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제인은 계속 사과했다.
네가 찾아오는 밤이 너무 괴로웠다는 말 대신 너를 기억하지 못해서, 너를 잊으려고만 해서, 그렇게 결국 잊어버려서 미안하다고.
그때, 환영이 작게 웃었다.
<용서해 줄게.>
천천히 손을 뻗은 괴물이 웃는 낯으로 제인의 은빛 머리카락을 한 움큼 거머쥐었다.
<나랑 이 지옥에서 같이 있어. 영원히. 그럼 용서해 줄게.>
제인이 고저 없이 말했다.
“싫어.”
환영은 입을 벌리고 제인을 보다가 손에 거머쥐고 있던 제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요하고도 사납게 물었다.
<또 나를 혼자 두려고?>
“아니.”
제인은 조급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얽혀있는 괴물의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그녀가 초조해하지 않자 환영도 쓸데없이 긴장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쥔 환영의 손이 스르륵 풀어졌다.
“나랑 같이 가자. 네가 있던 곳으로.”
제인이 손을 내밀었다.
“네 매듭으로 날 데려가.”
환영은 제인의 손을 빤히 보았다.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괴물은 순간적으로 날 선 눈빛으로 제인을 훑으며 기분 나쁜 조소를 띄웠다.
<내가 있던 매듭을 잘라낼 거잖아.>
“…….”
<없애려 하는 거잖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는 넌데. 나를 잘라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거잖아.>
“사라지기 싫어?”
<싫어.>
“……그럼 자르지 않을게. 약속할게. 그러니까 네가 있던 매듭으로 데려가.”
<네가 무슨 수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괴물은 제인을 가만히 보았다. 유충의 속을 관찰하듯이, 가만히. 동시에 수만 가지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모습이었다.
괴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안 돼.>
제인이 괴물을 부르려고 했으나 이어지는 괴물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착각하지 마. 넌 아직도 날 똑바로 안 보고 있어. 내 시작이 죄책감이라고 생각하지? 그거 아냐.>
“……뭐?”
<내가 정말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너는 지금도 모른다고.>
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초점 없는 괴물이 초연히 말했다.
<나를 똑바로 봐.>
흔들리던 제인의 눈동자가 멍하게 괴물을 응시했다.
제인은 혼란스러웠다.
이 심해에 갇힌 괴물은 다이애나를 향한 죄책감에서 비롯하여 원망이 되고, 그 원망이 증오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죄책감이 아니라면.
그럼 대체 뭐지?
기억해내려 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자 영원히 생각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물살처럼 밀려 들어왔다.
떨려오는 손끝.
다시 부서지고 무너지는 문.
느낄 수 있는 감각은 그것이 전부였다.
제인의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져 갔다. 심해 속,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코와 입에서 불규칙하게 나왔고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바둥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순간 버둥거림이 멈춰졌다. 제인은 이미 더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괴물이 어둠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흑으로 덧칠된 심해.
그곳에 고립된 제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오직 단 하나였다.
공포.
제인은 눈을 감아버렸다.
가라앉는 이 순간이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영원할 것만 같은, 질식에 가까운 두려움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눈을 감아버리는 것 외에는.
그때 물방울과 물결 소리로 가득한 먹먹한 귓가에 파동 같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제인, 숨 쉬어.
언젠가, 바다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손끝이 움찔했으나 가위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제인은 불쾌한 감각에서 벗어나려 미친 듯이 내면의 눈을 뜨고자 했다.
-제인, 숨 쉬어.
한 번 더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
제인은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눈을 번쩍 뜨고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폐 안에 가득 찼던 공기 방울들을 뱉어내자 다시 호흡이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러나 힘이 쭉 빠졌다.
어둠은 여전히 두려웠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루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기 전까지는.
-제인, 무언가 숨이 막히도록 두려울 때면.
너는 어째서.
-나를 떠올려.
어째서 나를 매번 구할까.
-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을 기억해.
이토록 애틋하게.
그 순간, 제인의 손바닥에 소용돌이 같은 물살이 일면서 손금을 타고 광활한 빛을 내뿜었다.
9할의 회복력이었다.
빛이 끝없이, 끝없이 퍼져나갔다.
이윽고 까마득한 심해를 빠르게 밀어내며 빛의 장막을 만들어 냈다.
그 안으로 환영이 유일하게 허락된 존재처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제인은 무언가를 깨달은 시선으로 환영을 응시했다.
증오 이전의 원망은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 이전에는…….
“너, 그리움이었구나.”
다이애나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처음으로 곁을 내어주고 마음의 문을 열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
<…….>
제인 앞에 사뿐히 선 환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동공에 또렷한 초점과 맑은 이채가 반짝이고 있었다.
환영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었다.
