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06)화 (106/168)

106.

그 사이 제인은 환영과 함께 무의식의 영역에 도착해 있었다.

환영이 매듭이 엉켜있는 끈 하나를 가리키며 “여기가 내 자리야.” 하고 말했다.

제인은 쪼그려 앉아서 끈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무의식의 영역에서부터는 세실의 목소리가 제인에게 닿았다.

세실은 위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설을 참아내기 위해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쉰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하아…….”

그러나 깊은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실?”

“너…… 무슨 생각이니……?”

제인은 거의 매일같이 세실과 수련해왔기에 그녀의 거친 호흡마다 깃들어 있는 뜻을 대강 알아들었다.

즉, 망할 놈의 꼴통 새끼야, 생각이라는 게 있니? 라는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제인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매듭이요, 안 자르려고요.”

“오, 그래. 안 자르면? 더 묶으려고 그러니? 리본처럼? 그것참 예쁘겠다.”

세실이 화가 많이 났네.

제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틈에 환영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제인은 쉿, 하면서 말문을 막고 끈의 매듭을 요리조리 관찰했다.

“세실. 매듭은 회복력으로는 회복이 안 될 정도로 끈이 꼬여서 정신적인 고통을 유발하는 거잖아요?”

“그래. 그걸 아는 새끼가 지금…….”

세실이 다시 심호흡했다.

그 틈에 제인이 얼른 설명을 이어갔다.

“엘마뉴엘에 갔었을 때 펠드툰 아저씨께서 설명해 주셨어요. 고통의 매듭을 잘라내면 그 부분의 기억을 잃는다고. 그렇게 아픈 기억을 없애는 게 치유라고요. 그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제인이 의뭉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억을 잃기 싫으면?”

“…….”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그게 소중한 거면 어떡하지?”

“…….”

세실은 잠시 침묵했다.

마법 학계에서는 정신적인 고통을 유발하는 매듭은 잘라내야만 한다고 판단했고, 세실 역시 정신계 치유 마법사일 때 동의했었다.

열이면 아홉은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 했기에.

그러나 제인은 나머지 하나를 말하고 있었다.

제인이 계속해서 생각을 피력했다.

“무언가를 연상해서 매듭을 자를 수 있다면요, 세실. 자르는 거 외에 다른 걸로도 매듭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서?”

제인은 입가에 미소를 물고 있었다.

“마비요.”

“뭐?”

놀란 세실의 목소리와 달리 제인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고통의 매듭이 가지는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통증을 일으킨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회복력만으로는 회복이 불가하다는 거예요.”

“너 설마.”

“그러니까 자르지 않아도 통증을 느낄 수 없게 매듭을 마비시키는 거죠.”

제인의 말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너 마비력을 사용하려는 모양인데, 마비력은 회복력처럼 연상할 수 없어. 연상하지 않은 마비력을 그대로 발산하면 엉킨 매듭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무의식 끈들까지 거의 다 날아가 버릴 거다. 고로, 불가능해.”

“마비력 아닌데.”

제인이 작게 웃었다.

“마비되는 독을 연상하는 거예요. 회복력으로.”

“……!”

“세실이 사용하는 마취 마법은 일시적이라 시간이 지나면 풀리지만 회복력의 연상은 영구적이잖아요. 도끼로 찍어 내리든 칼로 끊어내든 매듭에 잘린 단면이 다시 생성되지 않는 것처럼요.”

제인이 엉킨 매듭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끈을 보면 위아래는 멀쩡해요. 중간에 엉킨 매듭만 독으로 마비시키는 거예요. 그럼 기억은 잃지 않으면서 통증도 없을 것 같은데, 어때요?”

“…….”

잠자코 있던 환영이 옆에서 작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난 찬성.>

제인과 환영이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세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물었다.

가능성, 있지 않나?

그러고는 자신이 깨달았던 진리를 되새겼다. 이 세상 무엇도 완벽한 것은 없으며, 무엇이든 맹점이라 불리는 모순의 틈이 있다.

그때 불변의 진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제인이 또 다른 맹점을 찾은 건지도 모른다고.

“해 봐.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하는 걸 되게 만드는 거…….”

이어지는 세실의 목소리가 몹시 유쾌했다.

“기분 끝내주거든.”

* * *

삼 일 후.

목걸이를 고친 제인이 가장 먼저 이동의 문을 연 곳은 드호아망 마탑이었다.

그녀는 호엘리반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서 그가 건네주는 마법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정신계 치유 마법사를 증명하는 증명서와 상징물인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제인은 헤벌쭉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고 하나씩 살폈다.

특히 회중시계는 프시오가 언젠가 빌려주었던 것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드호아망의 화려한 문장이 새겨진 매끄러운 겉면은 반질거리고 빛났으며 시계 안쪽에는 제인의 이름과 정식 마법사로 등록된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날짜를 가만히 보자 벅찬 감정이 일면서 관문을 넘었던 그 순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해 봐.

