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솔레리안은 진지하게 의문을 가졌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아, 미쳤나 보다.
그녀는 자신이 미쳤다고 확신했다. 확신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고는 눈앞에 그려진 일련의 상황들이 이해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레데엘므 님이 왜…….
골백번을 죽여도 모자랄 저 마귀를, 어째서…….
솔레리안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루가 연옥을 빠져나갈 무렵, 솔레리안은 몸이 불편해 보이는 그를 따라갔다. 한 손에 칼을 쥐고서.
휘청이는 순간을 노리자.
심장의 내핵을 한 번에 찔러버리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루가 벽을 짚고 휘청거리면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칼을 꽉 잡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려던 그녀는 거짓말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어디선가 휙 튀어나온 그레데엘므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벌어지는 일들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쪼그려 앉아서 한숨을 폭폭 쉬던 그레데엘므가 가볍게 루를 업고 일어섰다.
솔레리안은 멀어지는 그레데엘므를 멍하게 보다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몰래 따라갔다.
걷고 또 걷자 크리스털로 가득한 동굴이 나왔다. 그레데엘므는 업고 온 루를 구석에 툭 내려놓았다.
그레데엘므는 루가 쓰러진 곳에서 멀지 않은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솔레리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어떻게서든 이해해보고자 애썼다.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렇겠지.
일단은 함부로 나서지 말자.
거의 온종일 잠을 잔 그레데엘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병 하나를 들어서 냄새를 맡더니 무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꼬마가 열심히 풀고 다니네.”
솔레리안은 그레데엘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건 그의 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레데엘므는 그대로 루를 스쳐 지나갔다.
있는 둥 없는 둥.
그리고…… 딸기타르트를 만들었다.
아주 즐겁게.
솔레리안은 자신이 미쳤다고 확신하다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려고 애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눈앞의 상황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레데엘므 님이 좋아하셨으면 됐지.
그러면 된 거야. 세상에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잠시 흩어졌던 시선을 그레데엘므 쪽으로 두려 했다. 하지만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었던 그레데엘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그녀 뒤에서 애살스러운 물음이 들려왔다.
“딸기타르트 좋아해?”
* * *
제인은 소스키엘의 내면중 가장 엉망진창인 마음의 문을 찾아서 억지로 열었다. 사실 열었다는 표현보다는 박살을 내고 들어간 것에 가까웠다.
문 안에는 아버지로부터 억압과 눈치를 받으며 살아온 가여운 사내가 있었다.
제인은 무감한 표정으로 둘러보다가 여기가 아니네, 하고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프 소리가 들렸다.
제인은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문을 나섰다.
몇 개의 문을 더 부수고 망가뜨리면서 안쪽을 확인했다.
그러다 기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찾았다.”
문 안에는 광적인 집착이 깨어진 유리 조각의 형상으로 너절하게 깔려 있었다. 제인은 망설임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소스키엘의 더 깊은 무의식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그 시각.
호엘리반은 피곤이 역력한 기색으로 나벨에게 서류 한 장을 주었다.
“그대로 페브리아에 퍼트려줘.”
“네.”
“순회 일정은?”
나벨은 준비해둔 서류를 호엘리반에게 건넸다.
“세 국가와는 일정을 조율했습니다. 나머지도 빠르게 방문하실 수 있도록 진행하겠습니다.”
“앙디스 쪽 회신은.”
나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호엘리반이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아직이라…….
그렇게 엉덩이에 불난 개새끼들처럼 굴던 놈들이 묵묵부답인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뒤에서 뭘 하려는 속셈인가 본데.”
호엘리반이 산뜻하게 말했다.
“하게 둬봐.”
* * *
소스키엘의 내면에서 나온 제인은 창살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세실에게 배운 수면 마법은 아주 잘 통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푸는 걸 안 배웠어…….”
아니, ‘수면’ 마법이잖아. 그냥 깨우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스승님?
수면 마법에 걸린 소스키엘은 몇 번을 불러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절하듯이 잠든 건 소스키엘뿐만이 아니라 감옥 바깥에 있던 보초병들도 마찬가지였다.
“…….”
그냥 깨우면 되는 게 아니었나 보다.
제인은 될 대로 되라는 듯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지하 벽에서 울려오는 메아리가 전부였다.
“빌어먹을.”
얼굴을 쓸어내리던 제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날이 무뎌진 검이었다.
좋은데?
그녀는 이만하면 되겠다 싶었는지 입고 있던 망토 끝단을 찢어서 끈처럼 만들고 단검에 꽉 묶었다. 그리고 뭉툭한 칼날 부분도 둘둘 감았다. 이내 벽 쪽으로 던져 보더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으면 일어나겠지.”
