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멀거니 서서 입을 벌리고 루를 보던 하급 데시안의 뒤로 직책 높은 상관이 다가왔다.
쉬지 말고 일하라는 다그침에 번쩍 정신을 차린 데시안이 타락한 영의 등을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채찍질했다.
그러다 상관이 걸음을 옮기고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옆에 있던 선임에게 슬쩍 다가가서 물었다.
“저기 저, 미인은 누구예요?”
“현혹의 데시안. 자꾸 쳐다보지 마라. 심신이 약한 존재들은 보기만 해도 홀리니까.”
“와…… 현혹의 데시안이 엄청난 미인이라더니 진짜네요. 그런데 저기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녹니스에 현혹된 영들은 구별하는 것 같던데.”
“구별하려면 명계에서 하면 될 거 가지고 저기서 왜 저런대요? 구경거리도 아니고.”
선임은 지옥으로 배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후임의 물음이 조금 귀찮았다. 그는 타락한 영들을 벌하는 채찍질을 쉬지 않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구경거리지. 녹니스를 제조하고 유통까지 하는 게 바로 저 현혹의 데시안거든. 관심 있어? 그럼 담당구역을 재배정해 줄 수도 있어.”
후임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걸 만든 게 데시안이라는 소문이 진짜였어?
연옥은 명계의 지옥과 천계의 천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영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명계의 데시안이 제조한 약을 사용한다는 건 천계에서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였고, 나아가서는 허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후임은 호기심이 싹 가셨다. 더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무식한 자신이 알아봤자 이해는커녕 골치만 아플 터였다.
“싫어요. 전 여기에 있을래요.”
그는 자신의 직무와는 무관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녹니스로 타락했는지 아닌지 구별하고 나면 타락한 영들의 처벌이 달라져요?”
“달라지긴 개뿔.”
선임은 코웃음을 쳤다.
“마왕님은 놀고 계시는 거야.”
“저게 노는 거라고요……?”
“그래. 기만이라는 이름으로 저 데시안을 능욕하면서.”
후임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하이데스는 루의 곁에 오만하게 앉아서 그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즐거움이 그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니.”
루가 지그시 웃었다.
“마왕님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네가 이리 고분고분하게 구니, 몹시 즐겁구나.”
“아, 그렇습니까.”
하이데스가 주변을 슬쩍 보았다.
“잠시 쉬지.”
이윽고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쓱, 그었다. 이내 루와 하이데스 주변으로 검은 막이 형성되었다. 막 안에 단둘이 있게 되자 하이데스가 한 번 더 물었다.
“그래, 그대는 어떻지?”
“따분합니다.”
뭘 두 번씩이나 묻냐는 투였다.
실로 녹니스에 현혹된 영들을 후각으로만 가려내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현혹의 여부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타락한 영은 물론,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형벌 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조금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저 의미 없는 이 일이 하이데스의 유희라는 것 외에는.
하이데스에게 루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데시안이었으니, 그의 곤혹과 수치를 관람하는 행위는 의도가 불분명한 질 나쁜 기만이었다.
“따분하다니 아쉽구나.”
하이데스가 즐거운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조금 더 치욕스러워했으면 좋으련만.”
이 상황이 그저 따분하고, 무료한 루가 조용히 생각했다.
감금되는 호사를 바라긴 했지…….
“하지만 그게 당신은 아니었는데.”
“그대, 무어라 그랬니?”
루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하이데스가 되짚어 물었으나 루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묶인 손으로 하이데스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를 흘리듯 물었다.
그조차도 바람이 나부끼는 듯한 여상한 몸짓이었다.
“여기서 얼마나 더 놀아드리면 됩니까, 마왕님.”
하이데스의 웃음기 가득한 음성이 검은 장막 안에 진득하게 퍼졌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란다. 알잖니, 내 흥은 쉽게 떨어진다는 걸.”
“그렇다면.”
루가 하이데스의 옷깃을 툭 놓아주었다.
이어서 오만한 얼굴로, 마치 아량이라도 보인다는 듯이 말했다.
“흥이 떨어지기 전에 재갈도 물리는 게 좋을 겁니다.”
하이데스의 턱이 꿈틀거렸다.
현혹의 데시안의 눈을 가리고 손목을 묶었다. 무릎을 꿇린 채 수치를 주었다. 그런데도 이 데시안에게서는 좀처럼 굴복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우롱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하이데스였다.
장난처럼 시작된 기만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가 다시 루의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러면 일을 못 하잖니.”
“일이라…….”
작게 중얼거리던 루가 묶인 손을 보이며 사뭇 엉뚱하게 대꾸했다.
“자고로 게으름의 미학이야말로 거사에 필요한 덕목이죠. 당장의 성가신 일을 하기에 급급하기보다 차후에 번거로워질 일을 만들지 않는 것.”
나른한 미소가 무엇보다 황홀하고 위협적으로 그려졌다.
“이 무료한 놀이처럼 말입니다.”
