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하임이 발을 절며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러고는 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몹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제인은 목구멍으로 무언가를 삼켰다. 그녀는 그 순간 딱 하나만을 바랐다. 목구멍으로 삼킨 게 울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길.
이어서 작은 웃음을 물었다.
페브리아에서 사는 동안 늘 그랬듯이.
“언제요?”
울음이 흘러나올 틈이 없게.
“난 언제 죽었어야 했는데요.”
“…….”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어야 했어요?”
절벽.
그 단어에 하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니면 죄책감에 못 이겨서 독으로 자학하다가? 그것도 아니면 교황에게 납치당했을 때? 내가…… 언제 죽어야 했어요?”
그는 한숨을 쉬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이어서 눈을 좁혔다.
“언제든 좋지 않았을까.”
제인은 하임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려 했다. 그가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려 했다.
하지만, 제인은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목울대가 찢어지도록 아파서.
그가 말했다.
“네게 거짓말한 적은 없어.”
“…….”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속내를 숨겼을 뿐이야. 여기까지 와서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할 순 없으니 이제는 조금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제인은 고개를 떨구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연기요…….”
끔찍하게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하임의 말대로 제인은 그에게 거짓말한 적은 없었다.
진실을 숨겼을 뿐.
그러니 하임도 마찬가지였다면 제인과 그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에게 연기해온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임은 고민하듯이 천장을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을 만큼 사랑한 사람이 있었어.”
제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이름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가 애틋한 이름을 불렀다.
“다이애나.”
“…….”
“내 마음을,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랬을 것이다.
어린 제인이 봤을 때도 다이애나를 향한 그의 눈길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그녀는 하임에게 일상적인 호의 그 이상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뒤로 그녀가 내게 남긴 미래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봤어.”
잠시 정적을 끌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궁정에 어떤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녀가 말한 꽃을 심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내게 남긴 미래는 하나밖에 없었어.”
그는 두 허벅지에 팔꿈치를 올려며 허리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떨어졌고, 그의 낮은 목소리는 더 낮은 곳으로 곤두박질쳤다.
“네가 약제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지나가듯이 했던 그 말 하나.”
제인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네가 미웠어.”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미소로.
“미워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멈춰지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자학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했어. 내가 네게 바랐던 건 약제사가 되는 거지, 행복하길 바란 게 아니었으니까.”
어린 제인에게는 하임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그녀를 미워했다고, 행복하길 바란 게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제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을 부여잡고 헛된 희망을 꿰려는 듯 중얼거렸다.
“우산…….”
“…….”
제인은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구질구질한 말인지.
“우산도 챙겨 줬었잖아요. 일부러 두고 오면 기다려서라도 비 맞지 않게 했었잖아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사소한 다정을 애정이라 여기고 구차하리만치 의미를 부여한다. 조금이라도 사랑받은 흔적을 찾아내려 애를 쓴다.
그러나 하임은 냉소적일 만큼 담백하게 대답했다.
“보는 눈이 많잖니.”
“하하…….”
그는 제인의 실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연구를 핑계 삼았던 네 자학은 말리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 하면 할수록 능력을 인정받는 훌륭한 연구성과가 되었으니. ”
“…….”
그가 또 웃었다.
“겸손을 가르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제인도 그와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은연중에 알고 있던 것이리라. 울타리라고 생각했던 하임의 존재가 사실은 가시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는걸.
그래서였구나.
악몽과 자학을 떨쳐내자마자 이전까지의 불행들이 단박에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졌던 게, 실은 울타리라고 생각한 가시덩굴을 벗어나서 그랬던 거야.
그럼에도 손끝에 어렴풋이 닿은 그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을 찌르는 가시로만 여기기에는 너무 소중한 고통이었다.
제인은 그런 인간이었다.
받은 사랑이 없어서 속이 텅 비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라는 게 샘처럼 차올랐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마음은 결핍된 애정을 부추겼다.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그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준다면 그건 주워 담지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 되리라.
다이애나를 향했던 마음이 악몽이 되어 그녀의 목을 조르고, 하임에게 주었던 마음이 가시가 되어 그녀를 찔러도 여전히 소중하듯이.