제인은 그 말에 마취제로 많이 사용되는 독초인 살레만을 연상한 뒤 매듭 부근을 정교하게 마비시켰다.

이어서 오랫동안 무의식의 영역 이면에 있던 환영을 깨끗하게 정화했다.

<축하해. 이제 악몽과 몽유병에 시달릴 일은 없을 거야. 뭐, 데시안과 계약해서 지금도 시달리고 있진 않지만 말이야. 생각하니까 또 괘씸하네.>

-와.

제인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학을 뗐다.

-내가 더 괘씸하거든? 몽유병도 네 짓이었어?

그런 제인과는 달리 환영은 킬킬거리며 본래 있던 매듭으로 되돌아갔다. 희미하게 사라져가던 웃음 끝에 마지막 인사가 들려왔다.

<고마워.>

그 순간.

제인은 자신의 마음의 문 앞으로 돌아왔다.

문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가는, 어둠만을 토해내는 폐허가 아니었다.

굳건하고도 화려한 개선문을 연상케 했다.

아치형의 통로에는 빛의 장막이 넘실거렸고, 가장자리마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를 상징하는 바람 무늬 장식이 정교하게 새겨진, 무척이나 근사한 문이었다.

제인은 그렇게 육체의 눈을 떴다.

관문이 끝나 있었다.

그 이후.

제인은 세실에게 오만 욕을 들어야 했다. 만약 상처가 무의식을 전염시켰으면 어쩔 뻔했냐,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아냐, 하마터면 진짜로 병신 새끼가 될 뻔했다 등등.

제인은 어떤 욕이든 달게 들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역시 기분이 끝내주었으므로.

그러다 그녀한테서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고맙다.

그것도 연달아서.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줘서.

-…….

-잘했어.

침묵이 맴돌았다.

제인은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알았냐고, 자신은 처음부터 당신이 틀려먹을 줄 알았다고.

세실이 웃으면서 제인의 뒤통수를 거나하게 때렸다.

제인은 그때가 떠올라서 혼자 키득거렸다.

“제인.”

맞은 편에 앉아있던 호엘리반의 부름에 제인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뇨.”

호엘리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친절한 태도로 설명을 이어갔다.

“증명서나 상징물이 없어도 당신이 정식 마법사라는 사실은 변함없어요. 하지만 마법사 세계에서는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증표를 가지고 있는 편이 안전해요.”

“네.”

호엘리반은 정신계 치유 마법사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피폐해진 마법사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뿐이랴. 관문을 넘고 나서도 충격이 지속되는 사례들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제인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제인이 그런 사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세실이 당신 걱정을 많이 했어요.”

“네에…….”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네에…….”

호엘리반 역시 이만저만 걱정한 게 아니었다. 그의 눈에 제인은 프시오의 저주를 풀어 줄 소중한 마법사였다.

호엘리반은 당장이라도 제인에게 프시오의 저주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프시오가 자신이 얘기하기 전까지 입 다물고 있으라고 수차례나 경고했던 터라 혀뿌리까지 차오르는 말을 억지로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인이 회중시계를 상자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호엘리반과 마주 앉아있는 게 아주 편하지만은 않아서였다.

“아뇨.”

제인이 멈칫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호엘리반은 제인과 가장 나누고 싶은 대화 주제를 삼켜내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께 자문받고 싶은 게 있어요.”

“자문……이요? 제게요?”

제인은 솔직히 호엘리반이 매우 껄끄러웠다.

하지만 프시오에게 소중한 사람인데다 드호아망에 온 제게 신분증과 도서관 출입증을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했으니 도움을 바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자문이라니, 너무 거창한 단어 선택이 아닌가.

그때 호엘리반이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페브리아를 주시하고 있었어요.”

“!”

페브리아.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제인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그에 반해 호엘리반은 전과 다름없이 온화하게 말했다.

“현재 페브리아에 외각에서부터 수도까지 카사시아라고 불리는 원인 불명의 돌림병이 번지고 있어요.”

“……발생 시기는요?”

“오늘 기준으로 약 두 달 정도 되었어요. 초기 증상은 단순한 피부 습진이지만 보름이 지나면 극심한 고열을 앓아요.”

제인은 눈썹을 문질렀다.

“증상이 그게 전부인가요?”

“드물게 청력이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

“약제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옴푸푸스를 단독으로 종식시킨 이력이 있다고 들었어요. 도와주지 않을래요?”

“하나만 물을게요.”

“열 개, 스무 개라도 좋아요.”

여유로운 그의 대답과 달리, 제인은 가볍지 않은 질문을 하려는 듯 무겁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지금 이 부탁이 드호아망 집권자로서 인가요? 아니면…… 앙디스인으로서 인가요.”

“달라지나요?”

“시선이 달라지면 전달하는 정보도, 해석하는 의미도 달라지기 쉬우니까요.”

“아. 그렇군요.”

호엘리반이 앞으로 쏠려 있던 상체를 소파 뒤로 물렸다.

그리고 몹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보고 싶은 쪽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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