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10)화 (110/168)

110.

루는 하임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 제인을 더 꽉 끌어안으며 눈에 담았다.

“이야기할 게, 아직 더 남았나?”

“…….”

“없으면 그만 가지.”

“있어도 그냥 데려갈 것 같은데, 기분 탓이야?”

제인의 말에 루가 부드럽게 웃었다.

“기분 탓이야.”

루의 대답에 제인은 작게 도리질했다.

그리고 잠시 잊힌 한 사람.

하임은 갑자기 나타난 루의 존재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브리아는 마법이 금지된 나라였기에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하임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상황이었다.

제인은 그런 하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루에게 집에 가자고 말했다. 루가 곧바로 이동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를 따라서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표정을 갈무리한 하임이 말했다.

“주소만 내 쪽으로 보내. 재산 정리해서 바로 보내줄게. 보험금도.”

“웃기고 있네.”

제인이 하임을 돌아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당신에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나?”

“…….”

“재산은 당신 거예요. 그리고 딱 기다려요. 개 같은 교황한테서 벗어나게 해줄 테니까…… 당신은 그냥 지금까지 하던 연기나 마저 해요.”

“…….”

“나 그 연기, 좋아하거든요.”

이윽고 제인은 하임을 등지고 이동의 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시덩굴을 거머쥐는 듯한 말을 남기고서.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나한테 좋은 사람으로 살아요.”

* * *

밤늦게 귀가한 프시오는 서류 뭉텅이를 가슴에 고이 품고서 불 켜진 서재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와 달리 사뭇 긴장되어 보였다.

호엘리반은 서재로 들어온 프시오의 안색을 훑다가 읽어 내려가던 활자로 다시 눈을 떨어뜨리면서 차분하게 물었다.

“결과는?”

프시오는 끌어안고 있던 서류를 호엘리반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목이 조금 잠겨있었다.

“전원…… 무사합니다.”

호엘리반은 보던 활자에서 눈을 떼고 프시오가 가져온 서류를 한 장씩 천천히 넘겼다.

총 백여 명이었다.

조용하고 치밀하게 모집했던 임상 실험자들의 인적 사항 아래에는 드래곤 마석을 주입한 시간과 용량이 빼곡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전원 무사.

호엘리반은 침착하게 음절을 꾹꾹 누르듯이 되물었다.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

프시오는 빨개진 눈에 힘을 주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윽고 북받쳐 솟아오르는 감정들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으며 힘차게 말했다.

“네. 사망자 없이 전원 무사합니다.”

* * *

늦은 저녁 식사 중인 제인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 강아지는 바빠.”

마주 앉은 데시안이 조소가 잔뜩 깃든 목소리로 아주 느긋하게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똥강아지도 아니고 이 시간까지 어디를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나 했더니 페브리아라.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군. 다녀오기만 하면 앓아눕는 그 나라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건가?”

“…….”

“아니면 아픈 걸 좋아하나? 혹시 가학적인 게 취향이라면.”

안 돼. 저건 대답해야 해.

“아니야.”

제인이 다급하게 거듭 말했다.

“취향 아니야.”

“노력해보려고 했는데, 기분 나쁘군.”

“무슨 노력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모르고 싶으니까 절대로 설명하지 마. 노력하지 마. 그리고 기분은 왜 나빠?”

루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것만 콕 짚어서 대답하는 꼴이.”

아…….

400살 어른께서 그게 마음에 안 드셨구나.

밥이 코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제인은 접시를 깨끗하게 비워냈다. 이어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루를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대답해 주면 조금 기분이 조금 풀리려나.

“나는 네 똥강아지 맞아.”

“…….”

고기를 썰던 루의 칼질이 조용히 멈췄다. 그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나이프를 놓고 입을 가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루의 표정을 보지 못한 제인은 눈을 도로록 굴리며 그가 했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어…… 뭐냐, 그리고…… 아. 마비력을 최대로 올리고 있었어. 그러니까 결계 때문에 아플 일은 없을 거야.”

이윽고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줬다.

“꿀 찾으러 간 것도 맞아.”

현금보관증서였다.

표정을 정돈한 루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제인은 그의 재산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진 못했으나 자신이 평생 들어보지 못할 금액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페브리아에서 가지고 온 현금보관증서가 그에게는 하잘것없어 보이리라.

