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라트올이 아는 루는 그레데엘므와 맹약을 맺은 이후로 지금까지 오직 인간의 맹목적인 사랑을 바라며 살아온 데시안이었다.
그러다 한 여자가 나타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여자는 루의 중심이 되었다. 루의 말과 행동에 그녀가 이유가 아닌 것을 찾는 게 더 쉬웠다.
라트올은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랐으나 루의 눈에 담긴 게 사랑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이름이 제인이었다.
루가 연옥으로 간지 수일 째.
제인이 루의 거처에서 지내기 시작한 이후로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기별 없이 귀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필시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일 터였다.
라트올이 중얼거렸다.
“돌겠네.”
루는 평생 권태롭고 느긋하게 살아온 데시안이었다. 화를 잘 내는 성정도 아니었다. 그건 루의 힘을 제어하는 면모이기도 했다.
특히 분노는 그를 폭주하게 만든다.
봄이 성큼 다가오는 와중에 제인과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 아마 그의 불안과 초조는 걷잡을 수 없이 커가고 있으리라.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루를 방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루의 폭주 임계치를 건드리고 있다면 라트올은 자신이 가진 알량한 연민과 동정을 모두 쓸어 담아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퍼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부디 영면하길.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트올은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루요, 언제와요? 아니, 내가 부를 순 있죠. 있는데, 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거죠. 고작 며칠 떨어져 있다고 부르면……. 좀 그렇잖아요. 제 말 이해하죠? 그래서 루, 언제 와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제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 여자는 매일같이 라트올을 달달 볶아대다가 점심때쯤에야 겨우 그를 놓아주고 밖으로 나섰다. 루가 없는 집에 가만히 있다가는 돌아버릴 지경이라는 말과 함께.
생식하기 싫어서 식당에 가는 거 다 아는데.
아무튼 이대로라면 라트올은 루가 돌아오는 것보다 들들 볶여서 자신이 사멸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라트올은 그늘진 낯으로 다시금 중얼거렸다.
“돌겠네, 진짜…….”
데코토들이 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라트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 * *
명계에 돌아와 옥좌에 앉은 하이데스는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레데엘므에게서 온 마법 서신을 보며 안타까운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슬슬 보내 줄 때가 되었다니 아쉽구나.”
그때 지옥에서 보초를 서던 데시안 하나가 그를 불렀다.
“마왕님.”
“무슨 일인가.”
보초의 얼굴에 어두운 음영이 져 있었다.
“아무래도 지옥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옥으로 간 하이데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살육와 난교가 한데 어우러져서 잔인하고도 상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본래가 지옥이었으나,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곳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현혹의 데시안이 나른하게 웃으며 하이데스를 맞이했다.
“안녕, 하이데스.”
루는 눈과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을 가볍게 풀어냈다.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놀이의 피날레를 보여주려고 불렀는데, 마음에 드나?”
하이데스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현혹했니.”
“네 술잔에 기만이 담겨있다면 내 녹니스에는 현혹이 들어 있지. 그러니 굳이 현혹할 필요가 있나.”
루가 키들거렸다.
“이미 이 지옥도, 연옥도, 하물며 명계까지 모두 현혹으로 물든 영들 투성인데.”
하이데스가 즐겁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날 기만한 게로구나!”
“그래서 말했지 않았나? 재갈도 물리라고.”
하이데스가 웃음을 그치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뒷일이 걱정되지 않니.”
“게으름의 미학에 어긋나지.”
그것도 상당히.
루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벌써 피로감이 들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수습하려면 최소한 여기서 또 수일은 걸린다.
그마저도 임시방편이니 또다시 손을 대야 할 것이다. 게으름의 미학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일이었다.
그의 가치관과 상반되는 일이다.
하지만 가치관이 뭔가.
루는 자신의 이성도, 본능도, 본성도 모두 다 내던질 수 있었다. 이렇게 폭주의 임계치가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처럼.
그때 하이데스가 눈을 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하이데스가 펼친 손바닥 위에서 검은 공의 형체를 띤 마력이 생겨나더니 검은빛이 주변으로 마구 튀었다.
“그럼 내 친히 아량을 베풀어 줄 테니 감사하렴.”
마력은 순식간에 루를 향해 뻗어갔다.
검은빛이 루에게 닿는 순간,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지옥에 울려 퍼졌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변으로는 거대한 장막이 휘날리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멸시켰다. 그렇게 지옥에 뒤엉켜 있던 모든 죄인과 데시안, 그리고 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하이데스의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보초가 돌연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
그 보초는 명계로 달려와서 지옥의 상황을 고하던 자였다. 피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하이데스의 입에 물렸다.
