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쿠드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예의도 없어졌고.”
호엘리반이 짧게 탄식했다.
“쓰레기에게 무슨 예의?”
“…….”
그 사이 철근에 네 발바닥이 박혀있는 돼지 역시 쓰러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싸늘하게 죽어버렸다.
호엘리반은 죽어가는 돼지 등에 난 털을 가볍게 쓸어 만지며 얕게 미소 지었다. 세밀한 곳까지 완벽한 돼지의 형체에 만족스러운 듯이.
“아무리 쓰레기여도 그렇지 감히 프시오를 건드려?”
“……앙디스인들은 네가 먼저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호엘리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실로, 그는 은밀하게 앙디스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에는 세 가지 조건이 걸려 있었다.
첫째, 드호아망은 마법 군대를 결성하여 겨울 내로 전쟁을 추진한다.
둘째, 앙디스는 자주국이 아닌 드호아망 소속으로 독립한다.
셋째, 호엘리반은 앙디스의 독립을 기준으로 앙디스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종결한다.
책임과 의무?
처음부터 호엘리반에게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앙디스인들은 집요하게 그에게 그 두 가지를 강요하며 테러를 감행했다.
그러다, 앙디스인들의 악의를 목도하고 모든 정황을 알게 된 세실이 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게 페브리아로부터의 독립이라면 앞으로 점점 더 집요하게 전쟁을 독촉할 거다.
-역시 다 죽여버리는 게 나으려나.
세실은 마음이 복잡했다.
앙디스는 그녀와 호엘리반 어머니의 생명을 천천히 갉아먹은 나라였다.
세실이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얼마나.
호엘리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끝이 없을 걸 알기에 원망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세실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세실 역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후, 호엘리반은 앙디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며 데시안의 내력이 남아있는 인간으로 쿠드칸을 의심했다.
그를 죽인다면 잠잠해질까? 글쎄. 강한 마력을 소유한 호엘리반에게는 통하지 않을 만큼 내력의 강도가 미미했다.
그러니 내력은 부가적인 요소일 뿐, 쿠드칸의 세뇌와 그를 향한 앙디스인들의 맹목적인 신뢰가 이뤄낸 형국이었다.
쿠드칸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바퀴벌레처럼 호엘리반의 주변에 들끓을 것이리라.
호엘리반이 앙디스를 살피는 동안 그를 향한 앙디스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 갔다.
그러면서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앙디스인들이 집착하는 본질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드래곤의 화신을 너머서 데시안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마법을 향한 아주 오래된 결핍이라는 것임을.
페브리아에 속박된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힘을 요구할 운명이었다.
호엘리반은 결심했다.
그 족쇄와 같은 운명을 끊어내기로.
그렇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앙디스에 전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다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
제인의 합류는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호엘리반은 즉시 계획을 변경했다. 곧바로 앙디스 쪽으로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전달했으나 답변이 없었다.
긍정적인 침묵이 아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앙디스인들은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상황 보고를 요구하는 전갈을 시도 때도 없이 보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앙디스인들은 쥐새끼처럼 테러도 함께 감행했다.
그랬던 그들에게 즉각적인 답장이 없었으니 호엘리반은 당연히 무언가 작당을 꾸미리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프시오를 건드린 건 예상 밖이었다.
프시오는 호엘리반이 사소한 부분까지 보석을 세공하듯 정교하게 가르쳐서 완성시킨 마법사였다.
호엘리반만큼 강했고, 앙디스인들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실이 앙디스의 문장이 찍힌 종잇조각을 가져왔을 때 그는 피가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소름 끼치는 희열을 느꼈다.
죽이자.
말끔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 전까지 소리 내어 웃던 호엘리반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쿠드칸을 보며 광기를 흘렸다.
“나는 당신이 그들에게 ‘호엘리반이 약속을 어겼다.’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리라 보는데.”
“이 늙은이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힘이 없다?”
“이제는 허수아비라네.”
호엘리반은 즐거운 듯한 얼굴로 한 글자씩 힘을 주며 말했다.
“늙고, 힘없는, 허수아비.”
그가 남은 사슬의 잔해를 거머쥐었다. 잔해는 곧바로 칼날로 변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튕긴 칼날이 쿠드칸의 오른쪽 귀를 땅바닥에 툭 떨어뜨린 후 벽에 박혔다.
이윽고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한 박자 늦게 울려 퍼졌다.
“아아악!”
호엘리반을 담았던 빛바랜 붉은 눈동자가 분노와 고통으로 번들거리다가 바닥으로 향했다. 쿠드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땅에 떨어진 자신의 오른쪽 귀를 보았다.
“내, 내 귀……!”
“당신이 정말 허수아비였으면 여기서 제일 먼저 죽었어.”
호엘리반은 칼날을 하나 더 만들어서 쿠드칸의 귀가 잘려 나간 방향으로 다시 날렸다. 칼날은 흰 머리카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빠르게 스치더니 먼저 날렸던 칼날이 박힌 곳에 정확하게 꽂혔다.
“잘 생각해봐. 내가 지금까지 당신을 살려둔 이유.”
이번에는 아무것도 베이지 않았으나 쿠드칸의 표정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생을 통틀어 이렇게 직접적인 위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분노가 덮일 만큼 공포로 얼룩진 표정을 짓는 것 또한 그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설마, 이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소꿉장난이나 하자고 살려뒀을까?”
일순, 두려움으로 술렁이던 붉은 눈이 예리하게 빛나면서 희미한 마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호엘리반에게 닿는 찰나 공기 속으로 사그라져버렸다.
의심이 확신으로 뒤바뀐 순간이었다.
호엘리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쿠드칸이었군.
여유로운 그에 반해 쿠드칸은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그 얄팍한 마법은 내게 안 통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약하고 멍청한 다른 앙디스인에게는 먹혔겠지.”
“…….”
“정답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알려줄게. 당신을 살려둔 이유가 바로 그거야. 앙디스인들은 당신에게 순종적이니까.”
호엘리반은 쿠드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떨어진 오른쪽 귀를 발로 짓이겼다.
“똑바로 들어. 내 심기를 또 건드리면 이다음은.”
그는 손목을 들어 올리지도 않고 성의 없이 손가락을 튕겨냈다.
딱.
소리가 나는 동시에 구석에 몰려있던 돼지들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까맣게 탄 고깃덩어리가 벽과 바닥에 들러붙었으나 호엘리반에게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있는 게 이질감이 들 정도로 깨끗한 차림이었다.
“당신 아들이야.”
“……!”
쿠드칸의 붉은 눈이 커다랗게 부풀어졌다. 영혼이 빠져나오는 듯이 벌어진 그의 입에서는 쇳소리에 가까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호엘리반이 스산하게 웃었다.
총명한 소년은 자라서 어린 날의 다짐을 모두 지켰다.
최고의 마법사가 되었고, 제 머리 위로 사람을 두지 않았으며, 소중한 이에게 손을 대는 이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목숨을 앗아갈 시기와 순서까지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앙디스에 가서 전해.”
내내 웃고 있던 호엘리반의 얼굴에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계획이 변경되었을 뿐, 약속은 지킬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