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호엘리반의 집무실에 들어온 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카사시아는 곧 종식될 거예요. 교황청에서 신의 어쩌고저쩌고 뭐 그딴 걸로 해독제를 풀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호엘리반의 목소리 역시 무던하기만 했다. 그녀가 증서 한 장을 내밀기 전까지는.
호엘리반이 수십 가지 생각이 깃든 얼굴로 물었다.
“제인, 이게 뭐죠……?”
제인은 현금보관증서를 갖게 된 경위를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끝에는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마치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기분 좋게.
“누가 제게 이런 말을 했었어요. 삶의 모든 건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요.”
제인은 호엘리반이 손에 쥔 증서를 가리켰다.
“제 손에 있으면 산들거리는 강아지풀로 보이겠지만 당신이 쥐면 적어도 칼자루로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호엘리반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제인은 그를 힐끗 보고는 집무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 햇살에 대리석이 희게 빛내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호엘리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브리아를 주시하는 진짜 목적이 뭐예요? 알려주면 빌려 드릴게요. 대여비는 각국에서 이백만 프랑크씩 수령해서 오는 거로 하고요.”
“거창한 심부름이네요.”
“가치 있는 칼자루죠.”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당겼다.
제인은 그의 반응에 의문스러웠다.
페브리아를 경계하는 만큼 연합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증서를 보면 당연히 탐을 낼 줄 알았으나, 그는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의 의중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제인은 그와 나란히 침묵을 걸었다.
“제인.”
이윽고 호엘리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증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면 당신도 모습을 드러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영원히 페브리아에서 사람들을 기만한 사기꾼으로 남을 거예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온 건가요?”
제인은 조금 놀라서 호엘리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외인데요.”
“……?”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서요.”
호엘리반이 다소 허탈하게 웃자 제인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사기꾼이 되는 건 협박받았을 때부터 각오했던 거라 지금 와서는 별 감흥이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걸 걱정하느라 머뭇거릴지는 몰랐어요. 당연히 웃으면서 이용할 줄 알았거든요.”
“평소의 저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뭐가 달라요?”
제인이 감흥 없이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그의 대답으로 제인은 말문이 막혔다.
“제게 소중한 사람들이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것은 견고한 요새 속의 다정한 마음이었다.
높고 높은 성역을 쌓아 올리고 철저하게 분리된 곳에 존재하는, 그래서 아무나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에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제인은 그에게는 완벽한 외부인이었다.
호엘리반이 증서를 가리켰다.
“게다가 이런 일로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루가 저를 죽일걸요.”
제인이 순간적으로 몸을 틀며 흠칫거렸다.
호엘리반이 웃었다.
“하하, 루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었나 보네요.”
“웃지 마요. 루가 농담한 게 아니라면 당신이 웃는 것도 무서워지려고 하니까요.”
“농담 아닐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당신을 다치게 할 만큼 약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제게 오도록 그냥 둔 거예요.”
호엘리반은 증서를 보며 미소를 유지했다.
기뻤다.
비어 있던 퍼즐 하나가 생각지도 못하게 맞춰져서.
프시오에게 미움받지 않아도 돼서.
호엘리반은 고개를 들고 제인에게 재차 물었다.
“신의 손, 협박받고 한 일이잖아요. 정말 억울하지 않겠어요?”
“협박이야 받긴 받았죠.”
제인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선택한 일이잖아요. 마냥 억울해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요?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보통은 이런 일을 당하면 원통하니까요.”
제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키득거렸다.
“페브리아에 아낙시오니아를 따르는 샤라는 종교가 있어요. 들어본 적 있죠?”
“네.”
“거기서 이런 일들을, 아낙시오니아가 말하길 시련이라고 불러요. 신이 사랑하는 만큼 시련도 크다고요.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제인은 경건하게 세운 손날을 허공에다가 세로로 한 획 그었다.
“지랄 마.”
그리고 그 아래에 가로로 한 획을 그었다.
“잘난 것들은 원래 고독해.”
호엘리반은 멍하니 제인을 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인이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였고, 호엘리반은 조금은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시간 괜찮나요?”
제인이 호엘리반에게 현금보관증서를 갖게 된 경위를 말했듯이, 호엘리반은 제인에게 지금까지 찾은 정보들을 전달했다.
샤의 신앙심이 페브리아 결계였다는 것.
마드리안은 더 많은 신앙심을 모으기 위해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
결계로 변환하는 매개체인 드래곤의 마석을 독점하고자 콜드리센과 앙디스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
두 나라를 집어삼킨 후에는 연합국을 압박해서 주도적으로 드래곤 마석의 유통을 금지했다는 것까지.
게다가.
“다음은 엘마뉴엘일 가능성이 크다…….”
“맞아요.”
제인은 불현듯 마드리안 교황과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영웅심리인가요.
