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세실은 제인을 만류했다.
-무너진 정신이라는 건 그렇게 빨리 회복되는 게 아니다. 너무 일러.
-세실.
그러나 제인은, 그 빌어먹을 놈의 제자는.
-이건 자학도, 객기도 아니에요. 제 안의 저는 너무 오래 혼자 있었어요. 아주 깊고 어두운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요. 이 순간까지도요.
기어코 스승의 만류를 꺾었다.
-혼자 내버려 둬요?
세실은 제인이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그때였다.
루가 세실의 상념을 깨우듯 물었다.
“제인의 관문에서 뭘 보고 들었지?”
“……물어보는 투를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루는 웃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세실의 말대로 그는 이미 제인에게 낱낱이 들었다.
그는 제인이 보고 들은 것에서 괴리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심산이었다. 만일 괴리와 모순이 크다면 이번에도 관문을 넘기는 어려우리라.
세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요.”
이윽고 몸을 일으켜 파탐을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흡입한 세실은 다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비탄이 깃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와달라는 말도 못 하고, 손도 내밀지 못했던 길고 긴 시간. 그렇게 혼자 어두운 그림자를 키워낸 시간.”
세실은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낮은 숨을 길게 뱉었다.
그녀에게는 울타리가 있었다.
든든한 아버지가 있었고, 상냥한 애정을 가르쳐 준 어머니가 있었으며 이복 오빠인 호엘리반과 친구인 프시오가 있었다.
하지만 제인의 곁에는…….
비밀을 가장 숨기고 싶은, 절대로 도와달라고 할 수 없는 보호자. 그 하나가 유일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 더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실이 관문에서 본 것을 듣고 있던 루가 몸을 일으켰다.
이내 창밖을 보며 고요하게 물었다.
“이번에는 관문을 넘을 것 같나?”
“……언젠가는 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번에도 아닐 거예요.”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세실은 심각하게 세상의 종말을 생각했다.
“믿거든. 제인을.”
* * *
하이데스가 묵직한 걸음으로 접견실에 들어와 앉았다.
그러자 탁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누워있던 그레데엘므가 동그랗게 눈만 뜬 채 하이데스에게 살랑살랑 손 인사를 했다.
그의 꼴을 보아하니 지겹고 따분한 와중에 시간이나 때우기 위해 온 듯싶었다. 하이데스는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오라는 개새끼는 오지를 않고, 부르지도 않은 망아지가 왔구나. 이래 봬도 명색이 명계의 혼돈이자 마왕이거늘, 아주 지들 멋대로. 하하.”
그레데엘므가 다른 말은 다 잘라먹고 명랑하게 물었다.
“망아지 귀엽다. 그거 나야?”
“마음에 드니?”
“들어. 마왕님은 송아지하면 되겠다.”
“…….”
그레데엘므가 이어서 말했다.
“나 배고파.”
“그대가 언제부터 허기짐을 알았지?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미쳐가는 게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구나.”
그레데엘므가 새초롬하게 자신의 두 뺨을 감쌌다.
“새삼스럽게, 뭘.”
“칭찬한 거 아니란다.”
하이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중을 들던 종에게 음식을 내오라고 눈짓했다. 그러자 그레데엘므가 좋아하는 닭고기 요리가 식탁에 올려졌다.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하이데이스가 대충 손짓했다.
“들렴.”
그레데엘므는 향신료가 듬뿍 올라간 닭고기를 입 안에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마왕님은 아직 청춘이라서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허기가 져.”
“그렇다고 여기 와서 배를 채우니?”
“여기가 어때서? 난 여기 마음에 들어. 마왕님도 좋고.”
“그러니? 그럼 조금 더 절실하게 매달려보렴.”
하이데스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기만하기 좋게.”
그레데엘므가 하이데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다 고요해지는데.”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도 좋아?”
하이데스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마저 먹으라며 손짓했다. 급하게 먹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닭고기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그레데엘므는 새침한 얼굴로 입가와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님, 귀여운 망아지는 갈게! 개새끼는 이젠 부르면 올 거야.”
