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호엘리반의 손등에 프시오가 연상한 황금빛 나비가 날개를 느리게 움직이며 앉아있었다.
나비는 그대로 날아오르더니 프시오와 호엘리반의 주변을 맴돌았다.
프시오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 호엘리반이 말했다.
-당신이 연상한 나비가 살아 있는 건 아니에요. 생명을 부여하는 건 오직 신만이 가능한 영역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움직이는 겁니까?
-당신, 그림자를 움직일 줄 알죠? 아마 어렸을 때부터 드래곤과 교감이 있었을 테고요.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피 말고, 깊은 교감을 통해서도 드래곤 마력이 주입되기도 하니까요. 아주 희박한 확률로.
-아……!
-그래서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연상한 거예요. 심지어 당신, 연금술 재능을 타고났어요. 드래곤 마스터로만 살기 아까울 만큼.
프시오의 재능을 알아본 호엘리반이 그녀에게 드호아망 마탑에 입학하길 권유했다.
이듬해,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프시오는 호엘리반의 제자가 되었다.
호엘리반의 악랄한 가르침 아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녀는 드호아망에서 호엘리반에 버금가는 마법사가 되어있었다.
천재에 의한 천재라 불리며.
프시오는 조기 졸업과 동시에 마탑의 임시 교수가 되었다. 임시 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앞날이 밝고 창창했다.
햇살이 가득한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그림자처럼 살지 않아도 되었고, 심장이 뛰는 일을 했으며, 높은 연봉을 받았다.
행복했다.
분명 행복한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모순적이게도 불안함을 느껴야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유 모를 불안함이 계속되던 어느 날.
호엘리반이 아버지께서 엘마뉴엘에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며 그곳의 생활에 대해서 조언을 구했다.
엘마뉴엘…….
그 순간, 프시오는 자신이 무얼 두려워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녀는 곧장 도망치듯 나와서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도착한 곳은 드호아망 도서관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콜드리센의 대기사인 테라얀에 대한 기록물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읽었다.
십 년이 지나서 봐도 그는 영웅의 가면을 쓴 학살자였고, 자신은 콜드리센에서 엘마뉴엘로 망명을 떠난 학살자의 딸이었다. 마약 중독으로 죽은 여자의 딸이었다.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갈 때는 경계를 잃었던 그 단어가, 빛으로 나오자 더없이 선명해졌다.
들키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이 프시오의 본질적인 두려움이었으며 불안의 이유였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나 당신과 저를 숨겼는지, 그리고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가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들이 불행하게도 이해되었다.
명성과 명예를 얻으며 세상 밖으로 나오자 오히려 일고여덟 살의 프시오가 멍청이라고 생각했던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 손가락질받고 싶지 않은 것. 비난받고 싶지 않은 것.
그 모든 게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항하기 힘든 두려움이 프시오의 무의식을 늪에 빠뜨리고 있었다.
천재에 의한 천재!
그렇게 불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끈 순간부터이리라.
불안의 근원을 알게 된 프시오는 본능적으로 늪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았다.
돈.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집약한, 돈이었다.
그녀는 콜드리센의 영토를 장악한 페브리아 곳곳에 있는 보육원을 모두 추려서 한 곳도 빠짐없이 매달 기부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불안이 가라앉았다.
누군가 자신을 힐난한다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세상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페브리아의 한 보육원에서 후원인의 밤 행사 초대장이 왔다. 프시오는 행사를 조용히 보고 올 생각으로 보육원을 방문했다.
무릇 공식적인 행사가 그렇듯 거의 무료했으나, 아이들의 귀여운 장기자랑을 볼 때만큼은 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장기자랑 순서가 끝난 뒤, 무대에 오른 건 다름 아닌 프시오였다.
그해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후원인으로 선정되어 감사패를 받은 그녀는 얼떨결에 소감까지 말하고 나서야 무대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성황리에 마무리된 후원인의 밤이었다.
마법이 금지된 페브리아였기에 이동의 문을 열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아다닐 때였다.
보육원 건물 주변과 떨어진 작은 창고 뒤에서 담배를 피우던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테라얀이 만들어 낸 고아들을 그 딸이 먹여 살리고 있었군. 애초에 제 아비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살았을 아이들인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프시오는 곧장 그림자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침을 뱉으며 말하는 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콜드리센 전역을 함께 여행했던 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그와 그의 주변인들은 프시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명예 후원인이라니, 쯧.
-그때도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건 어미나 딸년이나 똑같다고 생각했지.
-자네들 그런 인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어둠에 경계가 흐려진 그림자 속, 조소가 묻은 칼 한 자루가 박혔다.
-위선자.
그날, 프시오는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귓속을 맴도는 위선자, 라는 말만이 그녀를 옥죄듯 괴롭힌 기억만 토막토막 나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프시오는 마나의 힘을 끝까지 끌어올리며 연금술을 펼쳤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빛이 집안으로 광활하게 뿜어져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일순, 번개가 번쩍거리며 고요한 집안을 비췄다.