제인은 소스키엘의 하체 부근에 단검을 던졌다가 당기길 반복했다.
그러다 칼날 부분을 말았던 망토가 풀어지면서 그의 허벅지에 꽂혀 버렸다. 소스키엘이 고통스러워하며 잠에서 깼다.
“아악……!”
제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잡고 있던 끈을 훅 잡아당겼다.
이내 무딘 칼이 그의 허벅지에서 뽑히면서 피가 솟구쳐올랐다.
“아아악!”
“아…… 찌를 생각은 없었는데…….”
제인은 칼날을 대충 말았던 게 조금 후회되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소스키엘은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검은 꽂힐 때보다 뽑힐 때가 훨씬 더 아파서 고함을 쳐댔다.
찌를 생각이 없었다면 무작정 뽑지도 말았어야지!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불현듯 이렇게 소리를 질러서 여자를 자극하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조용히 입을 다문 사이,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제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깥을 살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쿨쿨 잠든 보초병들이 보였다.
“정말 뭐지? 이건 그냥 수면 마법을 가르쳐 준 게 아닌 것 같은데.”
제인은 다시 문을 닫고 소스키엘에게 다가갔다. 이어서 망토 끝단을 더 찢어서 던져 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허벅지 압박해서 묶어.”
소스키엘이 진심으로 물었다.
“너, 미친년이야……?”
“미친 건 당신 아니야? 보초병들이 당신보고 정신 나갔다고 쑥덕거리던데.”
“…….”
제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묶어.”
아까부터 허벅지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던 소스키엘은 이를 꽉 물며 제인이 던진 망토 끝단으로 허벅지를 묶었다.
단단하게 압박한 허벅지에 매듭을 짓자 기절할 것 같은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창백하던 얼굴은 이제 푸른 빛이 감돌 정도로 새파랬다. 힘이 쭉 빠진 소스키엘이 몸을 웅크린 채 신음을 뱉으며 쌕쌕거릴 때였다.
제인이 물었다.
“됐어?”
소스키엘은 흐릿해진 시야로 제인을 응시했다.
모자에 가려진 얼굴 아래, 미소 짓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로안나.”
그 순간.
소스키엘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면서 사지를 벌벌 떨었다. 이윽고 속에서 올라오는 구토를 두 차례나 연이어 게워냈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감각의 생경한 통증을 느꼈다.
“아아……! 아아악……!”
소스키엘의 얼굴은 공포로 얼룩졌다.
쪼그려 앉아있던 제인이 그를 보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와, 이게 되는구나.”
“……아아악!”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던 그는 토사물이 퍼진 바닥에 뒹굴면서 침을 줄줄 흘렸다.
“아프지? 그 고통, 나도 알아.”
제인이 소스키엘의 머릿속에 심어놓고 나온 건 그녀가 자학할 때 썼던 독초 중에서도 가장 통증이 심한 맹독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느끼는 건 실제 고통이 아니라 정신 착란이야. 정신을 약간 건드렸거든.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을 거란 것만 알아둬.”
“우으으……. 으아아아아…….”
“아프기 싫어?”
제인이 피 묻은 단검을 잡고 가볍게 창살을 내리쳤다.
캉…….
금속이 맞부딪치며 맑은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럼 그녀를 생각하지 마. 그러면 돼. 그녀를 생각할 때만 통증이 발현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당신 인생에 이제 그녀는 없어.”
캉…….
제인이 단검을 반복적으로 창살에 치는 동안 소스키엘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계속되는 고통을 끊어내고자 필사적으로 ‘그녀’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예를 들어 허벅지의 고통이라던가, 창살의 개수, 천장 무늬, 그리고 금속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들.
그러자 제인의 말대로 전과 같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스키엘은 초점을 잃은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것 봐. 생각 안 하니까 안 아프지?”
소스키엘이 중얼거리듯 욕을 씹었다.
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했다.
“마음의 문을 서너 개 정도 부쉈어. 한 번에 찾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거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소스키엘은 제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그게 어딜 봐서 미안한 얼굴인데?
그는 제인에게 침을 뱉고 싶었다.
하지만 고통의 잔상으로 인해 손과 발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그 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당신 말이야.”
제인이 겸연쩍게 운을 띄운 것은 그때였다.
“하프 소리 좋던데.”
“뭐……?”
“당신 문에서 연주하는 거…… 들었거든. 당신 하프 연주, 진짜 좋던데.”
소스키엘은 멋대로 저를 찾아와 기절시키고, 허벅지를 찌르고, 문을 부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모자라서 갑자기 하프 연주가 좋다고 하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얘도 제정신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