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다음 날, 저녁.
호엘리반의 자택으로 초대받은 제인은 프시오, 세실, 밀리타, 카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호엘리반은 제인과의 대화를 짧게 정리해서 설명했다.
제인이 끝에 마드리안 교황에게서 믿음을 훔쳐야 한다고 강조했을 때 프시오가 물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제인은 눈을 내리깔고 마드리안 교황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제인. 페브리아의 교황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아니? 진실? 거짓? 아니란다.
-믿음.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공기와 같아서 그만큼 흩어지기도 쉽지.
-그래서 사람들에겐 ‘눈에 보이는 믿을 것’이 필요해.
제인이 시선을 들었다.
잿빛 눈동자에 얼핏 이채가 돌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요.”
모두가 그녀가 입가에 문 미소가 몹시 이질적이라 느꼈으나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약간의 두려움과 공포, 불안을 조성하고 그걸 눈앞에서 해결해주면 돼요. 마드리안 교황이 의도적으로 질병과 전쟁을 일으켜서 상황을 해결했던 것처럼요.”
밀리타가 물었다.
“어떻게요?”
제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앉은 밀리타에게 몸을 기울였다.
“내 그림자 떼어 볼래?”
“네……?”
“그때처럼.”
잠깐 당혹스러워하던 밀리타가 집중하는 듯하더니 제인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밀리타의 마법 실력은 생각 이상으로 훨씬 늘어 있었다.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그림자에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밀리타는 그녀에게 작은 공처럼 말린 그림자를 보여주었다.
제인이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거, 다 떼어 볼래?”
밀리타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 깜짝할 새에 모두의 그림자를 떼어서 식탁 위에 두었다.
“그림자가 섞였는데 돌려줄 땐 어떻게 해?”
“돌려주는 건 더 간단해요. 그림자에 담겨있는 영혼이 알아서 주인을 찾아가니까요.”
밀리타는 그림자 뭉치 위로 손바닥을 들어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금속이 자석에 달라붙듯이 그림자가 주인을 찾아갔다.
제인이 손뼉을 쳤다.
“멋지다!”
“그림자를 훔칠 생각입니까.”
프시오의 물음에 제인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제인, 그림자 마법은 음지에서 극소수만 사용하는 만큼 흔치 않은 게 사실이긴 합니다만…… 이런 마법이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기엔 무리가 있어요.”
제인은 개의치 않은 듯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죠.”
너무나 태평한 투였기에 프시오는 무어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프시오, 그건 당신이 마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밀리타 쪽으로 다시 시선을 틀었다.
“페브리아인들은 어떨까.”
“……아.”
밀리타는 제인이 파고들 틈새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페브리아.
그 땅에서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그런 사실을 뼛속까지 깊게, 굳건히 믿고 있었다. 마법이라는 요소가 어떤 국가의 국민보다 낯설 것이다. 그 땅에서 평생 자랐던 제인이 그랬듯이.
그러니 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에 공포를 느낄 테고, 만일 마법이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갑자기 달라진 현상에 두려움을 느끼리라.
어떤 방향으로든 흔들린다.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페브리아의 근간인 믿음을 훔치는 것이다.
밀리타의 눈동자가 동요했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호엘리반이 엷게 웃었다.
“그렇군요.”
드래곤 마석이 금지된 이후에는 그림자 마법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마법의 중심이라 불리는 드호아망에서도 보기 힘든 마법이었다.
두려움, 공포, 불안 조성.
시각적 해결.
마법이 금지된 나라인 페브리아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제인의 의도를 파악했을 때였다.
호엘리반이 말문을 열었다.
“페브리아 교황청 내부에 드래곤 마석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어. 우선 우리가 마법을 쓰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 마석부터 훔칠 생각이야.”
제인이 호엘리반의 말을 잇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협상은 그다음이에요.”
호엘리반이 이의 없다는 얼굴로 끄덕이자, 제인은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었다.
“페브리아인들이 앙증맞은 그림자놀이에 바로 선동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으면 되니까요. 그림자든 뭐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만은 피하고 싶었던 프시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세실 역시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호엘리반이 앙디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전쟁을 포함해서 어떤 방법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궁금했다.
자기 제자가 무엇 때문에 이 일에 은근한 광기를 흘리며 열의를 보이는지.
“네 동기는 뭐니.”
제인은 눈꺼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길어졌다.
“그 여자가 저의 소중한 사람에게 손을 대었지 뭐예요.”
