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장로의 붉은 눈동자를 조용하게 바라보던 어린아이가 미성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만약 의식을 치르고 제가 죽은 후에 어머니가 깨어나시면.
어린아이는 시선을 아래로 한 번 떨어뜨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이어서 말했다.
-해적이 데려갔다고 해주세요.
-…….
-약속하세요, 장로님.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아홉 살.
소년은 드래곤의 피를 마셨다. 드래곤의 피는 냄새도, 맛도 역겨웠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고 마력을 얻었다. 앙디스는 새로운 마법사의 탄생에 기뻐했으나 소년은 그날 밤 혼자였다.
열 살.
병원 진료에도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역겨운 드래곤의 피를 마셨고, 훨씬 더 큰 마력을 얻었다. 그날 밤도 혼자였다.
열한 살.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 해에도 소년은 드래곤의 피를 마셨다. 앙디스의 몇 없는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법사가 된 소년은 사나운 드래곤과 해적 등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앙디스를 지켰다.
앙디스에 어린 천재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이 주변 나라까지 퍼졌다. 앙디스인들은 호엘리반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혼자였다.
열두 살.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드래곤의 피를 마셨다. 강한 마력이 몸에 터져 나올 듯이 흘러넘쳤다. 더 이상 드래곤의 피를 버텨내기 어려운 듯이 모든 근육이 불에 타는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날 밤 역시, 언제나 그렇듯 혼자였다.
열세 살.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드래곤의 피를 마시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두 명의 의사가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소년을 살려내었다. 의식이 돌아온 소년이 느리게 눈을 뜨려고 할 때였다.
소년은 의사들의 대화를 듣고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쳐 죽일 새끼들!
한 의사가 거칠게 욕을 했다.
그의 곁에 있던 다른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자네, 흥분하지 말게. 우리도 그들과 똑같아.
-나도 알아! 하지만 알잖나! 작년에도, 올해도 호엘리반은 정말 죽을 뻔했어! 제 어미의 병은 더 이상 나을 수도 없는데!
다른 의사가 차분하게 말을 끊었다.
-그럼? 자네 딸에게 전통을 계승하게 할 텐가?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협박을 받고 있는지 잊지 말게.
-……빌어먹을.
-나도 자식 가진 아비로서 자네만큼이나 비참하네. 하지만 자네나 나나 호엘리반을 대신해서 분노할 자격은 없어. 수년간 저 애에게 생모의 병이 더 이상 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
-저 아이를 지키지 못한 모두가 가해자라네. 분노하기보다, 속죄해야 할 가해자.
의사들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주변은 고요했으나 호엘리반에게만큼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귓속에 둔탁한 고동 소리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소년은 심장이 그렇게 크게, 빠르게, 아프게 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열세 살 소년은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너무나 많은 것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지키고 싶은 하나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소년은 아주 잠시, 무엇부터 원망해야 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총명한 소년은 알고 있었다.
원망이라는 걸 시작하면 죽어야지만 끝이 날것이라는 것을.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이용한 앙디스인들은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해적을 제 손으로 죽여야만 끝이 날 테니.
목숨이 다할 때까지 원망만 하는 삶을 살기에는 소년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날.
의식 불명인 어머니를 데리고 은밀하게 드호아망으로 건너간 소년은 정신계 치유 마법사를 만나서 어머니의 의식부터 깨웠다.
초승달이 유난히 아름답게 빛나던 그날 밤, 소년은 드디어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소년은 다짐했다.
마법으로 최고가 되기로.
그래서 제 위에 사람을 두지 않기로. 또다시 자신에게 소중한 이에게 누군가가 손을 댄다면 원망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기로.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기로.
* * *
“호엘리반이 오기 전에, 당장 꺼져.”
프시오의 말에 제인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설마, 계속 도망가라고 하는 이유가…… 호엘리반이었나?
그때였다.
문이 콰직거리면서 거칠게 일그러지더니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문 앞에 모여있던 앙디스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화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했고, 내부는 순식간에 희뿌연 연기와 함께 탄내가 진동했다.
연기가 가라앉은 틈으로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호엘리반이었다.
“나 왔는데.”
프시오의 안색이 확연히 어두워졌다.
아니, 창백해졌다.
“프시오, 보지 마.”
호엘리반이 다정하게 말했고, 프시오는 다급하게 제인을 끌어당겨서 그녀의 눈을 가려주었다.
그사이 앙디스인들이 앞다투어 으르렁거리며 그에게 다가오려 했다.
“호엘리반!”
“이 개새끼야! 앙디스인들이 지금 사탄으로 내몰려서 얼마나 죽…….”
호엘리반이 가볍게 손을 드는 순간, 가장 먼저 다가선 장정의 머리통이 날아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
손을 들었을 뿐인데 머리통이 날아가면서 팍, 터졌고 모가지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서 사방에 흩뿌려졌다.
