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세실은 제인이 로안나를 깨웠을 뿐만 아니라 묘약의 저주까지 풀었다는 소식을 일찌감치 전해 들었다. 하지만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나흘……. 그래.”
그녀는 퀭한 얼굴을 두 손으로 벅벅 쓸었다.
“그 나흘 동안 거의 못 잤어. 내 소중한 안식년을 망치고 있는 게 너뿐만이 아니라서 울화통이 터져 죽겠으니까 웬만하면 신경 긁지 마라.”
세실의 안식년을 엉망으로 만드는 주요 인물은 총 세 명이었다.
프시오, 제인, 그리고…… 펠드툰.
펠드툰이 화신의 정신을 흔적도 없이 파괴해버린 덕분에 프시오는 엘마뉴엘에 남아서 며칠간 솜브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드래곤 마석을 주입한 임상 실험자들의 부작용 경과를 확인하는 일은 온전히 세실의 몫이 되었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연구였다.
갑자기 마탑의 다른 연구자를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네르기니에서 일하는 것과 진배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안식년을 가졌다는 말인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열불이 났다. 그럼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프시오의 역할을 대행한 이유는 하나였다.
호엘리반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족쇄를 스스로 풀 수 있다면.
그렇게 세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를 위해 나흘 밤을 지새우며 일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짓거리를 해야 할까.
세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바쁘시다는 건 호엘리반에게 대충 들었어요.”
제인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참, 알고 있죠? 밀리타는 페브리아에서 염탐 중이에요.”
세실이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그 아이, 페브리아에서 생존 여부가 알려지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데.”
“기척 하나는 더럽게 잘 숨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결계의 발원지는 확인했고?”
“네. 호엘리반의 정보랑 밀리타의 예상이 일치했어요. 지금은 그 장소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간과 동선을 파악하고 있어요.”
뒤이어 제인이 세실을 슬쩍 보며 물었다.
“프시오는 오늘 돌아오는 것 같던데요.”
“……어.”
세실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나흘 만에 제인과 식사하러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프시오가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제인이 메뉴판을 가리켰다.
“메뉴는 골랐어요?”
“감바스.”
종업원을 부른 제인은 감바스와 늘 먹던 걸로 달라고 말했다. 주문받은 종업원이 사라지자 세실이 제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여기 단골이니?”
제인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됐어요.”
루가 집을 비운 지 며칠째.
제인은 수도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집안의 시계를 망가뜨리려 했고, 라트올을 들들 볶아서 루가 언제 오는지 채근했다.
그리고 부엌에서 요리라는 걸 하려다 집을 태워 먹을 뻔한 제인은 라트올에게 오만가지 욕을 먹었다.
제인은 하는 수 없이 생식에 가까운 라트올의 채식주의 식단을 먹다가 진절머리를 내며 루의 단골 식당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중이었다.
잠시 후 테이블에는 감바스를 비롯한 양송이수프와 빵, 연어구이,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렌즈콩 볶음이 차례대로 나왔다.
세실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늘 먹던 대로니?”
“네.”
제인은 렌즈콩 볶음을 떠먹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세실에게 물었다.
“알려주신 마법이요, 그거 평범한 수면 마법 아니죠?”
“수술용 마취 마법이다.”
“……어쩐지.”
세실은 감바스를 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딱 봐도 어디 가서 사고 칠 것 같은 얼굴로 묻길래 알려준 거다. 이왕이면 아무한테도 걸리지 말라고.”
“보통은 그럴 때 말리지 않아요?”
“보통은 말리면 듣지. 너는 듣니?”
“……나중에 그 마법 푸는 법도 알려주세요. 깨우려다가 실수로 남의 허벅지를 찔렀어요.”
세실이 차분하게 물었다.
“칼 꽂았니.”
“의도치 않게……?”
“누구를.”
“……로안나 씨한테 묘약의 저주가 걸렸다는 걸 알렸던 남자요.”
세실은 짧게 물었다.
“또.”
“…….”
제인은 차분한 세실이 좀 무서웠다.
차라리 상스러운 욕을 하는 게 훨씬 덜 무서울 것 같았으나 침묵에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었다.
“또 뭐 했니.”
제인이 얕게 한숨을 쉬며 고해성사를 이어갔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마음의 문을 서너 개쯤 부쉈고, 로안나 씨를 생각할 때마다 맹독의 고통이 느껴지게 했어요. 그리고 깨우려다가 허벅지에…….”
“그자는 칼을 맞고 깬 거니?”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세실이 다시 물었다.
“로안나 씨 기억을 잘라내지 않은 이유는 뭐지? 아예 누군지 모르게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제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창밖의 하늘을 보다가 천천히 세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의식 영역에서 로안나 씨에 대한 기억의 끈을 말끔하게 잘라내는 게 불가능했어요.”
“불가능했다?”
“집착이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거든요. 차라리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럽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거예요.”
“…….”
제인은 그 짓거리를 후회하지 않았다.
소스키엘의 내면에 있던 집착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했다. 그대로 뒀으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로안나와 엔니오를 죽이고도 남았을 만큼.
