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07)화 (107/168)

107.

제인이 물었다.

“어떤 시선으로 보든 상관없다는 건가요?”

“제 손으로 직접 선택한 드호아망의 집권자 역할도,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도 모두 맞는 말이라서요.”

제인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드호아망의 집권자라면 방어적인 태세를 고수할 테고 앙디스인 입장이라면 그 반대로 움직이리라 예상하고 던졌던 질문이었다.

의도에서 벗어난 호엘리반의 대답에 제인은 질문을 바꿨다.

“옴푸푸스를 종식시킨 게 저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죠?”

“말씀드린 대로 주시하고 있었으니까요.”

“……목적은요?”

“하하, 제인. 페브리아와 마드리안 교황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 국가나 단체, 기구를 찾는 게 더 어렵지 않나요? 있다면 안일하다고 봐야겠죠.”

호엘리반은 제인의 어떤 질문에도 여유롭게 대답했다.

제인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며 마드리안 교황과 마주한다면 누가 더 빨리 뒷골이 당겨질지 보고 싶네, 라고 생각했다.

“말씀하신 증상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워요.”

제인의 말에 호엘리반은 빙그레 웃으며 엄지와 중지로 딱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집무실 안의 새하얀 벽면 하나가 서서히 투명해지면서 서류와 서적으로 빼곡하게 차 있는 책장이 드러났다.

“페브리아에 관한 모든 자료예요. 카사시아에 관련된 사항은 하단에 정리해 뒀어요. 더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쪼그려 앉은 제인이 책장의 하단 부분을 가리켰다.

“돌림병 자료는 이 칸이 다라는 말씀이죠?”

“네. 사실 아무래도 당신이 직접 발생지역으로 가서 원인을 찾아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호엘리반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움직이는 건 어려울 거라고 봐요. 페브리아에서 당신 앞으로 실종 사망서가 발행되었잖아요”

“실종 사망서…….”

제인이 작게 중얼거리다가 픽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호엘리반이 프시오에게 전해 준 서류라고 알고 있었다.

그때 호엘리반이 말없이 웃고 있는 제인에게 물었다.

“혹시 도망칠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나요? 그 서류가 발행될 거라고.”

“조금은요.”

제인은 마드리안 교황에게 납치당한 채, 시신으로 위장하고 도망쳤다. 후에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궁정을 압박해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리라 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건 호엘리반이었다.

옴푸푸스도, 실종 사망서도 모두 뒷조사를 통해 알게 되었을 텐데 그러한 부분은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사람 좋은 얼굴로 말하는 게 제인은 은근히 꼴 보기 싫었다.

그녀가 퍽 예의 바르게 말했다.

“뒷조사하신 김에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얼마든지요.”

와.

제인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그의 친절함에 열렬한 박수를 보낼 뻔했다. 당신 정말 재수 없군요? 하고.

이내 고개를 젓고 차분하게 말했다.

“궁정에서 계약한 사망 보험금이 있어요. 하임 바트르센 앞으로 제 재산과 보험금이 문제없이 수령 되었는지 알아봐 주실래요?”

호엘리반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로 정중하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네. 수령되었어요.”

“하하…….”

제인이 기어이 실소를 터트렸다.

“뒷조사, 치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제인은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호엘리반은 꽤 재수 없는 인간이 분명하다고.

제인은 책장 앞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호엘리반의 만류에도 제인은 내내 책장 앞의 바닥에 앉아있었다.

호엘리반은 방석을 건네주며 이것까지는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제인은 방석을 받아서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책장에 손을 뻗거나 자료를 넘길 때를 제외하고는 바윗덩어리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서 활자에 집중했다.

돌림병 발생지는 할렌.

제인의 기억에 따르면 페브리아의 외각에 위치한 할렌은 서쪽으로는 고도가 높은 산지가, 동쪽으로는 바다가 가로막힌 지형이라 매년 겨울이면 재해에 가까운 폭설이 봄이 올 때까지 이어지는 곳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돌림병 발생하기 시작했던 1월에는 바다로 나갈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린 눈 때문에 고립되는 날이 길어졌다.

기근으로 이어질 무렵에는 교황청 지원으로 겨우 식량 문제에서 벗어났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인은 돌림병의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위화감이 들었다.

할렌에서 시작된 경로는 마치 수도를 도착지로 정하고 발자국을 찍어낸 것 같았다. 발병 원인을 추적하면서 이런 작위적인 느낌을 받은 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제인은 차분하게 주요 핵심들을 나열해 보았다.

고립된 상황, 기근의 위기, 습진과 고열이 동반되는 돌림병…….

“……호엘리반.”

조용히 업무를 보던 호엘리반이 고개를 들었다.

