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루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욕실로 가버렸다.
그리고 옷도 벗지 않은 채 물을 받는 욕조에 들어가서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몸과 옷에 굳어있는 핏물이 욕조에 번졌다.
그동안 라트올은 잠시 굳은 듯 서 있었다.
루가 쥐여준 내핵은 마석과 비슷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손에 닿은 것만으로도 찌릿찌릿한 감각이 몸 전신으로 퍼져갔다.
그는 내핵을 만져 본 경험이 많지는 않으나 적어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평범한 데시안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멍하니 내핵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지하 작업실로 내려갔다.
열쇠는 서랍에 넣어두고 내핵은 보존력이 강한 마석을 갈아서 물에 희석한 뒤 유리 상자 안에 담았다.
잠깐 만졌을 뿐인데도 기력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빈손에 내핵의 감각이 남아서 덜덜 떨렸다.
그는 감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작업대에 손을 짚으며 천천히 숨을 쉬다가 다시 1층으로 올라가서 욕실 문을 열었다.
욕조 안은 붉었으나 루가 말했던 대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럼 묻어있던 피는 내핵의 주인이리라.
“루. 저 내핵, 누구 거예요?”
루는 대답이 없었다.
라트올은 부디 자신의 예감이 틀리길 바라며 다시금 물었다.
“……마왕님은 아니죠.”
야트막하게 웃는 얼굴로 루가 대답했다.
“맞아.”
라트올은 머리가 아찔했다.
저 정도 마력이라면 마왕 정도는 되어야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마왕님이었다니.
누구든 분노 섞인 조급함을 느끼고 있을 루를 건드렸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마왕인 하이데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명계가 발칵 뒤집히는 건 물론, 천계에서도 마왕의 자리가 비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사사건건 간섭하거나 트집을 잡으려 들 게 분명했다.
라트올은 소리 없이 머리를 쥐어뜯다가 망연하게 물었다.
“뒷수습은요…….”
루는 눈을 감은 채 나른하게 웃었다.
“하고 오느라 늦었지.”
새로운 마왕을 앉힐 때마다 지옥부터 명계까지 모조리 현혹해야 한다. 하이데스를 마왕에 앉힐 때도 족히 한 달은 걸렸다.
그걸 이틀 만에 하고 왔으니 루도 진이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얼마간은 별 탈 없이 잠잠하리라.
루의 이야기를 들은 라트올은 한시름 던 듯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그 많은 존재를 겨우 이틀 만에 현혹했으니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다.
어느새 눈을 뜬 루는 라트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유유히 웃었다.
“그래서 내핵을 가져온 거니 걱정하지 마.”
“……일단 지하 작업실 유리통에 담아 놨어요.”
“그래.”
루는 붉은 물로 세수하다가 아직도 욕실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라트올에게 나가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라트올은 탐탁지 않은 마음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옷은 벗고 씻으세요.”
* * *
같은 시각.
호엘리반의 자택으로 돌아온 프시오는 방안에서 밀리타가 보낸 마법 양피지를 보고 있었다.
[프시오. 페브리아 교황청 지하에 흑마법을 쓰는 자들이 감금돼 있어서 알아봤더니 전부 콜드리센 출신들이었어요. 그리고…… 마드리안 교황이 당신을 알고 있어요.]
이어지는 단락에 프시오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프시오가 아닌, 프시오 로디테라는 걸요.]
그때 바깥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시오는 양피지를 둘둘 말아서 서랍에 넣었다. 방문을 연 호엘리반이 등지고 서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프시오, 준비됐어?”
돌아선 프시오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 * *
사생아.
프시오가 그 단어를 이해했던 건 일고여덟 살 무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떳떳하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던 그 이상한 단어가 프시오 자신을 지칭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확실히 이해한 건 그쯤이었다.
사생아.
어린 프시오가 그 단어를 곱씹었다.
나의 잘못일까?
그래서 다들 숨어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명백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어린 프시오가 그렇게 바람직한 결론을 내렸음에도, 어머니는 프시오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저택 안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삶 자체는 윤택했다.
콜드리센에서 황제의 권위에 맞설 정도로 높은 지위를 가졌던 기사인 테라얀이 부친이었으니 좋은 집,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다만 어머니와 단둘이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는 게 정상은 아니라고 여겼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해봤자 어른들은 저를 비정상이라고 할 게 뻔했다. 프시오는 멍청한 어른들 덕에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사생아.
그 단어가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프시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어른들은 그걸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저 저를 사생아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하는 무지한 인간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는 애석하게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테라얀이 보내는 돈과 갖가지 보석들을 받는 게 삶의 낙인 여자였다.
프시오는 인간이 돈과 보석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치와 허영에 영혼을 갉아 먹히는 건 어리석다고 여겼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며 결심했다.
