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소스키엘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인이 이어서 머쓱하게 말했다.
“그게…… 어쩌다가 들었는데 좋더라고. 나는 음악도, 그림도 잘 모르지만.”
“입 다물어.”
소스키엘이 쉰 소리를 내었다.
“……네가 뭘 안다고.”
제인은 소스키엘을 지그시 보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긴.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거, 진짜 재수 없지.”
제인은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리고 찢어진 망토를 툭툭 털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데 난 재수 없는 인간 맞거든.”
“…….”
“당신 하프 연주, 좋았어. 정말로.”
이윽고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소스키엘은 욕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귓가에는 제인의 말이 남아서 자꾸만 신경을 긁어댔다.
하프?
그딴 건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소스키엘에게 음악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께 유일하게 인정받은 게 음악이었고, 마음을 빼앗은 여자가 가장 밝게 웃어주던 것 역시 하프 연주였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이었다.
“…….”
하지만 그의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달라붙었다.
-하프 소리 좋던데.
-그게…… 어쩌다가 들었는데 좋더라고.
-당신 하프 연주, 좋았어. 정말로.
소스키엘은 손을 힘껏 말아쥐었다. 정신 나간 여자에게 침이라도 뱉어야 했다. 뭐라도 집어 던졌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당신이 좋아했던 그 하프만 다시 잡아도 훨씬 근사한 문이 될걸.
“…….”
그녀가 나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을 때 소스키엘은 인정해야 했다.
사실은 음악이, 연주가, 하프가 한때 자신의 전부였노라고.
그런데 큰 의미가 없다니.
오래가지 못할 거짓말이었다.
하프…….
만지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높디높은 천장 끄트머리 창문을 올려다보자 동이 트는 듯 어둑한 가운데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언제나 그랬듯,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창살 안에서 처음으로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갈구하고 그녀의 남자를 원망하는 대신 다른 것을 떠올렸다.
오래된 현의 감각이었다.
* * *
솔레리안은 딸기타르트를 먹고 있었다.
“잘 먹네. 홍차도 줄까?”
“……아, 아뇨.”
그녀의 거절에 방글거리던 그레데엘므가 살짝 실망한 듯 어깨를 떨어뜨렸다.
솔레리안이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주십시오.”
그레데엘므가 신나서 홍차를 따라 주었다.
솔레리안은 아직도 모든 게 꿈 같았다.
어언 백 년 만에 마주한 그레데엘므는 소문대로 외형만 같을 뿐, 예전과는 너무나 판이한 모습이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묻기가 두려웠다.
기억 못하시면 어떡하지…….
“오랜만이네, 솔레리안.”
“네……. 네?”
솔레리안은 그대로 홍차가 든 잔을 놓칠 뻔했다. 이내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틀어막았다.
날 기억해주고 계시다니.
그녀는 그 사실에 무척이나 감복했다. 하지만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레데엘므가 쓰러진 루를 가리켰다.
“하이데스가 준 기만을 마셨어. 아마 한동안 못 일어날 거야. 해코지하지 마.”
“하지만……!”
“너는 애송이 못 죽여.”
“…….”
“그리고 죽이면 안 돼.”
자신이 루를 못 죽인다는 건 솔레리안도 알고 있었다. 현혹의 데시안은 자신의 칼에 찔려서 죽을 정도로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심장의 내핵에 칼을 꽂는다면 오히려 자신이 타 죽을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솔레리안은 그를 찌를 생각이었다.
그레데엘므의 별빛을 담아내는 것보다 그에게 작은 상처라도 입히고 타죽는 게 나았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왜…… 죽이면 안 됩니까.”
“나를 따르던 착한 아이가 타 죽는 게 좋겠어? 그리고.”
딸기타르트를 먹던 그레데엘므가 웃었다.
“약속했거든.”
그리고 입가에 묻은 크림을 먹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나를 밤하늘의 별로 만들어 주기로!”
솔레리안은 눈앞이 캄캄했다. 나가떨어진 심장이 바닥을 구르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서 구르는 심장을 더듬더듬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겨우 트인 숨통을 열고 말했다.
“그레데엘므 님…….”
거기까지였다.
목이 조여드는 탓에 말을 잇기가 고통스러웠다.
“애송이는 내가 온전한 르젤이었을 때 했던 마지막 맹약이야. 그 마지막 맹약으로 별이 될 수 있다잖아. 너무 설레…….”
“…….”
“그러니까 솔레리안, 해코지하지 마.”
그녀는 그레데엘므가 르젤로서 천계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나 태초의 신만을 바라보았던 그레데엘므였다.
신이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부터 천계든 명계든, 연옥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똑같았으리라.
하지만 솔레리안 역시 르젤이었다.
천계에 그의 생과 사를 추적할 수 있는 모래시계를 만든 징그러운 종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레데엘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줄곧 이어지던 침묵을 먼저 끊어낸 건 그레데엘므였다.
“신께서는…….”
하지만 금세 입술을 닫았다.
솔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얼마나 귀찮으셨을까.”
“…….”
“당신의 등만 바라보는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답답해 보이셨을까.”
