잠복해 있던 밀리타는 누구보다 빨리 말렌의 마나를 감지했다.
그녀는 구슬이 완전히 붉어지기도 전에 카이를 불러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숨겼다. 이어서 페브리아 교황청 지하 입구에 숨어있다가 일말의 인기척도 내지 않고 사제의 그림자 안으로 쑥 들어갔다.
카이는 자연스럽게 이중으로 그림자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낯선 공간이 덜컹거리는 와중에도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그림자에서 완전히 나온 건 어두운 지하로 들어온 사제가 푸르스름한 불을 켠 순간이었다.
복면을 쓴 두 사람의 존재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그는, 카이의 일격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 스르륵 쓰러져 버렸다.
“카이, 이쪽이야.”
밀리타가 곧 결계의 발원지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가는 내내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가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경비가 너무 허술한데.”
“나도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리 지켜봐도 사제 몇 명이 돌아가면서 경계근무를 서는 게 전부였어. 지금부터 2시간 정도는 아무도 안 올 거야.”
한두 발자국 앞서서 걷던 밀리타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말을 이었다.
“사제들 그림자 안에서만 염탐했던 게 전부라서 외부인이 침입했을 때의 상황까지는 몰라. 움직임에 유의해.”
얼마 후, 커다란 검은 문 하나가 나타났다.
일순, 두 사람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땅바닥의 진동을 미세하게 감지했다. 곧이어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우글거리는 무언가가 시야에 걸렸다.
카이가 물었다.
“……저것도 파악한 거야?”
우글거리던 것들이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서 자주색 눈동자를 밝혔다.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였다.
부풀어진 동공으로 정면을 주시하던 밀리타가 소리쳤다.
“아니……! 뛰어!”
두 사람이 빠르게 검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밀리타가 그림자로 문을 잠그고 발을 물리자 쿵! 쿵! 난폭한 마찰음이 들리더니 우지끈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쾅!
기이한 생김새의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벌레떼처럼 달려드는 마물들을 보며 카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쓸자.”
밀리타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이가 이미 앞으로 튀어 나갔기 때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밀리타도 고민할 겨를 없이 검을 뽑아 들어야 했다.
한 시간 가까이 베고 또 베었다.
둘의 공격에 마물들은 매가리 없이 죽어 나갔으나,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밀리타는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다리가 무거워져 갔다. 그에 비해 카이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밀리타, 방해돼. 뒤로 빠져.”
“입 다물어!”
카이의 눈썹이 좁혀졌다.
밀리타가 방어해야 할 때 공격하는 습관이 나오는 패턴은 늘 비슷했다.
지칠 무렵이었다.
“검 버려.”
카이의 말에 밀리타의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검을 든 자에게 버리라니, 그만한 수치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때 카이가 그녀에게 근접한 마물을 쓸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검 버리고 마법을 써.”
“…….”
“뒤로 빠져.”
할 말을 전한 카이가 그대로 마물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밀리타는 손에 든 검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검을 왜 버려.
“카이.”
카이가 그녀의 부름에 슬쩍 돌아봤을 때였다.
밀리타가 검을 휙 던져주었다.
왼손으로 그녀의 검을 받은 카이가 스치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