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언젠가, 그레데엘므가 날 찾아왔던 적이 있어. 그날 내게 말하더군. 어느 봄의 끝에 날 다시 봉인할 거라고.”
“!”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예감했지. 그때가 바로…… 올봄이구나.”
루는 파리한 안색이 무색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슬며시 올리고 턱을 괴였다.
“그래서 나는 그자를 하늘의 별로 만들어 줄 생각이야, 솔레리안.”
그레데엘므와 하늘의 별.
두 가지만으로도 솔레리안의 심장이 곤두박질치기 충분했다. 별은 천계의 관할이지만 예외가 있었다. 그 예외를 건드리면 가능성이 없는 얘기가 아니었다.
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솔레리안에게 충격을 받아들일 틈도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물론, 바로 떨어뜨릴 거고.”
“미쳤……!”
솔레리안은 바로 인상을 구기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루가 어지러운지 눈을 감고 이마를 꾹 눌렀다. 그러다 또 괜찮은지 팔을 내리며 후우, 하고 긴 숨을 뱉었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데.”
솔레리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루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떨리는 손끝을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보아하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가 본데, 언제부터지?”
의자 등받이에 기댄 루가 나른한 목소리를 덧붙였다.
“그자가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
솔레리안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긍정하기에는 천계의 르젤과 다를 바 없이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고, 부정하기에는 그레데엘므는 삶에 냉소적이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니, 언제라도 죽고 싶다는 듯이.
솔레리안도 알고 싶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레데엘므가 천계에 있을 때부터 먼발치에서나마 마음을 다해 존경하던 그를 그녀조차도 그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명확한 건 하나였다.
그레데엘므는 세상 만물을 이해했으나,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그저 유일하게 그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신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등을 바라보며 살아갈 뿐.
처음에는 그저 외로워하시는구나, 안일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외로움이나 쓸쓸함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류였다.
“솔레리안.”
생각에 잠겨있던 솔레리안이 가볍게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윽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뭐죠. 그것 때문에 오신 거, 알고 있습니다.”
“그레데엘므의 별빛을 담아내.”
솔레리안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가녀린 손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며 세상에 다시 없을 마귀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제 손으로…… 그레데엘므 님의 별빛을요.”
“너니까.”
“…….”
“그리고 그 별빛을 저 녀석에게 전해주도록 해. 여기에 남겨두고 갈 테니.”
루가 가리키는 곳에는 멀리서 녹초가 된 몰골로 털레털레 걸어오고 있는 타타가 있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마지막 물량은 지금 데코토들이 지하 창고에 옮겨 놓고 있을 거야. 확인하고 와서 인장 찍어 놔.”
솔레리안은 모든 게 지옥 같았다.
“……제가 틀린 거죠? 당신의 세상이 옳고 제가 틀린 거죠?”
그리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덧붙였다.
“그때도, 지금도.”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악한 게 옳고, 강한 게 옳고, 뒤틀린 세상이 옳다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거짓된 안식마저 남김없이 짓밟고 부서트리는 데시안의 것이었다.
“네가 옳아. 그때도, 지금도.”
솔레리안은 귀를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허리를 숙이고 그가 내뱉은 말을 잊으려 했으나 그럴수록 더 또렷하게 새겨져만 갔다.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내 세상에서는 내가 옳고 네 세상에서는 네가 옳다는 것을.”
각자에게 옳음이 있다.
차이라면 루는 자신의 옳음을 행하고 있고, 솔레리안은 이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정말 잔인해요.”
루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약한 존재. 세상에 그런 것들은 지천에 질리도록 깔려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제인이었다.
어두운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권태롭고, 탐미를 쫓는 데시안이 유일하게 믿음을 바쳐가며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존재.
그는 두통과 함께 타는 목마름을 느꼈다.
갈증은 익숙했다.
오랫동안 인간의 맹목적인 사랑을 갈구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제인이 그레데엘므의 저주에서 풀려났던 그 순간보다 더 선명하게.
이제 거의 다 왔다.
길은 완성되었고, 봄이 왔으니.
루는 그토록 바라는 한 인간의 죽음에 한 걸음 내딛듯 일어섰다.
그러다 연옥을 막 벗어났을 때쯤.
하이데스가 준 고약한 취기가 기어코 그를 덮쳤다.
쿵…….
벽에 기댄 몸이 무게를 못 이기고 쓰러지는 순간, 가벼운 발걸음이 루 앞에 멈춰 섰다. 그대로 쪼그려 앉은 이의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그가 한숨을 폭폭 쉬었다.
“어부바까지 해줘야 해?”
* * *
호엘리반의 자택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프시오는 엘마뉴엘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세실은 제인에게 치유 마법사로서의 첫 진료를 위한 마지막 가르침을 전수하는 중이었다.
세실이 말했다.
“마음의 문이란 건 네 관문에서 봤던 것처럼 하나만 있지 않아.”
“제 마음의 문은 하나였지 않아요?”
“관문을 넘을 땐 안내자인 내가 마법진으로 가장 부서진 문 앞에 데려가 줬던 거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은 셀 수 없이 많아.”
