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21)화 (121/168)

121.

마드리안이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안경을 벗었다.

무감한 얼굴인데도 말렌은 그녀의 눈빛에서 불편한 기색을 느꼈다. 말렌은 순식간에 긴장되었다.

“말렌.”

“예.”

“흥미로운 소문이 도는 것 같더군요.”

말렌은 다소 의아했다. 그가 보기에 근래 들어 교황님께서 신경 쓸만한 소문은 딱히 없었다.

그때 마드리안이 고저 없는 투로 이어서 말했다.

“재앙.”

“……!”

소문이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대기권처럼 겹겹이 쌓여서 공기처럼, 때로는 바람처럼 불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수히 떠도는 소문 중에서도 마드리안이 노골적으로 흥미롭다고 표현하는 소문들은 손에 꼽혔다.

그녀는 그런 흥미로운 소문들을 절대로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지나고 보면 지나쳐서는 안 되는 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가 짚어낸 것은 사춘기 아이들 사이에서 음모론처럼 퍼지고 있는 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터무니가 없었다.

어둠 속 유일한 빛마저 상실되는 밤, 세상의 재앙이 시작되리라. 신에게 버림받은 곳에서부터 그림자가 사라지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말렌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맑은 날 잔잔한 바다 위에서 순조롭게 항해하는 배에서 곧 태풍이 불 것이라고 말하는 선장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입니다.”

마드리안 교황이 말렌을 지그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해하게 했나 봅니다.”

마드리안 교황의 냉랭한 어조가 재차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대의 판단이 필요하다는 오해.”

그녀의 말에 낀 것은 뾰족한 가시가 아니었다. 닿기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살얼음이었다.

스산한 한기를 느낀 말렌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드리안이 손톱으로 책상을 톡 두드렸다.

“제가 흥미로운 건 마지막 구절입니다.”

말렌은 조금 전에 헛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에서 끊어냈던 마지막 부분을 복기했다.

드래곤의 가호만이 페브리아를 구원하리라.

말렌이 가장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구절이었다.

마드리안 교황은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드래곤의 가호. 구원.”이라고 작게 읊조리다가 말렌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손톱 소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출처는요.”

마드리안 교황의 물음에 말렌은 곧바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수 분간 마나를 발현한 그는 곧 눈을 떴다.

갈색빛 도는 얼굴에 핏기가 가셔있었다. 그는 당혹스러움과 난처함, 그리고 괴로움을 여과 없이 드러내다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묘연합니다.”

손톱 소리가 멈췄다.

그러자 집무실이 냉랭한 고요로 가득했다.

말렌은 혀를 깨물어서 죽고 싶었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마드리안이 부드러운 어조로 고요함을 무너뜨렸다.

“당신이 가진 능력이 소문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상기하세요.”

“……예.”

그녀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목소리와 상반될 정도로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소문의 출처를 찾으세요, 말렌.”

* * *

세실과 식사한 제인은 프시오가 오면 인사하고 가겠다며 그녀를 따라 드래곤 마석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세실이 문득 물었다.

“호엘리반에게 안 가봐도 되니?”

제인은 앙디스 독립을 추진하기 위해 호엘리반과 함께 페브리아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호엘리반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그 재수……가 아니라, 호엘리반은 프시오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제 머리에 월계수 화환도 얹어주고 황금 카펫까지 깔아 줄걸요.”

세실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내가 미안하다.”

“일단 받아둘게요.”

제인은 사실 인사나 하고 가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프시오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호엘리반과 함께 페브리아의 정보를 모으고 상황을 살피는 내내 프시오를 언제 진료 볼 건지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제인은 황당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사자인 프시오가 엘마뉴엘에 가 있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는 걸 호엘리반도 알고 제인도 알고 날아가는 새들도 알았다.

그럼에도 호엘리반은 눈으로, 공기로, 비언어적인 모든 걸 동원해서 제인에게 무언의 압박을 피력했다.

여간 숨이 막히는 게 아니었다.

제인은 조금만 더 있으면 호엘리반의 멱살을 잡고 진짜 적당히 해라, 이 새끼야, 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호엘리반 인성이요, 사실 개차반이죠?”

“어.”

제인은 탄식했다.

어쩐지.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더라니.

“제가 프시오의 저주를 못 풀면 절 저주할지도 몰라요.”

“뭐, 그러고도 남을 새끼지.”

“…….”

“걱정하지 마라. 루 때문이라도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러고 싶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그럼 어쩔 수 없고.”

제인이 망연자실하는 사이 두 사람은 연구실 앞에 다다랐다.

드호아망 마탑에서도 깊숙하게 위치한 연구실은 고난도 결계가 걸려 있어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제인은 결계를 푼 세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무척 조용했다.