“필요한 자료가 있어요. 최근 일 년간 페브리아의 북부지역 요새에 관련한 기록물과…….”

사선으로 시선을 흘리던 제인이 다시 그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하임 바트르센의 업무 관련 정보요.”

호엘리반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북부지역 요새는 지리적으로 할렌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페브리아의 주요 요충지였다.

게다가 카사시아 돌림병 조사에 그녀의 보호자였던 하임 바트르센의 정보가 필요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며칠 걸려요.”

“아뇨. 최대한 오늘 검토하길 원해요.”

호엘리반이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자 제인이 턱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나요?”

* * *

라트올이 부엌에 들어오자 옹기종기 모여있던 데코토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데코토들은 일렬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 너머에는 까만 밤 아래, 루가 홀로 서 있었다.

“제인은?”

데코토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트올은 작게 한숨을 쉬며 바깥으로 나갔다. 곧이어 루의 등 뒤에 선 라트올은 돌연 인상을 구겼다.

이 세상 공허란 공허는 모두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알까.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인 데시안이 사실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있는지. 현혹의 데시안으로 태어나 그것을 족쇄처럼 여기며 살아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라트올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루의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루를 만나기 전, 명계에 묶여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어머나, 네가 라트올이구나? 소문대로 정말 예쁘게 생겼네. 마석도 잘 다룬다며?

그를 찾아온 건 탐욕의 데시안이었다.

탐욕의 데시안은 라트올을 보자마자 갖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탐나는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시안이었다. 그러니 늘 해오던 방식대로 라트올을 손에 쥐었고, 탐욕의 데시안은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금세 흥미를 잃었다.

라트올은 주인님의 태도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누가 주인이든 상관이 없었다.

마석을 다룰 수 있는 생활이면 그걸로 족했기에 그녀가 소유한 마석장의 수족으로 제 몫을 다했다.

애초부터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군가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완벽함에 수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탐욕의 데시안은 라트올의 미모를 구경하러 온 다른 데시안들을 보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라트올을 처음 봤을 때처럼 탐욕스러운 눈을 빛냈다.

-쓸모가 많겠어.

언젠가부터 라트올의 하루는 반으로 쪼개졌다. 하루의 반은 마석장에서 마석을 다루었고, 나머지 반은 족쇄를 차고 데시안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쪼개져 있던 하루는 점차 온전한 지옥으로 변모했다. 라트올이 마석을 다루는 시간까지 데시안들이 찾아와서 희롱을 일삼았다.

수치에 몸을 떨던 라트올이 주인에게 반항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만히 있던 마석장 동료들의 목이 맥없이 날아갔다.

탐욕의 데시안이 소유한 마석장에는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수족이 들어왔고, 사멸하기를 반복했다.

그곳은 명계였으나, 라트올에게는 지옥이었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목숨마저 주인에게 권속 되어있던 그는 죽음까지도 그녀에게 구걸해야 했다.

탐욕의 데시안이 웃었다.

눈이 보이니 더 끔찍하겠구나, 하고는 목숨이 아닌 시력을 앗아갔다. 라트올은 육체와 정신에 이어서 빛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다 타타라는 이름의 메 데시안이 왔던 날.

라트올은 반항하기를 멈췄다.

-넌, 네 할 일 해.

타타가 라트올의 뜻 모를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타는 그가 가엾고 안타까워 몇 번이나 앞에 나섰고, 그만큼 셀 수 없이 죽을 뻔했으며, 그때마다 라트올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넌, 네 할 일 해.

하루는 타타가 분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이 자식아! 내 할 일이 뭔데!

고함을 쳐대는 타타와는 달리 라트올의 어조는 듣기 괴로울 만큼 담담했다.

-여기서 안 죽는 거.

-…….

-날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 그럼 네 모가지 떨어지는 소리, 내 귀에 들리게 하지 마.

그대로 주저앉은 타타는 펑펑 울면서 있는 X발 놈이라며 욕을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트올은 타타가 분류하던 마석을 손의 감각으로 살폈다.

-X발 놈보다 마석을 못 다루면 나는 뭐라고 욕해야 해? 대체 분류 기준이 뭐야? 네 손때가 얼마나 묻었나, 뭐 그딴 거야? 어디서 일 못 하는 법이라도 배웠어? 그게 아니면 어떻게 일을 이렇게까지 못할 수 있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타타가 콧물을 들이키고 말했다.

-……그냥 개새끼라고 해라. 네 잔소리보다는 욕이 나으니까.

시간이 흘렀다.

라트올은 하루하루 수치를 감내했고, 타타는 그의 곁에서 이를 악물고 모가지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왔다.

-누가 라트올이지?

느긋하고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라트올과 타타를 번갈아 보다가 두꺼비처럼 생긴 타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고 묻기에는 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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