제인이 세실을 보며 웃었다.
“저를 키워준 사람이요. 교황청에서 제 역할을 대신하는 중인 것 같아요. 할렌에 돌림병을 발병시킨 장본인이거든요.”
마드리안이 제인에게 교황청 직속 연구원 계약서를 내민 그날, 만약 계약서에 서명했다면 돌림병을 발병시키는 건 그녀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됐을까요?”
세실은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딱히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제인은 그녀의 의중을 헤아렸으나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다가 두 팔을 쭉 뻗고 명랑하게 말했다.
“자! 그럼 도둑질 좀 해볼까요!”
그리고 손뼉을 짝 쳤다.
“시작은 마드리안 교황부터 하죠.”
* * *
몇 시간 후.
저녁 식사를 마친 식탁 위에는 포도주와 치즈, 과일이 올려져 있었다. 계략을 도모하던 그들의 대화는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러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마드리안이 페브리아 국민을 선동하기 전에 어떻게 홍보하고, 입소문을 냈는지 설명하기 위해 ‘신의 손’ 사건을 예로 들었던 제인은 모두가 이미 내막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쩍 굳은 얼굴로 모두를 훑어보았으나 모두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한 사람.
호엘리반만이 빙그레 웃으며 제인을 응시했다.
옴푸푸스에 대한 건 알고 있다고 했지만, 신의 손만큼은 호엘리반도 처음 듣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사실은 신의 손 사건 내막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것도 주범이 밀리타라는 것에 그녀는 매우 어처구니가 없었다.
호엘리반은 밀리타 이전에 루에게도 들었으니 그 이야기를 무려 세 번째 들은 참이었다. 그러나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제인은 배신감에 얼룩진 황망한 눈으로 밀리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밀리타.”
밀리타가 말없이 살짝 웃었다.
“웃어……?”
밀리타는 미소를 유지한 채 그대로 고개를 쓱 돌렸다.
제인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카이에게로 향했다. 카이는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는지 배신감에 몸서리치는 그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유감입니다.”
무척이나 단조로운 어투였다.
제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프시오가 멋쩍게 웃으면서 그간의 사정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페브리아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밀리타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고.
사연을 알게 된 제인은 깊은 한숨을 쉬고 더는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인은 또다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곧바로 이어진 프시오의 말 때문이었다. 제인은 프시오와 세실을 번갈아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세실은 제가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면 프시오를 치료해 주는 조건으로 절 제자로 받아줬다는 거예요?”
세실이 먼 산을 보며 대답했다.
“……어.”
이 사람들이 진짜.
나 빼고 자기들끼리 뭐 하는 거야?
모여있는 사람들을 쭉 훑어보던 제인은 의자 등받이에 툭 기대었다.
“싫은데요.”
모두가 조용하게 난색을 보였다.
누구보다 가장 얼어붙은 건 호엘리반이었다. 그가 제인이게 말을 건네려던 찰나였다.
제인이 먼저 호엘리반을 힐끔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수중에 들어올 돈이 좀 있어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어서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고급 샹들리에에서 수많은 빛의 조각들이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반짝이는 빛들에 머물렀다.
“전 돈이 들어오는 대로 세실에게 그동안의 수련비를 지급해드릴 예정이에요.”
세실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꼴통아, 내가 돈 때문에 널.”
“비용은.”
제인은 시선을 샹들리에에 고정한 채 손바닥을 펼쳐서 호엘리반을 가리켰다.
“이분께서 드호아망 마탑 교수직을 기준으로 산출해 주셨어요. 저 이미 사인까지 했거든요. 못 물러요.”
모두가 황당한 눈으로 호엘리반을 응시했다.
세실 만이 그를 보며 돈에 미친 새끼도 아니고 그걸 받겠다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냐며 흠씬 욕을 해댔다.
그러나 호엘리반의 시선은 여전히 고개를 젖히고 있는 제인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몹시 복잡해 보였다.
그때 제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오면서 프시오에게 닿았다.
그리고 방글거렸다.
“프시오, 당신은 저를 믿나요?”
“제인…….”
제인을 부르던 프시오는 일순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네. 당신을 신뢰합니다.”
제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신뢰, 기꺼이 받을게요.”
“금액은요?”
알 수 없는 그녀들의 대화에 모두가 어리둥절했으나 제인은 기쁜 얼굴로 양손으로 턱을 괴고 웃었다.
이어서 밝고 명랑하게 말했다.
“백 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