몸통이 휘청이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히듯이 쓰러졌다.
피가 멈추지 않고 줄줄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주변이 가라앉았다. 마치, 파동을 잃은 세계처럼 조용하게.
그 틈으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프시오가 제인의 눈에서 손을 떼며 밑을 보지 마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호엘리반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호엘리반은 프시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프시오.”
“이제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거 알아.”
그랬기에 호엘리반이 오기 전에 앙디스인들을 보내려 한 것이었다.
호엘리반이 프시오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러면, 가.”
“…….”
“제발.”
“…….”
“더 돌아버리지 않게.”
프시오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동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인에게 가죠, 라고 말했다.
인질들이 눈앞에서 도망치는데도 앙디스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의 그 상황이 도무지 현실처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동의 문의 닫혔다.
제인과 프시오를 보낸 호엘리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옷에서 나는 희미한 원단 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호엘리반은 장정들을 쓱 훑어보았다.
“몸집들이 크네.”
이윽고 그가 손을 들었다.
앙디스인들은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호엘리반을 응시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돼지가 좋겠어.”
그의 말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딱.
호엘리반이 손가락을 튕겨내는 찰나, 가장 두려움에 떨고 있던 장정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돼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편하거든.”
그가 산뜻하게 웃었다.
“사람 죽이는 기분이 아니라서.”
그리고 돼지 한 마리를 고른 후, 널브러져 있던 사슬의 잔해를 이용해 팔뚝만 한 철근이 바닥에서부터 돼지의 발바닥을 뚫고 올라오도록 만들었다.
돼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흘렸으나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호엘리반은 그 돼지의 등에 의자처럼 앉았다. 돼지의 발바닥에서 피가 더 빠른 속도로 흘러나왔다.
“목청은 뺐어.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이윽고 그가 웃는 낯으로 어둠에 그늘져 있는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로님, 오랜만입니다.”
* * *
드래곤 마석 연구실로 돌아온 제인은 프시오와 함께 다친 곳이 없는지 세실에게 진료받았다.
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앙디스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페브리아 결계의 후유증만 치료했다.
“끝났으니까 둘 다 집에 가.”
세실이 장갑을 벗어 던지고 파탐을 피웠다.
이후 프시오와 세실은 잠깐 실랑이를 벌였다. 프시오는 연구실 당직을 당장 교대하자고 했고, 세실은 됐으니 내일 교대하자고 했다.
훈훈한 실랑이의 승자는 세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솜브는 어때?”
세실의 물음에 프시오는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드는지 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사흘 내내 제대로 잠을 못 잔 것은 엘마뉴엘에 갔던 프시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폭주할 가능성은 전무해. 화신의 영혼은 말끔하게 소멸했고, 공격력만 온전하게 내력으로 남아있는 상태야. 그런데 그게…… 잘 된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어.”
“일단 한시름 놔도 되겠네. 우리가 걱정했던 건 폭주 가능성이었으니까.”
“응…….”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와 복잡한 생각이 얽힐 때였다.
제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솜브가 화신이라고요?”
* * *
“장로님, 오랜만입니다.”
“…….”
호엘리반의 일상적인 인사에 쿠드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발바닥에 피 흘리는 돼지 한 마리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구석으로 파고드는 다른 돼지들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때 또 다른 구석에 있던 장정 하나가 바들바들 떨면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사…… 살려 주세요…….”
호엘리반의 시선이 쿠드칸에서 장정에게로 움직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장정의 눈동자에 일말의 희망이 비쳤다.
호엘리반이 말했다.
“난 질문의 본질에서 벗어난 대답을 싫어해. 그러니까 대답, 똑바로 해.”
장정이 처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물음에 장정은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오직 눈동자만이 조용하게, 미친 듯이 흔들렸다.
“네가, 너희가, 앙디스가 내게 희생했나?”
장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에 호엘리반이 느리게 손뼉을 쳤다.
“축하해.”
장정의 이마에 맺힌 자잘한 식은땀 사이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턱 끝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호엘리반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튕겨서 딱, 소리를 내었다.
“넌 인간으로 죽게 해줄게.”
“아아…… 악……!”
장정의 눈동자가 터지는 동시에 모든 수분이 증발하듯 순식간에 쪼그라들어갔다. 장정은 눈 깜짝할 사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뼈를 드러내며 들러붙은 채 죽어버렸다.
구석에 있던 노인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난폭해졌구나, 호엘리반.”
“정직해진 거죠.”
그사이 돼지 한 마리가 문으로 뛰어갔다.
호엘리반은 돌아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뛰어가던 돼지는 순식간에 내장부터 터지면서 폭발했다. 석탄처럼 까맣게 탄 고깃덩어리가 곳곳에 튀었다.
“이렇게 태어난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