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몹시 길고 긴 하루였다.
세실과 잠깐 점심만 하려 했을 뿐이었던 제인은 온종일 바빴다.
앙디스인들에게 납치도 당해주었고 솜브와 호엘리반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으며 프시오의 내면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기력이 다 빠진 듯한 모습으로 이동의 문에서 나왔다. 새벽의 푸른 빛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루의 집 정원에 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내 강아지는 바빠.”
멍한 얼굴로 앞을 보던 제인이 짧지도, 길지도 않게 그 자리에 박힌 듯이 서서 앞을 응시했다. 그러다 천천히 말을 발을 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이내, 일 분 일 초를 백 년처럼 그리워했던 품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루가 기쁘게 두 팔을 벌려 제인을 높이 안아주었다. 그의 웃음이 제인의 목덜미에 간지럽게 닿았다.
“예쁘게 안기네.”
루의 입술이 제인의 어깨와 목, 귓불까지 이어져 올라왔다.
차가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을 때부터 솜털이 곤두서 있던 제인은 얕은 숨을 골라내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얼마나?”
“집에 있는 시계를 전부 다 망가뜨리고 싶었을 만큼.”
짧게 웃음을 터트린 루가 제인을 그대로 안아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제인은 그에게서 안긴 채 말했다.
“씻고 싶어.”
루가 느긋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욕조에 차오르는 사이, 제인을 욕조에 걸터앉히고 그녀의 앞섬에 여며진 블리오 끈을 천천히 풀었다.
그가 장난스레 얼굴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하지 마?”
제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기울인 그의 고개에 맞춰 얼굴을 비스듬히 틀며 다가갔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루를 보다가 몸을 더 앞으로 기울였다.
입술이 눌러지는 감촉이 생생할 만큼 부드러운 입맞춤이 짧게 떨어져 나왔다.
“응, 하지 마.”
제인이 아주 작게 말했다.
“묻는 거.”
* * *
정말이지 너무나 긴 하루였다.
제인은 그리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편한 자세로 몸을 웅크렸다.
그녀 뒤에서 포박하듯 안고 있던 루가 제인의 한쪽 가슴을 뭉근하게 만지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제인이 움찔거리는 허리를 비틀었다.
“……또 씻고 싶지 않아.”
웃음 섞인 차가운 숨이 제인의 목덜미를 훑었다.
“몇 번이나 더 씻겨줄 수 있는데.”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제인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내 루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제법 심각하게 말했다.
“이미 몇 번을 씻었잖아.”
루는 그녀를 보며 웃다가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동그란 이마, 가지런한 눈썹, 눈가, 뺨.
가볍게 닿던 입술이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입 안으로 혀가 들어오면서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안 돼…….
제인이 밭은 숨을 내쉬며 그를 떨어뜨렸다.
그가 웃었다.
저항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소가 제인을 옭아맸다.
제인이 홀린 듯 그를 보는 사이 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안달이 나.”
미약한 열기가 도는 그의 손이 제인의 이마에 닿았다.
“널 보면 목이 마르고, 조급해.”
새벽빛에 푸르게 번진 잔머리를 쓸자,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런데 널 못 보면…… 더 해.”
다정하고, 쓸쓸했다.
“갈증 나서 죽을 것만 같아. 초조하고 불안해. 긴 시간 동안 인내라는 걸 대체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안달이 나. 내 시간이 아주…… 엉망이야.”
제인은 의문이 들었다.
너는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이 세상 온갖 푸름이 다 들어찬 푸른 눈동자는 어째서 공허하기만 할까. 어떻게 해야 채워질까. 채워질 순 있을까.
“그런데, 그런데도 제인. 나는…… 더 엉망진창이면 좋겠다 싶어.”
“…….”
“이런 나를,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루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뜨다가 조용히 웃었다. 저조차도 생각지 못한 물음이었다. 그래서 기어이 내뱉지 못했다.
데시안이 아니라 세상 무엇도 저를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하물며 인간에게 바라다니.
그럼에도 돌연히 고개를 드러낸 갈망은 그의 목덜미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제인이니까.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을 빼앗고, 믿음까지 줘버린 제인이니까.
그러니 그녀에게 바라는 이해는 사치다.
그가 평생 바라본 적 없는, 세상 그 어떤 귀한 보석보다 더 사치스러운 사치.
그때였다.
“루, 너는 내게…… 한 편의 시 같아.”
잿빛이 고요한 푸른 새벽 같은 눈동자 속에서 빛났다.
“아름답지만, 이해하지 못할 너라는 시를, 나는 사랑하고 있어.”
무척이나 사치스럽게.
“죽도록.”
* * *
이튿날, 호엘리반은 페브리아의 연합국 중 한 곳과 원하는 방향대로 교섭을 마쳤다.
그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교섭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시 앞으로의 연합에 열외가 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교묘하게 흘리면 알아서 붙을 족속이었다.
교활하고 야비한 인간은 정도를 걷는 이들보다 훨씬 다루기 쉽다.
호엘리반에게 어려움을 겪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공적인 자리에서 프시오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아닌, 제 나이의 모습인 프시오.
무릎을 꿇지 않고도 허리를 조금만 숙이면 눈이 마주치는 프시오.