“페브리아 상황은 어떠니.”

“예상대로예요. 교황청에서 신의 눈물이라는 성수라는 걸 뿌렸고, 사람들의 병세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요.”

그러다 작게 키득거렸다.

“소문은 그것보다 더 빨리 퍼지고 있고요.”

제인은 프시오의 계획에 반드시 소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소문의 첫 단추는 드래곤의 가호였다.

문제는 페브리아는 샤의 종교색이 워낙 짙은 제국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소문을 퍼트리는 과정에서 죄없는 자들이 반역으로 내몰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장난 같은 음모론이라면 어떨까.

묘하게 거슬리는 소문이라도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면 예민하게 반응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마드리안은 독재자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페브리아 국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매우 자비로운 교황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연유였다.

예상대로 음모론은 급속도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에 비해서 아직 교황청의 제재는 없었다.

“조만간이겠구나.”

세실의 말에 제인은 웃음기가 잔뜩 베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제 슬슬 반응이 올 거예요. 밀리타가 알려준 정보대로 말렌 추기경이 소문을 듣고 출처까지 밝히는 마법을 가진 게 맞다면 말이에요.”

세실은 제인의 웃는 얼굴을 힐끗 보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네.”

“그 추기경의 얼빠진 표정은 상상만 해도 웃기거든요.”

제인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보이며 달랑달랑 흔들었다. 세실은 그게 호엘리반이 준 마법 구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문 앞에선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걸로 웃음이 난다니 부럽네. 누구는 이 문을 열면 또 일에 치여야 하는데.”

“…….”

“안식년인데.”

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연구실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십시오, 스승님.”

잠시 후.

제인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빈 연구실에서 프시오를 기다렸다. 정원 쪽의 벽면이 통유리로 된 독특한 구조의 연구실이었다.

제인은 또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개 구름이 넓게 펼쳐진 하늘에 철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갔다.

프시오를 태운 엘마뉴엘의 드래곤이 정원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드래곤의 등에 타고 있던 프시오가 가볍게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인사하듯 드래곤의 콧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눈을 감고 그녀의 손길을 받던 드래곤이 곧 날개를 펼쳐서 엘마뉴엘로 돌아갔다.

그 사이 제인이 반가운 얼굴로 건물에서 나와 프시오에게로 달려 나왔다.

“프시오!”

프시오가 눈을 크게 떴다.

“제인, 여긴 어쩐 일로 왔습니까?”

호엘리반이 지랄맞게 굴어서요! 라고 말할 뻔한 제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최대한 정상적인 인사를 했다.

“오늘 엘마뉴엘에서 돌아온다고 하길래 얼굴 보려고 왔어요.”

“호엘리반이 등 떠밀던가요?”

“네, 아주 지랄을, 지랄을!”

제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앙다물었다.

“……이게 입으로 나왔네. 혹시 들었어요?”

“네.”

프시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제인은 싸한 기류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다. 하지만 제인의 목덜미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 빨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동시에 프시오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제인!”

제인은 목덜미를 만지며 휘청거렸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프시오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정원의 결계를 더 강화해야겠군요.”

아니, 늘어지게 들렸다.

여전히 제인의 시야는 까마득했고, 눈꺼풀은 천천히 닫혀 갔다.

제인은 눈을 감으면서 무언가 확실하게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 * *

루의 예상대로였다.

명계에 오자 두통보다 더 짙은 취기가 다시 올라왔다.

앞에 놓인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지독한 기만이다.

루의 상태를 짐작하는 듯, 접견실에 마주 앉아있는 하이데스가 실없이 웃었다.

루는 저항할 수 없는 졸음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기만에 공을 들이셨습니다.”

“아무렴, 그대인걸.”

* * *

데시안들은 지옥에 떨어진 타락한 영들을 고문하면서도 광장 중앙을 힐끔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명계의 혼돈이자 마왕인 하이데스보다 현혹의 데시안인 루에게 더욱 집중되었다.

그의 행색과 행동 때문이었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손과 발이 묶인 현혹의 데시안은 지금까지 마왕의 총애 아래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고결하고도 고고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연옥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타락한 영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들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마치 개처럼.

그러나 그 모습조차 고혹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에 흐르는 윤기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이 났고, 기품있게 떨어지는 옆 모습은 조각상보다 더 균형 잡혀 있었다.

콧대에서 입술, 그리고 입술 아래에서 턱선까지는 아름다운 선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함인 듯했다.

가려진 눈과 묶인 손발이 무색할 만큼 고개를 숙일 땐 은하수가 흐드러졌고,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특히, 미소.

보는 이로 하여금 수치와 치욕마저 상실시키는 미혹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