솔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세상의 만물과 그 끝인 영원을 알려주시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그래, 영원…….”
그레데엘므가 웃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솔레리안,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솔레리안의 억장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그 영원 속에 갇혀있어.”
솔레리안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레데엘므를 바라보았다.
그레데엘므 또한 솔레리안을 고요하게 보다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옛날, 천계에 있었을 때 항상 짓던 미소였다. 솔레리안은 그 웃음이 가짜라는 걸 원치 않게 확인해버린 기분이었다.
그레데엘므가 유순한 목소리를 내었다.
“인간들의 죄악에서 태어난 데시안은 신이 의도한 게 아니었어. 그야말로 세상의 균열이었고 혼돈이었던 거야. 데시안을 없애려면 인간을 없애야 했어.”
솔레리안은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레데엘므 님. 우리 르젤도 인간의 축복에서 태어난 존재란 걸 잊으셨나요.
그러나 그레데엘므는 반복해서 말했다.
“없애야 했어.”
“…….”
“없애지 않았어.”
“…….”
“없애지 않고 사랑했어. 앞으로도 사랑하겠지. 영원히.”
“…….”
“그런 신을 증오했는데…….”
그레데엘므가 고요하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된 거야.”
솔레리안은 비로소 영원 속에 갇혀있다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아…….
그레데엘므 님이 인간을 사랑하셨구나.
영원을 알지만, 영원히 살지 못하는 그 존재를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홀로 남겨진 억겁의 시간이 지나 소멸에 다다를 때를…… 그토록 염원하시는구나.
지옥 같은 시간을 홀로 견뎌내고 계셨구나.
* * *
엘마뉴엘의 동산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그런데 동그란 동산 위로 무언가가 활개 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프시오와 세실은 때마침 지나가던 펠드툰을 불렀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당장 설명해 보세요, 라는 얼굴로.
“아버지……?”
“아저씨……?”
커피를 마시던 펠드툰은 프시오와 세실의 시선을 따라서 동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벽을 짚으며 사례에 걸린 척 어색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쿠울럭! 쿠울럭!”
세실이 프시오에게 귓속말했다.
“……속지 마, 가짜 기침이야.”
“……알아.”
프시오와 세실은 다시 동산 위로 시선을 옮겼다.
화신이었다.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아무리 다시 봐도 앙디스를 초토화했던 드래곤의 화신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작고 귀여웠던 솜브가 돌연 거대한 화신으로 변한 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황당했으나 그녀들의 말문을 더욱 막히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아저씨 지금 저게…….”
프시오가 말을 잇지 못하자 세실이 대신했다.
“화신이 맞긴 맞아요, 아버지?”
“…….”
앙디스인들이 깨운 드래곤의 화신은 깨어나자마자 재앙을 일으키듯 불을 뿜으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야말로 화신의 분노였다.
하지만 지금, 동산 위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화신은 껍데기만 화신이었다. 하는 짓만 보면 영락없는…….
“꺄하하!”
철부지 솜브였다.
다만 목소리가 동굴처럼 깊은, 엄청나게 커다란, 솜브와는 다른 솜브…….
그렇게 껍데기만 화신인 솜브가 드래곤 마스터들과 함께 웃으며 놀고 있었다.
펠드툰은 더는 숨길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산만 한 덩치가 아까울 만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화신이 깨어났단다…….”
“깨어났단다? 저게 그냥 깨어난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세실의 말에 펠드툰이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프시오는 잠깐 현기증이 나는지 이마를 짚고 휘청거렸다.
그녀를 잡은 세실이 귓속말했다.
“확 쓰러졌어야지.”
“……이건 진짜거든?”
프시오가 세실을 살짝 밀면서 물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펠드툰은 한숨을 깊게 쉬고는 숙소 앞 야외용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전에 네게 솜브를 두고 가라고 했던 이유는 솜브의 몸에 봉인해둔 화신이 깨어날 조짐이 보여서였다.”
“…….”
“수면시간이 길어졌다는 건, 사실…… 그만큼 솜브의 몸에 한계가 왔다는 뜻이었어.”
“아버지!”
“아저씨!”
프시오와 세실이 동시에 소리쳤다. 자칫하면 펠드툰은 물론, 드래곤 마스터들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도 있었다.
프시오가 그렇게 말하자 펠드툰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흉포한 화신이 깨어난 후 어떻게든 길들여 보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펠드툰은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파괴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프시오와 세실이 동시에 다시 쩍 굳어버렸다.
“네……?”
“……아버지, 뭐라고요?”
펠드툰은 먼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다시 말했다.
“화신의 자아를 파괴했다…….”
* * *
며칠 후.
드호아망의 어느 식당 안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던 제인은 식당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말갛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살아계셨네?”
자리에 앉으려던 세실은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을 들고 제인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매를 벌지?”
탁!
제인은 정수리에 꽂히기 직전의 메뉴판을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그리고 공손하게 세실 쪽으로 밀어 넣어주며 말했다.
“식사하자고 했는데 나흘 만에 답장 주신 분이 누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