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무슨 말이에요? 솜브가 화신이라고요?”
제인의 물음에 프시오와 세실이 잠시 서로를 보았다.
세실이 파탐을 입에 문 채 등을 돌렸다. 알아서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상시 대기해야 할 연구실 자리를 오래 비워두었다.
프시오는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내일은 교대해.”
“어.”
세실이 나간 후, 프시오는 솜브와 화신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가늠했다.
“이건 조금 긴 이야깁니다.”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시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페브리아와 앙디스가 보호 협정이 맺어지게 된 내막은 호엘리반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죠.”
“네.”
앙디스는 예로부터 해적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나라였다.
그걸 알고 있던 페브리아는 앙디스에 해적의 침입에서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은밀하게 드래곤 마석을 상납하도록 요구했다. 그렇게 보호 협정이 맺어지게 되었다.
프시오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해적의 침입이 점점 더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인은 빠르게 이해했다.
“그만큼 상납해야 할 마석도 늘어갔겠네요.”
“네. 앙디스인들이 드래곤의 화신을 깨운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화신에게 얻은 마석은 평범한 드래곤 마석의 수백, 수천의 힘을 발휘하니까요.”
“보호 협정 이후에 더 잦아진 해적의 침입은 마드리안 교황의 계략이었을 테고요.”
옴푸푸스 때처럼.
제인의 말에 프시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마드리안 교황은 봉인에서 깨어난 화신이 폭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군대를 풀었고, 이후 앙디스의 국권을 강탈했습니다.”
제인은 마드리안의 수작질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요…….”
저도 모르게 의아한 얼굴로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린 제인이 아, 하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프시오가 괜찮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이 말을 이었다.
“화신을 깨웠다고 했는데, 원래는 봉인되어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요?”
“네.”
제인은 드래곤의 화신이고 봉인이고 하나도 관심 없었다. 그런 건 페브리아의 아낙시오니아와 같은 종교적인 상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화신이라는 게 천둥 번개에 질질 짜는 솜사탕과 관련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봉인했던 이유는 뭐였죠?”
프시오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다가 엷게 웃었다.
계획에 합류한 이상 최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는 게 마땅했으나 호엘리반은 제인에게 자신과 연관한 것들은 교묘히 제외하고 알려준 듯싶었다.
예를 들어 해적이라던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호엘리반은 냉혹할 정도로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해왔고, 자신의 과거를 상처로 여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기에 호엘리반이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투영한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프시오는 미소를 털어내고 담담하게 말했다.
“앙디스인들은 마력이 없는 민족이었지만 마법에 대한 결핍이 상당했습니다. 그들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드래곤의 화신과 계약했습니다.”
“!”
제인은 제 손목을 보았다.
시선 끝에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데시안과 계약한 흔적인 각인이 닿았다. 그녀는 그게 얼마나 나약한 자의 상징인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프시오가 이어서 말했다.
“계약 조건은 일 년에 한 번, 어린아이에게 드래곤의 피를 마시게 해서 죽으면 화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죽지 않으면 화신의 힘을 계승 받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인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에 대한 결핍이 있다고 해도, 자식을 제물로 바치고 싶어 하는 부모가 있나요?”
“앙디스에서는 그 의식을 제물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을 반역으로 몰아서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그들은 제물이 아닌, ‘전통을 계승하는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모두 겉으로는 영광이라고 표현했지만, 자신의 아들딸들이 영광을 누릴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소년이 수년간 혼자서…….”
말이 뚝 멈춰졌다.
프시오가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었다.
“……혼자서 의식을 치렀고, 앙디스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영광의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제인의 시선이 꽉 쥔 주먹을 향해있다는 걸 눈치챈 프시오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긴 숨이 뱉어졌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앙디스를 떠나버리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으니까요. 위기감을 느낀 장로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프시오가 이어서 말했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아들에게 영광을 누리게 해야 할지, 아니면 화신을 봉인해야 할지.”
“그렇게 봉인이 된 거군요.”
프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앙디스인들은 자금을 모아서 드래곤의 화신을 봉인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마드리안 교황은 그토록 어렵게 봉인했던 화신을 깨우게끔 불을 지폈던 겁니다.”
