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15)화 (115/168)

115.

프시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어서 하하, 하고 조그맣게 웃었다.

프시오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기에 호엘리반과 세실은 멍하니 그녀의 웃음을 응시했다.

프시오가 손을 내렸다. 그녀의 입가에 여전히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습니다.”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품위 있게 말하던 제인이 프시오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보며 킬킬거렸다. 그러다 일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그런데요…… 사실은 생각해둔 첫 고객이 있어요. 첫 고객에게는 무료로 의뢰를 받아 줄 생각이고요. 혹시라도 서운할까 봐 미리 말씀드려요.”

“아뇨, 서운하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엔니오 씨께 최대한 빨리 뵙고 싶다고 전해줄래요?”

“!”

제인이 말갛게 웃었다.

“내일 바로 뵐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 * *

모두에게 취기 가득한 밤이 이어졌다.

발코니에 나와서 바람을 쐬던 제인이 울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루와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지?

빌어먹을 시간이라는 게 좀처럼 흐르지 않는 기분이었다.

호엘리반의 계획에 동참하고 그토록 길고 긴 회의를 했건만, 머릿속에 뭉쳐진 글자를 펴내면 몇 가지가 되지 않으리라.

보고 싶다. 언제 돌아오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으려나?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렇게 보고 싶다는 네 글자만 모아도 넘실거리는 바다가 되어 그녀를 덮칠 것 같았다.

“이건 뭐랄까.”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바라보던 제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개 같아.”

제인은 문득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뛰어내리면 명계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그렇게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사이 밀리타가 제인의 곁으로 다가와서 난간에 등을 기대어 섰다.

“안 추워요?”

제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음대로 신의 손 이야기를 했던 것이 풀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밀리타는 제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거듭된 사과를 받은 후에야 제인은 마음이 풀렸는지 바닥에 번진 밀리타의 그림자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그림자로 사람들의 죽음을 볼 수 있는 거.”

“네.”

“그거 괜찮은 거야? 여기에 막, 좋진 않을 것 같아서.”

제인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묻자 밀리타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프시오가 원할 때만 볼 수 있도록 손 써줬어요. 대신 이전처럼 그 자리에서 한 번에 확인하는 건 어렵게 됐지만요.”

“그래도 다행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브리아를 뒤흔들 계책을 완성한 자리는 왁자지껄한 술판으로 이어졌다.

발코니 너머 거실을 보자 호엘리반이 빙긋 웃으며 무어라 말했고, 세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에게 삿대질했다. 프시오는 그런 그들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카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제인은 방금까지도 자신이 저 속에 있었다는 게 조금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밀리타.”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제인이 밀리타를 불렀다.

“페브리아 지하에서 드래곤 마석을 훔치는 거, 카이랑 둘이 하지 않을래?”

“당신은요?”

제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난 도둑질보다 더 나쁜 짓하러 가려고.”

* * *

명계에 마석을 찾으러 온 라트올은 목석처럼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간은 황망한 얼굴로 굳어 버린 라트올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예쁜 얼굴을 마음껏 훔쳐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라트올이 쩍, 소리 날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우리 주인님이, 그러니까, 루가 타타를 데리고 갔다고?”

다간은 그에게 의자를 밀어 넣어주었다.

“응. 데리고 가셨어. 일단 여기 앉아. 너 안색 너무 안 좋아…….”

의자에 풀썩 앉은 라트올이 말을 잇지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타타를…….”

“타타가 네 주인님 따라가면서 얼마간 자리 비울 거라고, 여기 잘 지키라고 신신당부했어.”

라트올은 뒤늦게 타타가 다간을 데려온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이마를 문지르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연옥에 타타를 데리고 갈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라트올의 귓가에 루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레데엘므가 죽어서 틀어박힐 자리.

설마 했는데…….

그의 잇새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예상이 적중한 탓이었다. 루는 정말로 그레데엘므를 하늘의 별로 처박았다가 떨어뜨릴 셈이다.

하지만 그 웃음이 더 씁쓸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루는 저에게 하나밖에 없는 주인님인데, 그에게 저는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있었다면 타타를 데려가려 한다는 말 정도는 해주지 않았을까.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필요…… 없어지려나.

그때 다간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라트올, 괜찮아……?”

다간이 가까이 와서 조심스레 묻자, 라트올은 고개를 저었다.

“너야말로 여기, 혼자서 괜찮겠어?”

“……응?”

“옆에 있어 줘?”