“만약 기억의 끈을 말끔하게 잘라내는 게 가능했다면.”
세실이 제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잘라내는 걸로 끝냈을 거니?”
제인이 멈칫거렸다.
로안나와 엔니오가 그자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소스키엘에게 적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러니 첫 고객이 꼭 그일 필요는 없었다.
단지 제인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고, 마침 적합한 인물이 그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확실하게 확인했다.
그래서 네, 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세실이 질문을 바꿨다.
“부쉈던 문은?”
“……자력으로 회복이 가능한 정도로만 부쉈어요.”
내팽개치고 왔다는 뜻이었다.
“열심히 가르쳤더니 아주 개같이 굴다 왔구나.”
“…….”
“제인.”
제인은 저도 모르게 식기를 내려놓고 똑바로 앉았다.
얼마나 욕을 먹을까.
식당인데 적당히 패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제인의 생각과는 달리 세실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죄인이든 악인이든 누구든 함부로 벌해서도, 실험하거나 시험해서도 안 돼.”
“…….”
“한 번만 더 그러면.”
“대가리 박살 낼 거라고요?”
“……그래.”
제인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은 그런 제인을 잠시 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수술용 마취 마법은 기본적으로 24시간 동안은 칼을 맞아도 깨지 않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자극에 깨어났다는 건 마법의 정밀도가 떨어진다는 소리지.”
“아…….”
세실은 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어 제인에게 주었다. 쪽지에는 서적 목록이 적혀져 있었다.
“네게 도움 될 만한 전문 서적들이다. 모두 드호아망 도서관에 가면 있을 테니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거야.”
세실의 손가락이 끄트머리에 적힌 서적 제목을 가리켰다.
“특히 이 서적 344장에 보면 자세하게 나와 있어. 어느 부분에서 정밀도가 떨어졌는지 확인하고 연습해라. 마법을 푸는 방법도 설명되어 있으니 꼼꼼하게 읽어보고.”
“……네.”
“진료 볼 때는 일반 수면 마법보다 수술용 수면 마취 마법을 쓰는 게 나아.”
제인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 쪽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품에 넣었다.
예전에 하임도 이렇게 알려 줬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울컥했다.
안 그래도 루가 돌아오지 않아서 틈만 나면 울적했던 제인이었다. 올라오는 감정들을 누르려 입이 터지도록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 * *
루가 의식을 되찾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를 거꾸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레데엘므의 얼굴이었다.
루가 웃었다.
“지옥이군.”
“애송아, 그거 내 얼굴 보고 하는 소리야?”
루는 그레데엘므의 얼굴을 가뿐하게 밀치면서 크리스털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레데엘므는 루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방글거렸다.
“나한테 빚졌어, 너.”
“나인 거 확실해요?”
루가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누가 칼 들고 쫓아오던데, 찔렀으면 그대로 타죽었을 게 뻔하지 않나.”
“애송아, 넌 그게 문제야.”
그레데엘므가 벌떡 일어나서 쫑알거렸다.
“어른이 말씀하면 말이야, 적당히 장단도 맞추고 그래야지, 어떻게 매번 그렇게! 그리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말 높이라고.”
루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지옥이 따로 없군.
그는 크리스털 벽에 기대어 아득한 천장을 보다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러다 입구 쪽에 다다랐을 때쯤, 루는 극심한 두통에 벽을 짚으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데엘므가 물었다.
“기만이 담긴 걸 알고 마신 거지?”
“……모르고 마셨을까요.”
“이대로 가면, 너 엄청 우스운 꼴 당할 거야.”
두통이 멎었는지 루가 즐거운 웃음을 띠었다.
“그거 안 됐네.”
이어서 그레데엘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 구르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바빠.”
“하시는 일도 없으면서 바쁘긴.”
그레데엘므가 얇은 책 한 권을 들어 보였다.
“없긴 왜 없어? 초대장 만들어야지.”
루의 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라앉았으나 그레데엘므는 개의치 않았다.
“알면서 뭘 그래, 애송아. 잊었어?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건 데시안의 계약이 아니라 르젤의 맹약이야.”
루도 모르지 않았다.
둘 사이에 맺은 맹약을 그레데엘므가 전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루가 봉인되는 곳에 이르는 길이 인간에게 열리므로.
“아쉽군.”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
“말고.”
그가 가라앉았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구경 온다고 했으면 더 열심히 굴러볼 생각이었는데.”
그레데엘므가 진심으로 말했다.
“……어휴, 징그러워. 가.”
* * *
순조롭다.
말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할렌에서부터 수도까지 차근차근 퍼트린 카사시아의 발병률이 절정에 치달았을 무렵, 마드리안은 해독제를 신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성수를 온 나라에 뿌렸다.
거짓말처럼 병이 낫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져 갔다. 그만큼 훨씬 두터워진 결계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임이 제조해서 퍼트린 카사시아와 해독제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니 당연히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거슬리는 듯, 묘한 표정을 짓는 마드리안의 낯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