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08)화 (108/168)

108.

라트올을 찾아온 손님은 마석을 구매하러 온 고객도 아니었고, 그를 희롱하러 온 데시안은 더더욱 아니었다.

후자는 탐욕의 데시안의 수락 하에 벌써 와있었다.

그렇게 정체 모를 손님은 라트올에게 추태를 부리는 데시안을 보며 킥킥 웃다가 타타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이 마석장의 주인을 불러.

사실 명령보다는 홀려서 부르게 한 것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탐욕의 데시안이 마석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녀가 라트올을 희롱하던 데시안은 사멸해 있었다.

위로는 팔꿈치까지 입에 밀어 넣고 아래로는 성기를 드러낸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 꼴을 만든 불청객은 느슨하게 앉은 자세로 탐욕의 데시안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탐욕의 데시안은 불청객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현혹의 데시안, 루.

그는 마왕이 편애하는 데시안으로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였다.

얼마 전에 봉인에서 풀렸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긴 왜?

탐욕의 데시안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가 라트올을 가리켰다.

-권속 계약을 풀도록 해.

-…….

탐욕의 데시안은 어느 틈엔가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루가 재차 말했다.

-계약, 풀어.

탐욕의 데시안은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공포와 분노에 몸을 떨며 머뭇거리자 루는 기다리기 지겹다는 듯이 그녀를 다시 홀렸다.

홀린 채 라트올과의 계약을 푼 그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구석에 머리를 박으며 히히히 웃어댔다.

라트올의 지옥은 그렇게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그가 나른하게 불렀다.

-라트올.

그리고 겉옷을 벗어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라트올에게 덮어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죽여줄까.

라트올은 말없이 떨기만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탐욕의 데시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존재라는 것을.

그의 마력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죽여줄까, 라는 그의 달콤한 목소리만이 귀에 맴돌았다. 라트올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굵은 눈물을 툭툭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저 좀…… 죽여주세요……. 제발…….

-말고.

-……?

-아름다운 것들은 함부로 죽으면 안 돼.

라트올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안에 살기가 가득해서 이대로 데려가면 골치 아파. 앞으로 네가 세공해야 할 마석에는 그런 불순물이 묻으면 안 되거든. 그러니 지금 말해.

그가 다시 물었다.

-죽여 줘?

라트올은 그가 구석에서 머리를 박으며 웃고 있는 탐욕의 데시안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라트올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벽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탐욕의 데시안 역시도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만들었지 않은가.

라트올은 두려웠다.

-저, 저를 데려가서 어쩌시게요…….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가? 아니면 눈만 먼 게 아니라 귀도 먹은 건가?

-…….

-앞으로 마석 세공을 할 거라고 말했을 텐데.

-다른 건요…….

-아주 재미있는 걸 만들어 볼 생각이지.

라트올은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덜덜 떠는 그를 보던 루가 조금 귀찮은 듯 머리를 넘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나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시키지 않아. 약속하지.

데시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건 데시안의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그 말에 떨림이 어느 정도 멈춘 라트올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죽여 달라고.

여기서 제일 못생긴 새끼 빼고,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여 달라고 말했다.

루는 타타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그러지, 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루는 메 데시안 둘을 제외하고 모두를 홀려서, 죽을 때까지 스스로 혀를 뽑거나 머리를 박거나 칼을 수십 번 찌르게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멸은 탐욕의 데시안이었다. 그녀는 몸에 불을 붙이고 숨이 다 할 때까지 고통스럽게 뛰어다녔다.

괴로움에 찬 그녀의 목소리는 라트올을 살의와 살기를 녹아내리게 했다.

라트올은 그렇게 탐욕의 데시안과의 권속 계약이 풀었고 그녀를 죽였으며 심지어 명계 밖으로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벅차서 어지러울 지경이건만 루는 약간의 시력까지 주면서 몽말로 만든 안경을 가져와 씌워 주었다.

루는 라트올에게 빛나는 세상을 준 것과 같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걸 만들었다.

물론 그 재미는…… 루에게만 한정된 재미였다. 그가 만드는 녹니스는 명계부터 연옥, 그리고 천계까지 퍼트릴 약이었다.

이런 걸 만든다고? 제정신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를 위해서 마석을 세공했다. 그러다 하루는 루에게 권속 계약은 언제 하느냐고 물었다.

루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또 하고 싶나? 그렇게 당해놓고.