-역할 놀이를 한다면 영웅은 따분하구나. 신이라면 모를까.
“하하하…….”
그렇구나. 그 여자는 정말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을 몰아세우며 통제하고 있었구나.
호엘리반의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앙디스인들은 전쟁을 해서라도 호엘리반이 자신들의 땅을 되찾아 주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프시오가 전쟁을 반대하고 있어요. 그래서 전쟁을 치르는 대신, 드래곤 마석을 통해서 앙디스를 독립적인 기구로 만들 예정이에요. 소속은 드호아망으로.”
제인은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수 없었다. 페브리아에 편입된 국가 중에서 독립한 나라의 선례가 없었다.
“구체적인 방법은요?”
“드래곤 마석은 사람이 주입하는 순간 사망에 이를 만큼 위험해요. 마드리안 교황은 그걸 명분 삼아서 금지했죠.”
호엘리반은 종이 한 장에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중간을 그었다. 곧이어 반쪽만 새까맣게 칠했다.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 마석은 주로 죽음, 어둠, 저주, 변환과 관련된 흑마법 중심으로 사용되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인 건 아니에요.”
그는 반대편의 흰 부분을 찍어서 가리켰다.
“변환이라는 속성은 죽음과 어둠을 경계하고 저주를 막는 것으로도 구현할 수 있어요.”
이어서 호엘리반이 말한 프시오의 계획이란 음지의 것을 양지로 드러내는 것으로, 그야말로 그녀다운 계획이었다.
“프시오는 복용이 가능한 드래곤 마석을 연구해서 완성했어요. 그렇게 마드리안 교황이 금지했던 명분을 없애버릴 예정이죠.”
제인이 짧게 웃으며 되짚었다.
“명분요.”
“네. 드호아망 마탑에서는 조만간 프시오의 연구서를 바탕으로 드래곤 마석을 통해 마법사를 양성하는 교육 과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예정입니다.”
“드래곤 마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는 거군요?”
“그렇죠. 그 틈에 마드리안 교황과 협상하는 게 목적입니다. 페브리아 교황청 내부의 드래곤 마석 존재 여부와 마법 사용을 빌미 삼아서요.”
“빌미라……. 당신에게는 협상이고 마드리안 교황에게는 협박이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증서는 연합국들의 발목을 잡기에 무척 적절해요. 이백만 프랑크, 수령하도록 하죠.”
프시오가 놓치고 있고, 호엘리반이 남겨두었던 구멍.
바로 페브리아의 연합국이었다.
“……부족해요.”
호엘리반은 제인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래를 향해있던 제인의 시선은 느릿하게 들어 올려졌다.
“계획이 부족해요. 상대가 사람 같은 사람이었으면 분명히 승산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마드리안 교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더?”
제인이 또박또박하게 힘주어 말했다.
“나쁜 년이에요.”
“…….”
“명분? 인식? 빌미?”
제인은 한참을 깔깔깔 웃었다.
건드려 봤자, 라는 듯이.
“명분을 없애요? 그 여자는 보란 듯이 또 다른 명분을 만들어 낼 거예요. 그럼 당신과 프시오는 그때마다 새로운 명분을 없앨 건가요? 언제까지요? 끝이 있을 리 없는데.”
“…….”
“교황청에서 드래곤 마석이니, 마법이니 그런 걸 사용했었다는 사실이 전부 밝혀지는 걸 두려워할까요? 전혀요!”
오히려 그럴 때를 대비한 계책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제인은 도무지 웃음을 참기가 어려워서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할 거라고요. 그것도 아주 화려하고 품격있게 말이죠. 사람들이 믿을 수밖에 없게, 유리한 방향으로요.”
그녀는 신의 손 사건을 떠올렸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제인의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녀는 그때 그렇게 빽빽하게 있던 많은 사람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마드리안 교황을 믿는 것이 의아했다.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눈치 없고 순진해서? 덜 떨진 바보라서?
아니었다.
그건 마드리안 교황이 시간을 들여서 쌓아 올린 신뢰의 산물이었다.
신뢰를 쌓아 올린 수단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하물며 그게 세뇌라 할지라도 그런 건 마드리안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믿음 외에는.
“호엘리반, 할렌에서부터 시작된 카사시아 그것도 협박 같은 협상을 목적으로 제게 도움을 청했던 거죠?”
호엘리반은 생각을 읽힌 기분이 들어서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긍정의 의미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말했다.
“마드리안 교황이 일으키는 돌림병과 전쟁은 수단에 불과해요. 우리는 그 여자에게서 수단의 목적부터 훔쳐야 해요. 그래야 협상이든 협박이든 들어 먹힐 거예요.”
“수단의 목적…….”
호엘리반이 되새기듯 말하다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신앙심.”
제인도 씩 미소 지었다.
“그래요. 사람들의 믿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