* * *
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선 채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다.
그러나 벽돌벽 틈 사이로 스며드는 찬기에 몸을 떨면서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내 사슬의 잔해가 바닥에 널브러진 가운데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프시오가 보였다. 그 밑으로는 얼굴이 피범벅인 장정들이 바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제인이 느리게 고개를 들자, 인기척을 느낀 프시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신이 드나요.”
“이게 무슨…….”
그 순간, 동공이 작게 축소된 제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프시오!”
프시오를 뒤에서 덮치려던 장정이 벽으로 날아갔다.
“컥……!”
제인의 마비 마법과 프시오의 공격 마법을 동시에 맞은 장정은 그대로 중상을 입었다.
어둠이 드리운 벽 모서리에서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길게 늘어뜨린 흰 머리와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제인은 미간을 좁히며 실눈을 했다. 그러다가 옅은 조소를 머금었다.
저 인간을 이런 데서 또 볼 줄이야.
그 사이 프시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연금술 마법으로 쇠사슬을 가루로 만들어서 제인의 손과 발을 자유롭게 풀어 주며 물었다.
“제인, 보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겁니까?”
조금 전의 마비 마법을 묻는 듯했다.
제인도 뒤늦게 당황했다.
“모, 모르겠어요.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가면서 마법이 발현된 것 같은데…… 프시오는 괜찮아요?”
제인이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으나,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예의였다.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너무나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프시오도 인사치레처럼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인은 바닥에 붙어있는 장정들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힐끗거렸다. 그러다 다시 그늘진 모서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노인의 얼굴에 파인 주름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이오, 약제사 선생. 그대가 마법을 쓸 줄은 몰랐는데.”
제인은 대답 대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인사가 나와?
쿠드칸의 인사에 놀란 건 프시오였다. 그녀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제인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입니까?”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모르는 사이면 딱 좋겠는데.”
제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앙디스 장로님을 여기서 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옴푸푸스가 종식되면서 감사 인사를 받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무심하게 옷을 툭툭 털며 마침표를 찍었다.
“은혜를 이따위로 갚을 줄은 더 몰랐고요.”
쿠드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미안하게 생각하오.”
놀고 있네.
나도 너랑 또 마주치기 싫었거든? 이라는 표정이고만.
“사과하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앞뒤 안 맞는 사과까지 받아줄 만큼 마음이 넓은 편이 아니라는 걸요.”
이어서 쿠드칸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프시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게…… 제가 드래곤을 타고 연구실 정원에 도착했을 때 결계 안으로 앙디스인들이 몰래 숨어든 듯합니다.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그랬구나. 괜찮아요.”
제인은 쓰러지기 전에 따끔했던 목덜미 부근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딱히 피부에 걸리는 건 없었다.
프시오가 제인을 보며 벽으로 날아간 자를 가리켰다.
“제인, 마비 마법을 풀어 주세요.”
제인은 귀를 의심했다.
벽에 붙어 있는 장정은 중상을 입었는데도 악의가 실려있었다.
“……진심이에요? 저 새끼 표정 안 보여요?”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게 아니라면 풀어 주세요.”
제인이 대답이 없자 프시오가 재차 말했다.
“도망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프시오의 말에 지금까지 말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앙디스인들이 이를 갈면서 아우성쳤다.
“도망칠 생각 따위 없다!”
“호엘리반을 부르려고 이 짓거릴 한 건데 도망은 무슨!”
“먼저 약속을 어긴 건 호엘리반이야!”
제인은 황당했다.
이게 정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와 함께 납치당한 프시오는 납치한 앙디스인들을 도망칠 수 있게 해주려 하고, 납치한 장본인들은 벌벌 떨면서도 도망가지 않겠다고 난리라니.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쿠드칸은 고목 나무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프시오. 제가 지금 상황 판단이 안 되는데요.”
“시간 없으니 판단하지 마세요.”
“시간이 왜 없는데요…….”
“없습니다. 지금은 제 말대로 마법을 풀어 주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닥을 기던 앙디스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꾸역꾸역 일어나서 객기를 부리려고 했다.
프시오는 다시 공격 마법으로 그들의 하복부를 공격하여 쓰러뜨렸다. 그리고 재촉하듯 제인을 돌아보았다.
“제인.”
제인은 주춤거리면서 손에 무기를 거머쥐고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공격할 태세를 갖춘 앙디스인들을 훑다가 하아, 하고 한숨 쉬었다.
“풀게요.”
제인은 벽에 부딪혀서 꼼짝 못 하던 장정에게 걸었던 마비 마법을 풀어 주었다.
그와 동시에 프시오가 손끝에 모은 마나를 앙디스인들에게 튕겼다. 그러자 모두 가볍게 문 쪽으로 날아갔다.
프시오가 그들 쪽으로 한발 다가갔다.
“꺼져.”
그녀의 말에 앙디스인들은 저마다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프시오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들의 말을 막아냈다.
“호엘리반이 오기 전에, 당장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