“그러니까…… 보는 눈이 많아서 연기했다는 거죠. 그 오랜 시간을.”
“맞아.”
하임이 피로한 얼굴로 밤이 깊어 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질 때였다.
“하임.”
제인이 말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이 지금 교황청 소속 약제사로 계약한 거, 그건 뭐예요? 그것도 연기예요?”
일순 하임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러나 곧바로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리를 따른 거야.”
“아! 실리!”
제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 틈새로 키들키들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실리를 따라서 할렌에 돌림병을 일으켰어요?”
“!”
세상 누구보다 약학에 자긍심이 강했던.
“당신이요?”
하임의 눈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그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역시 맞는구나.
제인은 제 예측이 맞았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꼈다. 할렌에서 발병한 돌림병은 수개월 전, 하임의 출장지였던 북부지역 요새의 돌림병과 비슷한 흐름이었다.
“당신이 작성한 출장 기록지에는 북부 요새 근처의 관목숲 유충에 의한 돌림병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사용된 약재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종류가 있었어요.”
제인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나탈리만.”
나탈리만은 통증 완화제 명목으로 많이 쓰였지만 다른 약재와 배합하고 용량을 늘리면 중독 현상 완화제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요새의 인력을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하임이 궁정에 요청한 용량은 후자에 가까웠다.
당시 제인은 굳이 왜?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언제나 현장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이론과 다를 때가 있으므로.
그러나 호엘리반의 집무실에서 자료를 보자니 다시금 의구심이 들었다.
호엘리반이 빠르게 구해준 북부지역 요새와 관련한 정보를 찾아보면서 하임이 출장 가기 전 요새 식량창고가 불에 탔던 사건을 알게 되었다.
변경이었던 그 근처에는 작은 마을조차 없어서 인적이 드물었다.
제인은 자신이 추측한 바를 설명했다.
“북부 요새에 식량을 지원하는 동안 기근이 발생했고, 병사들이 자체적으로 끼니를 해결하다가 돌림병이 발병했던 거예요.”
발병 원인을 유충으로 바꿔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알고 보니 끼니를 대신한 식품이 소지나 재배가 금지된 품목이었던 거죠?”
“…….”
“금지된 품목이 상부에 보고되면 병사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 했던 일로 처벌받게 될 테니 당신 선에서 돌림병 원인을 조작했던 거고요.”
“…….”
“그리고 그 방법으로 할렌에…… 돌림병을 퍼트린 거예요.”
교황청에서 지원해주는 식량으로 알게 모르게 천천히 돌림병을 퍼트렸으리라. 그러니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돌림병이 생겼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임이 물었다.
“다 했니?”
“제 추측에 틀린 부분이 있나요? 있다면.”
하임이 제인의 말을 담담하게 끊어냈다.
“없어.”
“해독제는 언제 풀 예정이죠?”
“곧.”
지체 없는 그의 대답에 제인이 전보다 더 선명하게 키들거렸다.
“우린 닮았어요.”
하임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찰나, 제인은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내 속이 왜 이렇게 뒤틀리고 꼬였나 했더니, 보고 자란 게 당신이라 닮은 거였어.”
하지만 제인이 진정으로 손에 틀어쥐고 싶은 건 그의 멱살이 아니었다.
마드리안 교황의 모가지였다.
-빠른 시일 안에 맹독에 적응할 다른 인간을 택할 것을.
-그러면 독에 내성이 생기기도 전에!
-죽겠지. 단지 한 명일까?
마드리안 교황이 했던 겁박의 본질은 제인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제인이 교황의 겁박에 순응했던 건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에게 벌을 주는, 자학의 연장선이었다.
“……닮았단 말이야.”
“…….”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무슨 협박을 받았길래,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운 거지?
자못 가라앉은 그의 얼굴을 본 제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저만큼이나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 제 앞에 있다는 것을.
그녀가 저도 모르게 괴로움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을 때였다. 뒤에서 차갑고 단단한 팔이 제인을 안으며 하임에게서 떨어뜨렸다.
“닿는 건 영 싫어서.”
제인이 고개를 들어서 위를 응시했다.
“……루.”
“이제는 궁금할 지경이야. 내 인내심을 얼마나 더 길러 줄 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