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그대는 참 특별한 데시안이구나. 날 이토록 기다리게 하다니 말이지. 살면서 바람이라는 것은 처음 맞아 보았단다.”
술잔을 내려놓은 하이데스가 접견실에 마주 앉은 루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특별해서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니 조심하렴.”
루도 미소를 지었다.
“죽고 싶냐는 말씀을 참 다정하게 하십니다.”
“그대의 명줄은 건드리진 않겠다만은, 귀찮게 만들어 줄 순 있으니 그 점은 염두하고 행동하렴.”
“네, 마왕님.”
루의 순순한 대답에 하이데스는 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어 루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속삭이는 투로 말했다.
“그대가 말했던 위치의 별자리 열쇠란다. 예쁘게 쓰고 가져와야 한다. 천계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기만하듯이, 알겠니?”
루가 짧게 목례하고 열쇠를 품에 넣었다.
하이데스가 술을 권유했다.
“마시렴.”
곧바로 연옥으로 넘어가려 했던 루는 하이데스의 권유에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별자리 열쇠를 주었으니 어느 정도 어울려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별은 하늘의 영역으로 천계 관할이었다.
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의 업적이나 공로를 기리기 위한 상으로 별이 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예외적으로 죄를 지은 존재를 벌하기 위해서 별로 만들기도 했다.
바로 그 예외만 별도로 명계에서 주관했다.
하지만 천계와 상의 없이 멋대로 하늘에 마음대로 별을 쏘았다가 떨어뜨린 게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이데스는 꽤 적지 않은 위험 부담을 안고 열쇠를 준 것이다.
루는 그가 그만큼 애쓴 보람이 있도록 잠깐은 어울려 줄 요량이었다.
“웬일로 고분고분하구나.”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하이데스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예쁜 아이가 착하게 구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게 없지.”
“다 마시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원하는 걸 얻자마자 그렇게 냉큼 거리를 두는 거니? 내 허벅지에 올라탈 땐 언제고.”
하이데스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루는 키득거리며 말없이 술을 마셨다. 천천히, 그러나 여유를 즐기지는 않으면서.
하이데스가 말했다.
“그레데엘므는 여전히 네게 관심이 많더구나.”
루의 술잔이 찰랑거렸다.
하이데스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시며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성가시고, 불쾌하고, 징그럽고.”
“솔직하구나.”
하이데스가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솔직해져 보지 그러니.”
루는 술잔에서 손을 떼었다.
웃는 낯으로 고요하게 몹시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떤 말을 듣길 원하십니까.”
“그대가 말하길 원치 않고, 그레데엘므가 듣길 원치 않는 것. 그러나 그대들이 서로 알고 있는 것. 나는 그게 듣고 싶구나.”
“…….”
하이데스가 옅게 미소 지으며 술을 따라주었다.
술이 남아 있던 잔이 흥건하게 넘쳐흘렀다.
“뭐하니? 마시렴.”
루가 얕게 실소했다.
이내 농염이 섞인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가득 찬 술이 일렁이면서 손날과 손목, 팔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루는 담긴 술을 비워냈다.
하이데스는 자신의 물음에 묵묵부답인 루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렸다.
“그대가 취하는 모습을 보겠구나.”
루의 미간이 슬 좁아졌다.
잠깐 어울려 주려 했던 루의 속내와는 달리, 하이데스는 그를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명계의 술은 무척이나 지독해서 앞으로 몇 잔을 더 마시면 취할 것이고, 그것은 하루 이틀 만에 깨어날 숙취가 아니었다.
“아니면, 나를 또 홀릴 거니?”
하이데스가 즐거운 어조로 묻자, 루는 손날부터 팔꿈치까지 진득하게 말라가는 술의 흔적을 핥다가 무심하게 답했다.
“이제 감을 필요가 없어서 말입니다.”
필요가 없다.
그 말에 하이데스의 핏대가 살짝 도드라졌다.
이어서 재차 루의 잔을 채워주었다.
“……마시렴.”
“…….”
“어서.”
“연옥에 가봐야 합니다.”
“그래, 가야겠구나.”
하이데스는 술잔을 들라는 듯이 손짓했다.
“내게 즐거움을 실컷 준 후에.”
루는 술잔을 지그시 보았다.
하이데스가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지 가늠하고자 했다.
하이데스를 감으려 했던 오만함이라던가 부름에 응하지 않던 방자함이라던가 그런 건 루를 향한 분노나 유희가 되지 못한다.
해봤자 핏대를 세우는 약간의 짜증 정도.
적어도 하이데스에게 루의 존재는 그랬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그를 자극한 것이리라.
하이데스의 유희가 자극될 때만큼은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이롭다. 일이 더 꼬이고 성가셔진다. 한 번 알을 깐 날파리가 끝도 없이 성가시게 구는 것처럼.
루는 얕은 한숨을 흘렸다.
무엇이 그를 자극한 건지 헤아리기 쉽지 않았다.
때마침 하이데스가 즐거운 독촉을 위해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루였다.
“아주 오래전에…….”