-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라트올은 당연히 계약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주고 아무런 계약을 하지 않는다니, 그게 더 이상하고 무서웠다.

루가 말했다.

-데시안과 메 데시안의 권속 계약은 인간과의 계약과 달라. 주인이 사멸하면 수족도 함께 사멸해. 알고 있을 텐데.

-계약을 안 하면 제가 도망갈지도 모르잖아요…….

루가 웃었다.

-가.

-제 말은 계약을…….

-안 하는 게 좋아.

라트올은 이어지는 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봉인될지도 모르니.

루가 봉인에서 풀렸다는 소문은 이미 명계에 파다했다. 그런데 다시 봉인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 루가 말을 덧붙였다.

-어떤 미치광이한테 잘못 걸려서 말이지.

라트올은 루가 말한 미치광이가 그레데엘므라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둘 사이의 맹약을 알게 된 그날, 라트올은 결심했다.

눈과 자유를 준 그를 죽을 때까지 주인님으로 섬기겠다고. 아름다운 비극을 관망하는 자리에 반드시 앉혀 드리겠다고. 그와 그의 결말을 위해 복종하겠다고.

라트올은 그 오래된 다짐을 상기하며 제인이 정신 나가 있던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매일같이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작업만 했다.

현혹하고자 하는 본능과 욕구를 온 힘을 다해 억누르며 인내하는 주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잠도 자지 않았고 웬만하면 먹지도 않았다. 대게는 식탐을 견뎠으며 참기 어렵다 싶으면 데코토들에게 간식거리를 부탁했다.

그렇게 녹니스만 제조했다.

그러는 사이, 주인님이 사랑하는 인간 여자는 미치지 않고 마법사 관문을 넘었다.

어느덧 3월.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정원에 서서 루의 등을 바라만 보던 라트올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인 기다려요?”

“응.”

“낮에 호엘리반에게 갔잖아요. 늦을 거라는 말 따로 없었어요?”

“응.”

라트올도 의아했다.

제인은 시간 약속만큼은 철저했다. 특히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못할 땐 언제나 루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지금 어디 있는데요? 목걸이 고쳐줬으니 아실 거 아니에요.”

“알지.”

이어서 침묵이 맴돌았다.

라트올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면 데리러 가세요.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요.”

루는 느슨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미소에 그다지 여유가 많지 않다는 걸 라트올은 알고 있었다.

“어서요.”

“…….”

“마왕님께서 다시 부르신데다 연옥도 다녀오셔야 하잖아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루.”

“…….”

“겨울이 끝나가고 있어요.”

“…….”

루의 웃음이 희미해져 갔다.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레데엘므가 짚어준 봄의 끝자락까지 함께.

* * *

그 시각, 페브리아.

제인은 벽에 손을 대고서 어딘가 낯부끄러운 암호를 중얼거렸다.

“9월 하순의 무른 무화과…….”

삽시간에 빛이 일더니 한 번 본 적 있는 문고리가 나타났다.

안에는 현금보관증서가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제인은 증서를 품에 넣고 문고리를 밀어서 닫았다. 벽이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가자 긴장이 풀리는 듯 등을 대고 기대어 섰다.

달빛에만 의존한 방안은 어슴푸레했다.

제인은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집 안을 훑었다. 떠났던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위를 쓸어내리던 그녀는 섬찟함을 느꼈다.

반년이 넘도록 비운 집이었다.

그러나 먼지는 고작 며칠 비웠던 것처럼 적었다.

그때 조용한 적막 사이로 발소리가 들렸다. 독특한 발소리였다. 제인은 숨을 들이켰다.

문밖에서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가 이어졌다.

찰칵.

문고리가 돌려졌을 때, 한쪽 다리를 끄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남자는 책상 옆에 서 있는 제인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인……?”

“그렇지 않아도 당신께 가려던 참이었어요.”

“…….”

“이 집, 제가 없는 동안 당신이 관리했어요?”

하임은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제인을 보았다. 불이 켜지는 순간 작게 축소되었던 그의 동공은 원래대로 바뀌어 있었다.

웃지 않을 때면 냉랭했던 그 눈으로.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당신 명의 집이니까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죠. 관리하든 말든.”

하임이 낮게 중얼거렸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

제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임을 살폈다.

총기를 잃은 눈동자, 거뭇한 눈 밑, 푸석한 피부와 머리카락,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까지.

하임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그녀가 물었다.

“죽길 바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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