그리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페브리아의 연합국은 총 네 곳이었다.
이제 겨우 한 곳.
호엘리반은 앞으로의 시간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더디게 흘러갈지 생각하자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환영 같은 프시오가 어른거렸다.
* * *
세실은 파탐을 네 개비째 피우는 중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법 양피지에 뜬 호엘리반의 서신에 머물렀다.
[프시오 오늘 쉬어야 해.
그러니까 네가 하루 더 고생해.]
이 새끼는 부탁이라는 걸 모르나?
명령 말고 부탁하라고.
세실이 거칠게 글자를 휘갈겼다. 죄다 욕이었다. 이윽고 양피지에 호엘리반의 유려한 글씨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 오빠가 기념품 사 갈게.]
이 새끼가 진짜.
세실은 깃펜을 바닥으로 힘껏 패대기쳤다.
여기까지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울화통이 터진 세실은 저녁밥도 건너뛰고 다시 한번 더 마법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짧아진 파탐을 재떨이에 짓이긴 후, 아침에 부족했던 창조성을 십분 발휘했다. 그렇게 마법 양피지에 아름답고 숭고한 언어의 향연을 열렬히 펼칠 때였다.
연구실 문이 열렸다.
세실은 깃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
프시오가 문고리를 놓고 세실을 향해 웃었다.
세실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마를 꾹 누르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다시 들었다.
원망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야, 너…… 웃음이 나와……?”
“그러게. 나는 웃음이 나오는데.”
프시오가 떨어진 깃펜을 주워서 세실의 손에 쥐여주었다.
“넌 왜 울고 그래.”
프시오였다.
멈춰졌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프시오.
저주가 풀린 프시오.
이기적이고, 저밖에 모르고, 고집스럽고, 그러면서 오지랖은 세상에서 제일 넓은, 다 큰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실의 친구였다.
* * *
제인은 루가 차려준 저녁에 왈칵,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이 집구석에서 생식을 안 해도 돼…….
곧바로 스테이크를 크게 썰어서 한입에 넣고 씹다가 꿀꺽 삼켰다.
역시 이거다.
식당에서 먹는 고기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맛있다.
이어서 루에게 포도주잔을 내밀었다.
“아무튼, 우리가 세운 계획은 여기까지야.”
우리.
루는 그 단어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구태여 티를 내진 않았다. 그저 제인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날 이용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너?”
“아이들로 음모론을 퍼트리고, 추기경을 함정에 빠뜨리고. 그런 거 번거롭지 않나? 그 나라 국민과 교황까지 모두 현혹해버리면 그만인걸.”
“너는 데시안이잖아.”
루가 제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포도주병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런데?”
제인이 페브리아를 떠날 때 시체를 위조했던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아낙시오니아를 향한 신앙심이었다.
신앙심처럼 깊은 내면을 현혹하려면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한 현혹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네 현혹으로 사람들의 영혼이 훼손되잖아. 죄 없는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마드리안 교황은…… 생각해둔 게 있어.”
“그래. 그건 그렇고.”
루가 웃었다.
“누가 내 현혹을 떠들어 댔지?”
제인이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스테이크를 잘라 먹었다.
“보아하니 프시오군.”
“……아니야.”
루가 턱을 괴고 장난스레 말했다.
“이것 좀 봐. 인간들은 이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깜찍하게 하지.”
“…….”
“날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일지도 모르겠군.”
“…….”
“보고 싶었다는 말도.”
제인은 불행히도 감이 좋았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패배는 자신의 몫이라는 걸 빠르게 인정했다.
“프시오한테 뭐라고 하지 마. 예전에 사막에서 지낼 때 내가 걱정됐는지 귀띔해 준 거야.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그래. 프시오에게 전해 줘, 제인.”
루가 애살스럽게 웃으며 제인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조심하라고.”
“그러지 말래도. 프시오는 내 소중한 환자란 말이야.”
뭘 하려거든 호엘리반 그 새끼한테 하라고.
제인은 목구멍까지 나오려는 말을 애써 지웠다. 저를 말라 죽도록 시달리게 했던 빌어먹을 사내는 프시오에게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루와 뭘 해도 싫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
“놀라지 마.”
“그래.”
“내가 프시오의 저주를 풀었거든.”
제인은 생각지 못한 루의 표정에 놀라워했다.
“놀라지 말랬다고 그렇게까지 심드렁한 표정 지을 필요 있어? 내 능력에 대한 경외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감탄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아, 놀랍군.”
“……됐다, 됐어.”
루가 킬킬거리며 대화 주제를 바꿨다.
“생각해 둔 게 있다는 건 뭐지?”
“그게…….”
그때, 제인의 품 안에서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호엘리반이 준 주머니를 꺼내 보자 마법 구슬 하나가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호엘리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두 상시 가지고 있으세요. 말렌 추기경의 마나가 잡히면 구슬이 붉어질 거예요. 그때 동시에 구속해야 해요. 추기경의 마나도, 결계의 원천인 드래곤의 마력도. 실수 없이 한 번에.
제인이 마법 구슬에서 눈길을 거두고 루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나쁜 짓을 하게 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이내 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나랑 같이 나쁜 짓하러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