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로안나가 혼자 있고 싶은 듯이 물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예요?”
“로안나 씨요?”
“…….”
“엔니오 씨가 기다려요.”
로안나는 대답이 없었다.
문에 기대어 앉아있던 제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루를 사랑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제인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강에 몸을 던졌던 날, 엔니오 씨는 참 많이 울었다고. 다 큰 남자가 아이처럼 엉엉……. 네르기니에 당신을 보러 갈 때마다 그의 눈가는 항상 빨갰었다고. 그렇게 많이 슬퍼했다고.
이내 문 너머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제인은 조용히 두 사람을 처음 본 그 순간을 떠올렸다.
성당 쪽으로 걸어가던 금발의 남녀에게서 흘러넘치던 행복과 기쁨이 영영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을.
“기억해요, 로안나 씨? 그때 제가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었잖아요. 살면서 사랑을 받은 적도, 주었던 적도 없어서 그랬어요.”
두 사람의 언약식 날, 제인은 그 짧은 순간에 사랑이 무엇인지 처음 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제인에게는 아득한 것이어서 그것만으로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웠다.
제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엔니오 씨가 슬퍼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슬픔이 마음으로는 와닿지 않았어요. 어떤 위로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문 너머의 흐느낌이 명료해져 갔다.
제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다 저도 당신과 똑같은 사랑의 묘약 저주에 걸린 거예요.”
로안나의 흐느낌이 뚝 멈추었다.
“마음은 흘러넘치는데, 그 마음이 내 것인지 아닌지 의심되고, 그래서 혼란스럽고, 그런데도 곁에 있고 싶고, 하지만 곁에 있으면 아프고, 눈에서 멀어지면 그건 더 괴롭고…….”
“…….”
“그래도 좋았어요.”
제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요해진 내면에 그녀의 목소리가 파동처럼 번져나갔다.
“가짜라도 좋았어요.”
“…….”
“나는 그랬어요.”
제인은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말하는 진심이 부디, 로안나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오면서 생각했어요. 한눈에 봐도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것 같은 당신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위로할 수 있을까. 당신의 닫힌 문을 열 수 있을까.”
“…….”
“나는 끝까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하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어요.”
“…….”
“당신은 사랑을 알아요.”
“아뇨, 몰라요. 나는…….”
로안나가 말끝을 흐렸다.
제인은 그 끝에 달린 맑은 방울이 애처로웠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로안나의 괴로움이 눈앞에 그려졌다.
제인은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스스로의 마음을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그래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누군가 그 마음을 믿어주면 된다.
당신의 사랑이 옳다고.
“당신이 그랬죠?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모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거라고요. 로안나 씨, 그건요…….”
제인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음절마다 마음을 눌러 담듯이 말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어요.”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건 침묵 이상의 정적이었다. 제인은 낯설지 않은 공기의 흐름에 몸을 틀고 문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였다.
제인이 언젠가 한 번 들었던 적이 있는, 맑은 물방울 소리가 들린 것은.
* * *
엘마뉴엘.
프시오가 솜브를 보러 간 사이, 그녀와 함께 온 세실은 펠드툰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제인이 관문을 넘었단 말이지.”
“네.”
펠드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세실은 맥주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다음 말을 고민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했던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올라오려던 찰나였다.
펠드툰이 요란하게 웃었다.
“낄낄낄낄낄낄낄!”
“…….”
인상을 팍 찌푸린 세실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칠순 때도 똑같을 것 같았다.
“어떻냐?”
펠드툰이 그녀를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네 생각이 틀렸다는 걸 확인한 기분 말이다.”
세실은 맥주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펠드툰을 응시했다.
“나쁘지 않던데요.”
“그렇지?”
세실과 펠드툰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은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세실은 잔에 남은 맥주를 모두 마셨다. 그리고 수년 전부터 펠드툰에게 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제가 신체계 치유 마법사가 된 건…… 이 길이 좋아서예요. 좋아하는 길을 가면서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펠드툰이 물었다.
“행복하니?”