제인이 단박에 이해했다는 듯이 주억거렸다.
“로안나 씨가 있는 문부터 찾아야겠네요.”
“그래. 찾은 다음에는 문에서 나오게만 하면 돼. 그럼 의식이 돌아올 거야.”
“사랑의 묘약은요?”
당연히 묘약의 저주까지 풀라고 할 줄 알았던 세실은 단호하게 만류했다.
“아직은 풀려고 하지 마. 지금은 로안나 씨가 있는 마음의 문을 찾고, 거기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알겠어요. 대단한 거 하고 올게요.”
세실은 제인의 뻔뻔한 말에 습관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파탐을 찾아 물었다.
제인이 웃으며 말을 흘렸다.
“문에서 나오게 하는 방법은 아마…….”
“마음을 살필 것.”
“네.”
“이번 진료에는 마법을 쓰는 일이 크게 없을 거다. 그래도 조심해라. 마음의 문에 들어가는 일은 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일이야. 말이든, 마법이든.”
“네.”
“대답은 잘하지, 아주. 프시오가 엔니오 씨 자택으로 바로 갈 수 있도록 회중시계를 빌려줬으니까 챙겨 놔.”
제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협탁으로 걸어갔다.
협탁 위에는 회중시계뿐만 아니라 백 온트 수표와 함께 접힌 쪽지 하나가 있었다.
[선불로 지급합니다.
진료는 시간적 여유가 될 때 받겠습니다.
- 프시오]
제인은 작게 웃으며 백 온트 수표와 쪽지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참, 부탁드릴 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자연스럽게 부탁하지 마라.”
“우선은 수면 마법 좀 가르쳐 줄래요?”
* * *
제인은 엔니오가 작업한 조각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았다.
조각상의 눈동자, 손가락, 옷깃 하나까지 다 살아 움직일 것 같아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엔니오.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제인은 다시 입술을 움직였으나 시선은 여전히 조각상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당신 재능은 신이 주신 게 분명해요.”
곁에 있던 엔니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개인 작품인가요?”
“아뇨. 의뢰받은 작업물이라서 포장하려고 밖에 둔 거예요. 여러 국가에서 의뢰받다 보니까 아쉽게도 개인 작품을 작업할 여력이나 시간이 안 되네요.”
“제가 이 작품의 주인이라면 보내기 싫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생각나면 가끔 보러 가서. 제게 의뢰가 들어오는 작업물은 보통 외부에 설치되니까요.”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 있나요?”
제인은 눈앞의 조각상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 있을까 싶어서 물은 질문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페브리아의 아낙시오니아 상이요.”
놀란 눈을 한 제인이 천천히 엔니오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로안나가 그 작품을 무척 좋아했거든요. 미사보 아래 표정이 눈부시게 환한 미소일 것 같다고 하면서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사랑하는 이가 좋아해 주는 작품이라니.
제인은 로안나를 향한 엔니오의 사랑이 얼마나 따뜻하고, 빛나는지 새삼 느꼈다.
그러니 로안나를 데려와야지.
제인이 엔니오 쪽으로 몸을 틀었다.
“로안나 씨에게 데려다주세요.”
* * *
제인은 빛의 돔 속에서 내면의 눈을 떴다.
흰 공간.
그곳에 중력을 무시하고 수백, 수천 개의 문이 둥둥 떠 있었다. 문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파스텔 계열 색상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내면의 눈을 감자, 어디선가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느껴졌다.
제인은 본능적으로 그 향이 사랑의 묘약이라는 걸 깨달았다. 계속 눈을 감고 예민하게 향기를 맡았다. 얼마나 오래 눈을 감고 있었는지 체감하기 어려웠다.
어느 순간 짙은 향이 확 번져 왔다.
곧바로 내면의 눈을 떴다.
제인은 꽃 자수가 새겨진 상아색 문 앞에 서 있었다. 시트러스 향이 나는 문에 손을 가져가 대었으나 응축된 공기가 밀려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완강한 거부였다.
손을 내린 제인이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로안나 씨.”
“…….”
문 너머의 흐느낌이 멈추었다.
“제인이에요. 저, 기억해요?”
“여길 어떻게…….”
“저 마법사가 되었거든요. 당신이 여기 있다고 해서 데리러 왔…….”
“싫어요! 나가고 싶지 않아요.”
로안나의 거부에 제인이 기지개를 쭉 켰다.
“그래요, 그럼.”
“…….”
제인은 그렇지 않아도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목부터 어깨, 그리고 팔을 순서대로 스트레칭하고는 개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목소리를 들었으니 일단은 그걸로 충분해요. 우는 거 방해하지 않을게요. 울고 싶으면 계속 울어요.”
“……안 울었어요!”
“그래요, 안 울었어요.”
“…….”
문 너머의 흐느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제인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로안나의 문을 바라보았다. 꽃 자수가 새겨진 상아색 문은 다시 봐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부서지거나 엉망인 곳이 없었다. 굳게 닫혀 있는 게 전부였다.
다행이었다.
제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로안나 씨, 정말 예쁜 문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