제인이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감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팔짱을 낀 환영이 퉁명스레 말했다.
<내 이성이 등신 새끼는 아니라서 다행이네.>
“…….”
<뭐야, 기분 나쁘게. 감개무량하기라도 했어?>
제인은 환영의 오만방자한 행동거지와 불량한 눈빛, 한 대 치고 싶게 만드는 빈정거림에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잘근거리려다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제인이 대답했다.
“했나 본데.”
<재미있네. 그새 감성적으로 변했나 봐?>
“…….”
<감개무량할 시간 줄 테니까 적당히 감상해. 끝나면 말하고.>
환영은 귀를 파다가 지루한 표정으로 새끼손톱을 후 불었다. 그 모습을 본 제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저 정도라고?
내가 저 정도로 재수 없고 꼴 보기 싫다고?
“그…… 볼장 다 봤다는 태도는 뭐야?”
<그럼? 날 기억해줘서 고맙다, 엉덩이 두드려주면서 안아주기라도 해야 해?>
“…….”
<내 이성이 언제부터 신파극을 좋아했담?>
아까 날 붙잡고 울고불고 난리 친 건 넌데.
그렇게 빈정거리려던 제인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난 말이야.>
그때 환영이 고개를 들어서 제인이 펼쳐놓은 끝없는 빛의 장막을 물끄러미 보았다.
<네가 날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해 주길 바랐어. 나를 부정하지 않기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어. 내가 바란 건 그게 전부야.>
그러다 다시 제인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요한 시선이었다.
<여기서 같이 있자고 한 건 억지 좀 부려 본 거고.>
환영이 키득거렸다.
<물론 지금도 네 안에서 사라질 생각은 없어.>
“지독하네.”
<이게 너야.>
고개를 주억거리던 제인이 물었다.
“원래 어디 있었어?”
<무의식.>
환영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곳에 있던 마음이자, 기억이고, 그리움이야.>
사랑의 묘약을 풀기 위해서 정신계 관련 마법 서적을 계속 다독했던 제인은 환영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그리고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무의식은 내면의 공간 중 하나다.
그 공간 안에는 의식에 머무르지 못한 감정과 사고가 끈의 형태로 존재했다. 마법 학계에서는 명료하게 ‘기억의 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숫자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기억의 끈은 하나쯤 잘려 나갔다고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치유 마법사들은 회복되지 못할 만큼 얽혀버린 고통의 매듭을 가지치기하듯이 끊어내는 사명을 지닌 자들이었다.
-도끼를 떠올려라, 도끼!
-도끼로 고통의 매듭을 끊어내야 한다!
-크고 날카로운 도오오끼이이!
제인은 귓가에 울리는 펠드툰의 도끼 타령을 털어내려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환영에게 다가갔다.
“돌아가자. 네가 있던 매듭으로.”
* * *
세실은 아연실색했다.
안내자로서 크나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며,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인이 환영과 함께 있던 공간은 무의식의 이면 영역이었다.
그 영역에서는 안내자인 세실의 목소리가 제인에게 닿지 않기에 어떤 안내도, 조언도,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도움?
도움은 고사하고 욕지거리조차 못 해서 뒷골이 당겨질 지경이었다. 세실은 정석에서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제인의 관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크게 복잡하지 않다.
하나, 무의식의 이면에 있는 상처를 마주한다.
둘, 상처를 회복력으로 ‘정화’해서 ‘소멸’시킨다.
셋, 상처의 소멸과 동시에 열리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가서 싹을 잘라내듯 고통의 매듭을 벤다.
세 가지 단계를 넘기면 관문이 끝난다.
세실과 펠드툰은 제인이 관문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제인의 마음의 문은 자신의 상처를 마주 보기에는 버거울 만큼 무너져 있었으므로.
하지만 제인은 두 번 만에 상처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렇게 첫 번째 단계를 무사히 넘겼을 때까지만 해도 세실은 이렇게 복장 터지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가자. 네가 있던 매듭으로.
상처를 소멸하기는커녕 그걸 데리고 무의식의 영역으로 가다니! 그건 전쟁 시 적군에 전염병을 퍼트리는 일과 진배없었다.
세실은 뭍으로 나온 붕어가 빠끔거리듯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자르지 않을게. 약속할게. 나를 네가 있던 매듭으로 데려가.
지랄하고 있네, 네가 무슨 수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야 이 꼴통 새끼야, 그러니까 네가 무슨 수로!
세실은 당장이라도 제인에게 달려가서 육체의 눈을 뜨게 하고 싶었다. 멈추라고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내자로서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관문 안내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떤 학술이나 연구, 서적에서도 사례로 본 적 없는 상황에 던져진 가여운 안내자.
세실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인의 무의식 영역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