“행복해요.”
펠드툰이 웃었다.
“그럼 나도 행복하구나.”
“…….”
“이 말이 너무 늦었구나.”
세실은 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툭 하면 낄낄거리는 아버지의 말에 이렇게 눈물이 날 리 없지 않은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정신계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인이 관문을 넘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믿고 싶었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줄 마법사가 되어주길.
세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펠드툰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세실은 펠드툰의 냄새가 가득 밴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프시오가 네게 참 좋은 친구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너와 나는 제인이 관문을 넘지 못 하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때도 프시오는 확신하더구나. 그래서 어떻게 확신하냐고 물었다. 그 녀석이 뭐라고 맹랑하게 대답했는지 아니?”
“…….”
펠드툰이 호쾌하게 말했다.
“세실의 제자니까요!”
세실은 다시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펠드툰은 세실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좋은 친구를 뒀다는 건 그만큼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지.”
언제나 세실에게 부족한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였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아버지의 역할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 때문에 세실이 외로워하지는 않을지 항상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세실의 곁에는 이제 저 말고도 호엘리반과 프시오가 있다. 펠드툰은 세실의 곁에 좋은 아이들을 내려준 신께 감사했다.
몇 잔의 맥주잔이 더 비워졌다.
그 사이 세실은 제인이 어떤 맹점을 비틀어서 관문을 넘었는지 말해주었다.
미친 계집애가 겁도 없이 상처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고 왔다고. 보는 내내 울화통이 터져서 죽을 뻔했다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회복력으로 마비를 연상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은근슬쩍 대견해했다.
“그런데, 딸아.”
펠드툰은 제인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세실이 흐뭇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염려스러웠다.
“제인이 치유 마법사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니?”
세실은 조용히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펠드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신체계든 정신계든 치유 마법사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만큼 윤리적인 잣대가 엄격했다.
아픈 곳을 찾아내는 건, 그곳을 치유할 수도 있지만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므로.
더군다나 관문을 통과할 때 사용했던 제인의 연상은 자신을 학대하면서 알게 된 맹독이었다. 그러니 제인은 양날의 검을 누구보다 위태롭게 쥐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세실은 대답 대신 펠드툰에게 되물었다.
“그 녀석, 호엘리반과 꽤 닮았죠?”
“…….”
펠드툰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호엘리반은…….
그는 호엘리반이 악에 가까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크게 손을 쓰지 않은 것은 호엘리반이 그 본성을 오랜 시간을 잘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드툰의 마음을 짐작한 세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호엘리반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어요.”
이어서 담담하게 웃었다.
“아버지, 그 애는요. 연민을 알아요.”
* * *
한밤중에 제인은 어느 자택의 지하감옥 안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리고 창살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불렀다.
“소스키엘?”
경기를 일으키듯이 화들짝 놀란 소스키엘이 불안한 눈빛으로 제인을 훑었다. 그녀는 모자 달린 검은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누, 누구냐?”
제인은 확인하듯이 다시 그를 불렀다.
“소스키엘 잔.”
“…….”
제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맞나보네.”
아버지가 미쳐버린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있던 그는 제인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얼굴이 질려 버렸다.
“아, 아버지께서 보내셨나……?”
“아니.”
제인은 엔니오가 적어준 잔 백작의 저택 주소와 지하감옥으로 내려오는 약도를 보다가 품에 집어넣었다.
소스키엘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버지가 보낸 게 아니면…… 누구지?”
제인은 모자를 쓴 머리 부근을 긁적이면서 대충 대답했다.
“나? 마법사.”
“여, 여긴 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보이는 족족 재웠어. 나쁜 짓을 소란스럽게 하면 처리해야 될 게 많아진다고 배웠거든.”
“그게 무슨 소리……!”
소스키엘은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위로 향해있던 제인의 검지가 소스키엘에게로 향했다. 그가 쓰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무슨 소리긴. 당신도 재울 거라는 소리지.”
제인은 기절한 소스키엘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내 첫 고객은 처음부터 당신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