그곳에는 마음 안에서 미쳐 다 자라지 못한 열 살배기 어린아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프시오였다.
* * *
프시오의 내면에서 펼쳐진 일련의 장면들을 본 제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시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다 얕은 한숨을 쉬며 프시오의 저주가 있는 문을 한 번에 찾았다. 제인은 문틈에서 검은 잉크 같은 게 줄줄 흘러나오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안에서 성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당신 저주를 풀려고 왔어.”
문 앞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잉크 같은 검은 액체가 문에서 흘러나와 제인의 손을 감싸면서 끌어당겼다. 문 안으로 들어간 제인은 검은 액체에 젖은 몰골로 어둑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소파에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의 정체는 내면의 또 다른 프시오이자, 문 안의 주인이었으며, 푸른 빛이 희미하게 둘러싸인…….
“……그림자.”
제인의 중얼거림에 그림자가 키들거렸다.
제인은 그림자를 향해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림자의 형태가 또렷해졌다.
그림자는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의 것이었다.
그림자의 코앞까지 온 제인이 말했다.
“당신이 저주구나.”
<저주를 풀러 왔다고?>
“응.”
그림자가 손을 위로 들었다. 이윽고 그림자의 손끝에서 푸른 테두리를 두른 검은빛이 날카롭게 솟아오르면서 검이 되었다.
단검이라 하기에는 길고, 장검이라 하기에는 짧은 검이었다. 그림자는 웃으면서 제인의 발밑에 검을 던졌다.
<날 죽여.>
제인은 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줍지 않고 시선을 올렸다.
“당신을 없애지 않고도 치유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어. 나를 당신의 무의식으로 데려가.”
<소용없어.>
그림자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 근원은 마음의 병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드래곤의 마력이 깃든 저주니까.>
그림자가 제 심장 부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길 찔러서 죽여야지만 풀리는 저주. 그러니까 어서 나를 찔러.>
“…….”
<그리고 내 이성에게 전해. 저주가 풀려도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말이야. 사랑을 바라는 한, 영원히.>
제인이 웃음기 없이 물었다.
“무슨 뜻이야?”
<여기 들어 오면서 봤잖아. 이상하지 않았어? 어릴 땐 사생아든 뭐든 비난이 무섭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두려워진 걸까?>
그림자가 제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제인의 손에 들려주었다.
<주제넘게 사랑까지 바라서 그래.>
“…….”
<마법으로 인정받더니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그림자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사생아인 주제에. 학살자의 딸인 주제에.>
제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림자는 검을 쥔 제인의 손을 꽉 잡으며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찌르기 쉽게.
<프시오는 절대로 밝은 곳에서 행복해지지 못해. 밝은 곳에서는 보이고 싶지 않은 것까지 선명하게 드러나니까. 태어난 근본 자체가 치부고, 치욕이거든.>
그렇게 검이 그림자에게 닿기 직전.
“그래, 이제 알겠어.”
제인이 슬며시 웃으며 검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림자의 손을 끌어내렸다.
“아주 잘 알겠어. 프시오가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그 엄격함에 얼마나 오랫동안 얽매여 있었는지, 그리고 저주를 풀려면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까지.”
제인은 그 이면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점을 아주 높이 그어놓은 엄격함에서 비롯한 좌절이었다.
제인의 시선이 그림자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엄격함이 좋아.”
<뭐……?>
“당신의 예의 바른 언행이 좋아.”
<…….>
“당신의 다정함이 좋고, 마음 한구석에 있는 음침함이 좋아. 바람직한 탐욕이 근사해. 올곧은 위선은 더할 나위 없어.”
제인은 허리를 숙이고 그림자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그림자마저도 따뜻한 당신이 좋아.”
<…….>
“호엘리반, 세실, 펠드툰 아저씨, 솜브, 밀리타, 카이, 로안나 씨와 엔니오 씨까지 모두 당신을 좋아해.”
<……왜?>
“당신은 사랑스러운 사람이거든.”
제인의 말에 그림자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물었다.
<프시오가 사랑받고 있어?>
“사랑받고 있어.”
제인은 그림자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프시오가 원래 모습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저주든 뭐든 당신의 일부분이 혼자 외롭게 사라지는 건 내가 마음 아파서 안 되겠어.”
제인이 검을 잡은 손을 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그림자의 등을 깊게 찔렀다.
칼끝은 그림자의 등과 심장을 지나서, 제인의 등까지 뚫고 나왔다.
“이건 내 위선이야.”
그곳에서의 제인은 죽지 않으므로.
그림자가 작게 탄식했다.
<아아…….>
이내 편안히 눈을 감은 채 나직이 웃었다.
<상냥한 위선이구나.>
제인은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그림자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이 가진 위선이 훨씬 더 상냥하다고.
다정하고 따뜻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