하지만 이건 내 꿀인데.

제인이 말없이 뚱한 표정을 짓자 그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나라에 숨겨둔 꿀은 더 없고?”

제인은 나긋한 목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진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루가 이어서 물었다.

“돈이 어디에 필요해서?”

“세실한테 주려고.”

루는 제인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가 눈을 휘며 키득거렸다.

“그 녀석 성격에 네 부채감과 금전적인 보상을 원할까 싶은데.”

“…….”

“뭐, 상관없겠지. 너는 네 마음 편하면 그만이니.”

제인은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호의와 친절마저도 빚지는 느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도 그렇지.

제인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면 좋아?”

“내가 주는 것에는 그런 부채감을 느낄 필요 없어, 제인. 그저 받고 기뻐하면 돼.”

루는 느릿하게 포도주를 마셨다. 제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은 그의 입매가 완만하게 올라갔다.

“네가 웃는 모습을 보면, 간질거리면서 부유감에 젖은 감상이 들거든.”

그의 말에 제인의 얼굴이 홧홧하게 붉어졌다. 그녀는 한껏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이내 애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어떻게, 매번 사람을 들었다 놨다…….”

루는 제인이 퍽 우스웠다.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를 가진 건 그녀였다.

어느새 루의 접시도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가 상냥하게 그녀를 불렀다.

“이리 와.”

제인은 붉어진 얼굴을 도무지 돌릴 수가 없었다.

루가 재차 말했다.

“어서.”

제인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 앉았다. 루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발그레한 뺨을 감싸고 나긋하게 물었다.

“하나 더 남아 있지 않나?”

제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의 집요함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똥강아지는 이 시간에 다닐 수밖에 없었어! 난 페브리아에서 사망 처리돼서 낮에 돌아다니는 게 더 위험해.”

루가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

루는 정말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제인은 그가 태만하지 않고 성실했다면 어땠을지 잠깐 상상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팔등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그가 나태를 좇는 데시안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루의 미소에 서늘함이 내려앉았다.

“네가 그 집에서 밀회라도 하는 줄 알았지.”

“그런 거 아니야. 증서부터 먼저 찾고 하임에게 가려고 예전 집에 갔던 건데…… 거기에서 만날 줄은 나도 몰랐어.”

“그래.”

짧은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

제인은 그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살폈다. 무엇을 물어보러 하임에게 갔는지 꼬치꼬치 캐물어야 할 차례였다.

그러나 어째선지 루는 남은 포도주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여유롭게 마셨다.

제인은 그제야 그가 하임과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너!”

루는 짜증이 베인 그녀의 말머리를 톡 잘라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자를 교황청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네까짓 게, 어떻게.

제인은 그의 조롱 가득한 시선에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끝까지 당겨 올렸다.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찼으나 성질대로 굴지 않기 위해 참고 견뎠다.

여기서 패악질을 부리면 지는 거다.

징그럽도록 사랑하는 이 빌어먹을 데시안에게 꼴사나운 유희를 주는 셈이다.

루가 나른하게 말했다.

“대답해야지.”

제인은 식탁 위에 올려진 증서를 가져와서 손에 쥐었다.

“이거 한 번 알뜰살뜰 써보려고.”

“어떻게.”

“이 증서는 페브리아를 포함한 다섯 연맹국이 세금을 조작하고 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어. 궁금하지 않아? 마드리안 교황이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내게 증서를 만들어줬을까.”

그녀의 고개가 사선으로 기울어지면서 시선이 증서에 머물렀다.

“내가 경고했거든.”

“경고?”

“응. 천만 프랑크를 달라고 했던 건 나를 이용하는 만큼 당신도 흠집 하나 정도는 각오하라는 경고. 그러니까 그 여자는 내 경고에 대한 대답으로 증서를 준 거야.”

제인이 푸흐흐 웃었다.

“내 손에 칼을 쥐여준다고 한들…… 나 같은 건 당신에게 흠집 하나 낼 수 없다고.”

제인은 일개 연구원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그조차도 아니었으며 사망 처리된 인간이었다.

각국에 위협이 될 만한 문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어찌하지 못할 터였다. 오히려 위협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쌕 웃었다.

동공에 희미한 광기가 번뜩였다.

“만약 이 증서가 호엘리반의 손에 들어가면, 그땐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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