하이데스의 입술이 닫히고, 루가 고개를 들었다.
“시기했습니다.”
하이데스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포개어 얹고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흥미롭구나. 듣고자 했던 건 오래전 일이 아니지만.”
안 넘어오는군.
루는 피로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를…….”
루는 고작 몇 음절을 뱉어내고는 길고 긴 고요를 이었다.
접견실 안의 공기가 뭉근하게 틀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푸른 눈동자가 심연 아래로 깊이 잠겼다.
하이데스는 몹시 기꺼워하며 그의 침묵을 기다려주었다.
루가 한참 만에 말했다.
“연민합니다.”
하이데스가 포개진 팔 안으로 고개를 숙였다. 푸흐, 하고 새어 나오던 웃음은 이윽고 크게 터져버렸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미친 듯이 웃었다.
“아, 무척 즐겁구나!”
하이데스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루에게 나가보라고 대충 손짓했다.
루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접견실에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하이데스가 돌연 루의 손목을 당기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바짝 붙은 그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며 우롱하듯이 킬킬거렸다.
루가 조소를 띄운 채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렸으나, 하이데스는 그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겨우 웃음을 삼켰다.
“마음이 바뀌었구나.”
“변덕을 재롱처럼 부립니다.”
“염려하지 말렴. 안 준다는 건 아니니. 연옥에 들린 다음에 다시 오거라.”
“…….”
“한 잔 더 하면 줄 테니.”
루가 하이데스의 턱을 살짝 쥐었다.
“……모르셨나 보군. 재롱부리는 남의 강아지, 안 좋아하는데.”
하이데스의 눈이 활짝 휘었다.
루가 그를 잘 알 듯, 그도 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뺏어 갈 거니? 내 장단을 조금만 맞춰주면 모든 게 수월해질 거란 거, 알잖니.”
“……노는 법이 치졸하고 더러워서 어떡할까.”
“그거야말로 기만의 기본 덕목이란다.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지. 다시 오면 반드시 줄 테니 그리 알려무나.”
루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하이데스의 턱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그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그간의 정이 있어서 베푸는 아량이라는 거, 잊지 마세요.”
하이데스가 뒤로 물러서며 웃었다.
“황송해하마.”
그렇게 루가 돌아간 접견실의 공기는 전보다 더 냉랭했다.
하이데스는 두 팔로 배를 감싸며 클클 웃다가 한쪽 벽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벽이 스르르 사라지면서 누군가 나타났다.
그레데엘므였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말끔히 닦여 있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마왕님, 이게 무슨 짓이야?”
그레데엘므는 그저 웃고 있지 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하이데스는 그런 그레데엘므를 보며 광기의 미소를 흘렸다.
아, 정말이지 미치도록 즐겁구나.
이전에 루가 허벅지에 앉았을 때, 하이데스는 그에게서 박하 향을 맡았다. 하지만 루의 피 냄새에 덮이면서 스치듯이 맡았었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루를 벽으로 몰아세운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자 그레데엘므의 냄새가 났다.
확실하군.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일전에 그대가 셋이서 보자기에 자리를 마련해 보았는데, 마음에 드니?”
그레데엘므가 심정을 헤아리기 어려운 얼굴로 침묵을 이으며 하이데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이데스는 접견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온화하게 웃으며 기꺼이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그레데엘므의 시선이 틀어졌다.
이어서 퉁명스러운 얼굴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네.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어.”
“떨릴 만큼 좋았다니, 기쁘구나. 저 아이는 또 올 거란다. 그때도 함께하고 싶으면 오려무나.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다만은.”
그레데엘므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서 물었다.
“또 무슨 짓을 했어?”
“술잔에 내 기만을 담았단다.”
“……마왕님, 심심해? 놀아줘?”
하이데스가 걸터앉은 책상에서 일어나 그레데엘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대야말로 보고 싶지 않니?”
“무얼.”
“세상 무엇에도 조급할 줄 모르고, 두려울 게 없는 듯한 저 아이의 살가죽에서 초조와 불안이 드러나는 모습이.”
그레데엘므의 얼굴이 기우뚱 기울었다.
“마왕님, 뭘 알고 이러는 거야?”
하이데스가 주머니에서 사탕 한 알을 꺼냈다. 그리고 잡고 있던 그레데엘므의 손을 펴고 쥐여주었다.
“저 아이에게서 네 냄새가 나더구나.”
이어서 다정한 어조로 타이르듯 물었다.
“너희 사이의 맹약, 종결된 게 아닌 게지?”
그레데엘므가 묘한 눈길로 사탕을 보다가 껍질을 까서 입에 쏙 넣었다. 동그란 사탕이 그의 입안에서 몇 번 구르다가 뚝 멈췄다.
“있잖아, 저 애송이가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하이데스는 그레데엘므의 엉뚱한 말에 익숙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그레데엘므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그래, 무엇을 잘못 알고 있지?”
그레데엘므가 맑은 백금빛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강아지 아닌데.”
하이데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송아진데. 귀여운 송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