제인이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프시오를 바라보았다.
“혹시, 쿠드칸 장로의 아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봉인이 풀어지게 된 건가요?”
프시오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습니다. 쿠드칸 장로는 마드리안 교황의 계략을 빌미 삼아서 드래곤의 화신을 다시 깨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째서…….”
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프시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마드리안 교황의 잔혹함은 이해됩니까?”
제인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뇨, 아니네요.”
프시오는 제인의 표정이 말끔해진 것을 확인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봉인이 풀린 화신은 폭주했습니다. 당시 안식년이었던 저는 마침 앙디스 근처 나라에 있었고, 화신이 폭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아…….”
제인도 궁정에서 당시 상황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그때 페브리아가 군대를 동원했는데도 화신을 잠재우지는 못했다고 들었어요.”
“네. 한시라도 빨리 봉인하지 않으면 주변 나라까지도 엉망이 될 게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앙디스에 화신을 봉인하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제인은 프시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궁정에서 들었던 뒷이야기를 떠올렸다.
페브리아 군대가 흉포하게 공격하는 드래곤의 화신을 진압은 고사하고 막아내는 것도 겨우 하고 있을 때…….
제인은 설마 하는 얼굴로 숨을 들이마시며 프시오를 바라보았다.
“그때, 저는 쓰러져있던 솜브를 발견했습니다.”
프시오가 다소 상기된 목소리를 내었다.
“연분홍색 드래곤은 화신의 혈통이었습니다. 드래곤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혈통을 무척이나 귀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솜브를 그릇으로 삼는다면…….”
“적어도 깨지지 않을 거라고 봤군요.”
“……예상은 맞아떨어졌습니다.”
“프시오, 페브리아에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어요.”
제인이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시 군대가 고전하던 중에 갑자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내리면서 드래곤의 화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요.”
그러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 빛…… 프시오의 마법이었던 거죠?”
“……그렇습니다.”
제인은 프시오의 무심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노고가 엄한 인간에게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마드리안 교황은 더럽게 운이 좋은 인간인가 봐요. 교황청에서는 그걸 아낙시오니아의 수호라고 떠들어대면서 신나게 이용했어요. 알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관심 없어 보이네요.”
“제게 중요했던 건 솜브의 안위였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프시오는 솜브에게 봉인했었던 화신이 깨어난 일, 펠드툰이 화신의 정신을 파괴했던 일, 그리고 그로 인해 엘마뉴엘에 나흘 정도 있었던 일까지 말해 주었다.
제인은 솜브에게 화신의 힘이 남은 것 말고는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호엘리반은 어째서 자세한 내막을 말해 주지 않았던 걸까요.”
제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호엘리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내막을 미리 알았다면 지금 페브리아에 돌고 있는 ‘그 소문’에 힘을 실을 수 있는데.
그때, 전보다 가라앉은 프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년간 혼자서 앙디스의 의식을 치렀던 소년 말이죠.”
창밖에 두었던 제인의 시선이 천천히 프시오 쪽으로 옮겨지다가 그 너머로 가닿았다.
“그 소년이 호엘리반입니다.”
“……!”
제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문에 기댄 채 여유롭게 팔짱을 낀 호엘리반이 있었다. 제인은 뒤늦게 그가 자세한 내막을 말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했다.
호엘리반의 눈길이 프시오에게 닿았다가 제인에게 머물렀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곧이어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제인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
징글징글한 인간.
한다, 해.
진료하면 되잖아……!
* * *
라트올은 기겁한 얼굴로 피투성이인 루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다치셨어요?”
“아니.”
그럼 그 피는 뭔데요.
라트올이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 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씻어야겠군. 지금 이 꼴을 보면 놀랄 테니.”
“제인은 외출했어요.”
루가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이어서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품에서 검붉은 무언가와 열쇠 하나를 꺼내어 라트올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지고 있어. 네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겠지.”
열쇠를 보자니 어느 날 루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
-그레데엘므가 죽어서 틀어박힐 자리.
그날의 숨 막히는 공포가 되살아나서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 안 됐다. 라트올이 당혹스러운 건 다름 아닌 검붉은 것의 정체였다.
“이건 내핵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