너무나 예쁜 얼굴로 묻는 다정한 말에 다간은 고개를 끄덕거릴 뻔했다. 그러나 그는 타타가 떠나기 전에 결연한 얼굴로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간,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라트올이 도와주겠다고 하면 거절해. 귀에서 피 나는 기분을 매 순간 느끼고 싶지 않다면 죽기 살기로 거절하라고.

-라트올의 잔소리가 어느 정도길래 이래……?

-인마,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게 있어! 아무튼 거절해. 알겠어?

그때 당시, 다간은 저도 모르게 타타 옆에 서있던 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문대로 명계에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루는 다간을 잠시 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흘리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이.

“다간.”

라트올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린 다간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유순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필요 없어.”

* * *

연옥의 집행관인 솔레리안은 세상이 끝난 기분이었다.

아니, 종말이 와도 이렇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는 도무지 얼굴을 들고 싶지 않았다. 마주 앉은 자의 오만한 눈을 마주치는 게 고역이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소리 없는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두꺼비처럼 생긴 타타를 힐끔 보았다.

그저 그런 하급 메 데시안.

그는 불안하고 초조한 시선으로 주변을 곁눈질하기 바빴다. 메 데시안이 연옥까지 올 일은 죽어서도 없으니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흔들리는 시선과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만 봐서는 현혹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짐작되는 건 하나.

황홀한 낯짝에 세상 권태롭고 음험한 데시안에게 반항도 못 하고 여기까지 꾸역꾸역 따라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건 솔레리안에게 성가신 일로 변주될 것을 예감하게 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녀와 루 사이의 채무에 제3 자의 개입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제3 자의 처지가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솔레리안은 꼭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자가 무어라고.

그저 앞에 앉아 있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죄수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는가.

고개를 올리려던 그녀의 이마는 주춤거리다가 다시 중력에 이끌려 힘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죄수였다.

그리고 그런 죄수의 죄를 덜어내 준 게 마주 앉아있는 자였다.

현혹의 데시안, 루.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루는 솔레리안을 앉혀만 놓고 수 분 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살갗을 찢어서 피를 말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기별도 없이 어쩐 일로 오셨나요.”

“……완성되어서. 내가 바랐던 길도, 연옥에서 원했던 녹니스의 물량도.”

솔레리안이 몸을 흠칫 떨면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완성된 건 어떻…… 아, 라트……올…….”

이내 마주 앉은 루를 뒤늦게 본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루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흰 피부가 이제는 창백하다 못해서 희게 질려 있었다.

솔레리안의 선한 마음이 일말의 염려로 번지려 할 때였다.

“……여전히 순진하군.”

“…….”

“말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라트올을 이곳에 꼬박꼬박 보내서 납품하는 이유 정도는 눈치챘어야지.”

미쳤지, 저런 후레자식을 걱정하고.

솔레리안은 울컥거리는 마음을 애써 삼켜내며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던 건 사실입니다.”

“……미뤄?”

그가 웃었다.

“네 사멸이 빨라질 일이군.”

그 말에 질릴 대로 질린 건 솔레리안도, 그녀의 뒤에서 혀를 깨물며 침묵을 지키는 해밀도 아니었다.

타타였다.

타타는 울고 싶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명계에서 평소처럼 일하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것만으로도 억울한 판국이었다.

연옥의 공기는 명계와는 다른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하거늘, 그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침묵이었다.

타타는 심각하게 상황을 가늠했다.

숨 막히게 해서 죽일 심산인가?

그게 아니고서야 메 데시안이 연옥까지 와서 데시안과 르젤 사이에서 입도 뻥긋 못하고 앉아 있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 시작된 루와 솔레리안의 대화에 타타는 드디어 숨 막히는 침묵에서 벗어나나 싶었다.

하지만 루가 입으로 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전보다 더 숨통이 조여들었다. 오히려 침묵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는 차라리 공기가 되고 싶었다.

아니면 저, 연옥의 벽이라도 되고 싶었다.

아무튼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 아니면 좋겠다 싶을 때였다.

루가 명령하듯 말했다.

“타타에게 길을 안내해.”

와, 씨, 내 마음을 읽었나?

타타는 주책맞게 놀라며 루를 바라보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루의 안색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어서.”

낮게 깔린 음산한 목소리에 솔레리안이 해밀에게 눈짓했다. 해밀은 눈을 까뒤집으며 위를 올려다봤다가 타타를 데리고 사라졌다.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럼 저도 이만.”

“앉아.”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솔레리안은 다시 의자에 앉아 긴 고요를 견뎌야 했다. 그러다 일순, 루가 이마를 슬쩍 짚으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솔레리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이 보란 듯이 틀렸다.

루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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