저 여자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프시오는 넓은 저택 안에 갇혀서 한정적인 것만 보며 자랐다.
실내에 있을 때는 책을 읽었고 실외에 있을 때는 드래곤과 함께 있었다.
책과 드래곤.
프시오 삶의 전부였다.
얼마 후.
어머니는 프시오의 결심을 굳히는데 헌신이라도 하듯 미쳐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테라얀이 보내는 돈과 보석이 끊겼을 때부터였다.
어머니는 프시오를 앞에 두고서 부친인 테라얀을 비난하는 날이 늘어갔다. 프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들어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비난은 프시오를 향해 있었다.
-독한 년. 넌 네 아비를 똑 닮았구나.
프시오는 그 말이 조금 웃겼다.
그럼 누구를 닮지?
어머니는 삶의 끔찍함을 이겨 내는 방법으로 약을 하기 시작했다. 프시오는 멍청한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그건 포기였다.
눈앞의 여자가 인간처럼 살아가는 게 불능하다는 포기.
프시오가 테라얀의 얼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마약에 중독된 몰골로 생을 마감한 여자의 끝은 처량할 만큼 볼품이 없었고 테라얀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날, 테라얀은 프시오에게 막대한 재산을 증여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프시오는 묻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는 어머니가 당신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이 없지만, 단 한 순간만이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이 있느냐고.
그러나 물을 수 없었다.
멀어지는 등이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시오는 깨달았다.
나는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구나.
뒤늦게 슬픔이 몰려왔다.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있던 눈물들이 둑이 무너지듯이 한꺼번에 터져서 살갗이 무를 만큼 흐르고 또 흘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주저앉아서 울 수는 없었다. 무릎을 세워야 했다. 그녀를 일으켜 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열 살 남짓.
큰 저택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던 프시오는 책 속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고용했던 하인들을 모두 해고하고 면접을 통해 단기로 뽑은 수행원들과 함께 콜드리센 전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그 단어에 수행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프시오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울타리 밖으로 나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콜드리센은 수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전쟁의 여파로 성한 곳이 없었다.
책과 드래곤이 삶의 전부였던 프시오는 참담한 현실을 깨우쳤다.
멍청한 것은 자신이었다.
화려한 저택 안에서 마약에 취해 죽어가던 여자를 봤던 삶만이 지옥이 아니었다. 바깥에는 눈 닿는 곳이 전부 지옥이었고 비극이었으며 절망이었다.
전쟁이란 그토록 참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참혹함의 중심에 있는 자가 테라얀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시오의 눈에 테라얀이 일으키는 전쟁은 목적이 없었다.
도취된 승리, 그 외에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프시오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영웅이라면, 영웅이 학살자와 무엇이 다른가?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넌 네 아비를 똑 닮았구나.
프시오는 그 말이 여전히 웃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신들 사이에서 사랑 없이 태어난 나는 당신들을 닮아서는 안 되는구나. 당신들처럼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구나.
그것도 평생을.
전쟁은 계속되었다. 승리가 땅에 박힌 전장이었으나 남겨진 건 힘없는 노인과 여자들, 그리고 저와 같은 고아들이었다.
프시오는 차라리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 지옥이 끝날 테니.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한 번쯤은 찾아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이 휘청이는 사이, 거짓말처럼 테라얀이 전사했다.
페브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콜드리센은 멸망했고, 그녀의 숨겨진 여식이었던 프시오는 엘마뉴엘로 망명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엘마뉴엘로 휴가 온 한 소년을 만났다. 열일곱에 드호아망 마탑의 정교수가 된 천재 마법사, 호엘리반.
우연히 호엘리반의 연금술을 본 프시오가 그에게 말했다.
-저, 연금술 마법…… 가르쳐 주면 안 됩니까? 아주 간단한 거라도 좋습니다.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프시오를 물끄러미 보던 호엘리반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금화 한 닢을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이어서 천천히 손을 들고 프시오의 이마를 콕 짚었다.
-연금술의 흐름은 여기서부터 시작돼요. 눈을 감고, 숨을 여기로 쉰다고 생각해 보세요.
프시오는 이어지는 호엘리반의 설명을 차분하게 따라갔다.
이윽고 그가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이제 무엇이든 좋으니 연상해 봐요.
무엇이든.
그 말에 프시오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집중했다.
잠시 후, 호엘리반이 실소를 터트렸다.
-눈 떠 봐요.
프시오가 찬찬히 눈을 떴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연금술 마법은 고사하고 멀쩡한 금화는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 작은 실망스러움이 스칠 때였다.
호엘리반이 자신의 손등을 내밀어 보였다.
-아주 간단한 연금술 마법만 배우기에는 아까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