하이데스가 눈알을 굴려서 그를 다시 확인했다.
“!”
루였다.
앞에 있던 건 환각이었구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루의 손이 하이데스의 상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데스는 품 안에 들어있던 별자리 열쇠를 뺏기지 않으려 애썼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하이데스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량을 베푸는 건 내 쪽인데, 어쩌지.”
이내 그의 심장에 검붉은 피가 울컥, 하고 치솟아 올랐다.
“여기까지라서.”
동시에 크르릉, 소리와 함께 지반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옥이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 * *
세실은 연구실 정원 가운데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발견하고 곧장 호엘리반에게 갔다. 이윽고 쥐고 있던 것을 책상 위로 거칠게 내려놓았다.
“데려와.”
앙디스의 문장이 그려진 종잇조각이었다.
세실이 이어서 말했다.
“제인을 인질 삼아서 프시오를 데려간 모양이니까.”
문장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호엘리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조금도 웃지 않는 눈을 하고서.
아주 오래된, 그러나 낡거나 바래지 않은, 되려 그 무엇보다 날카롭게 갈려서 현현한 빛을 발하는 살기가 그의 동공에 박혀 있었다.
* * *
오래전.
어느 작은 섬에 잔악한 마법을 부리는 해적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여자들을 겁탈하고 마을 곳곳을 약탈해갔다.
섬은 일순간 쑥대밭이 되었다.
더는 털어낼 것이 없어진 후에야 해적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그사이 가난한 처녀의 뱃속에 축복이 깃들었다.
여자는 아기의 이름을 호엘리반이라고 지었다.
그로부터 9년 후.
아홉 살이 된 호엘리반은 무척 총명했다.
총명했던 아이는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 소년은 오히려 지키는 쪽이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 하나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하나는 힘.
다른 하나는 희생.
소년은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제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호엘리반의 눈동자는 총기로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시선은 어둡고 그늘진 것에 머물렀다.
이를테면, 잔혹성.
이를테면, 탐욕이 빚어낸 공포.
이를테면, 악.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인 그릇 안에 담겨있었다.
그것은 드래곤의 피였다.
일 년에 한 번, 어린아이 한 명을 선발하여 드래곤의 피를 마시게 하는 의식은 앙디스에서 백 년 가까이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었다.
전통.
그 거룩한 단어의 시작은 결핍이었다.
태생적으로 마력을 가질 수 없는 앙디스인들에게 마법이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언제나 평범한 민족으로 치부되었다. 꿈과 환상을 좇아간 드호아망에서는 차별과 외면을 받기 일쑤였다.
가질 수 없는 것.
그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갈망을, 갈망은 욕망을, 욕망은 탐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어느 날.
탐욕으로 채워진 앙디스인들 앞에 지독하리만치 미혹적인 악마가 나타났다.
그들은 악마의 아름다움을 찬양했고, 그의 마법을 경외했다. 악마는 그들에게 마법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그 마법의 강렬한 힘에 압도되었다.
더불어 악마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특별함에 취해갔다.
그러나 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앙디스인이 찬미했던 악마는 천사에 의해 봉인될 처지에 놓였다.
천사가 말했다.
현혹의 악마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인간만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앙디스인들은 제물을 바치듯 몇몇 사람들을 포박하여 악마가 봉인된 곳으로 데려가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러나 맹목적인 사랑으로 온 이들이 아니었기에 봉인된 영역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현혹의 데시안을 구원해 줄 인간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악마의 봉인을 푸는 것을 포기한 앙디스인들은 향이 날아가고 색이 바래듯 마법을 잃어버린 평범한 민족이 되었다.
그들은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전과 같은 비범하고도 강렬한 힘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드래곤의 마력을 주입하는 것.
결국, 앙디스인들은 숭배하던 악마의 빈자리를 드래곤으로 채우고 화신으로 삼았다.
드래곤의 마력은 막강했다. 힘을 담아내는 순간 대부분 생명의 그릇이 깨지고 죽음에 이를 만큼.
많은 이들의 목숨이 탐욕의 재가 되어 땅에 묻혔다.
그럼에도 탐욕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무분별한 주입 대신 앙디스의 마법사를 발굴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드래곤의 피를 마시게 할 아이들을 가려내는 것으로 화신과 계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호엘리반이 아홉 살이 되던 해, 소년의 어머니가 쓰러졌다.
그 땅에 생명을 구하는 의사들이 있었음에도 호엘리반은 제 어머니를 데려가지 못했다. 소년은 어렸고,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과 의식을 잃은 어머니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며칠 후, 장로가 어린 호엘리반을 찾아왔다.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들 대신 전통을 계승하는 영광을 누린다면 네 어머니의 병원비를 부담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