그레데엘므는 알고자 하면 무엇이든 아는 존재였다.
하지만 좀처럼 무엇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그건 그에게 있어 상당히 큰 관심사라는 뜻이었다.
하이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도 루에게 원한이 남았니.”
“원한?”
그레데엘므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윽고 웃음이 뚝 그쳤다.
“내가 그런 마음을 품는 건…… 신밖에 없어.”
그의 미성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무의미해. 이유나 의도 같은 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 모두 순간일 뿐이야.”
“그러니?”
“응.”
하이데스는 조용히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었고, 그레데엘므는 처음처럼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접견실을 나섰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마왕님.”
그러다 휙 돌아보며 명랑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셋이서 볼까?”
* * *
루는 제인이 관문을 다시 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첫째, 본인의 거처에서 진행할 것.
둘째, 망가지지 말 것.
제인은 두 가지 모두 약속했고, 세실 또한 첫 번째 요구 사항을 수락했다.
하지만 관문인 만큼 일정 공간 내에 안내자와 수행자 외에는 합석이 불가하므로 결론적으로 관문은 라트올의 별채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세실.”
“……어.”
“표정 좀 풀어요. 난 하나도 긴장 안 되는데.”
마법진에 앉아있는 제인의 말에 세실은 자신이 더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시선을 떨구고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꼴통아.”
제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이건 정말 객기 아니래도요.”
“아니긴. 사람 걱정시키는 건 타고났지.”
“걱정도 팔자라던데.”
“……그래, 할 만하겠다. 한 마디를 안 지는 것을 보니.”
세실은 제인의 머리를 헝클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작하자.”
세실은 눈을 감았고, 제인 역시 따라서 눈을 감았다.
제인은 순식간에 마음의 문 앞에 도착했다. 손을 뻗자 그때와 같은 가시덩굴이 제인의 손목을 긁듯이 휘감아서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다 빠르게 제인을 끌어당겼다.
문 안으로 들어온 제인은 귀가 먹먹해지는 가운데 물방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걸 느꼈다.
그곳은 춥고 어두운 심해였다.
<또 왔네?>
제인은 이제 스스로가 괴물이라 부르는 환영의 정체를 알았다.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환영이 저번처럼 손을 뻗어서 제인의 목을 움켜쥐려 할 때였다. 제인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해코지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
제인은 환영을 가운데에 두고 빙빙 돌면서 어둠 속을 유유히 헤엄쳤다.
“그것밖에 없나 본데?”
환영이 이죽거렸다.
<잘도 지껄이네. 혀만 씹어도 죽어버릴게.>
“아, 맞다.”
제인은 문득 생각난 듯 환영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혀 씹지 마. 안 도망칠 테니까.”
환영이 제인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뭐야? 멀쩡하게 사고하네. 적어도 정신이 박살 났을 줄 알았는데.>
“박살 나면 안 되지. 그럼 네가 원하는 거 못하는데.”
<내가 원하는 거?>
“대화.”
<…….>
“너 나랑 이야기하고 싶잖아. 그래서 날 계속 찾아왔던 거, 아니야?”
환영이 놀란 얼굴을 했다가 키득거렸다.
<그럼 이리 가까이 와.>
제인은 환영을 가만히 살피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곧 넓은 보폭으로 유영하며 환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 춥다. 어둡고.”
<네가 날 여기에 처박아뒀어.>
“그래.”
환영의 눈이 더 야트막하게 휘었다. 이윽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다가 그대로 느릿하게 손을 내렸다.
초점 없는 동공이 눈에 띄게 축소되어 있었다.
환영이 물었다.
<왜 이제야 왔어?>
이어서 제인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매일같이 꿈속으로 찾아갔어. 그런데 넌 한 번도 날 제대로 봐준 적도, 보려고 한 적도 없어.>
환영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이 지옥에 처박힌 게 몇 번 같아?>
“…….”
<꿈속으로 갔던 밤마다, 그때마다 몇 번이나 여기에 처박혔었어. 그래도…… 그래도 나는 널 만나고 싶었어. 너와 얘기하고 싶었어. 네가 날 봐줬으면 했어.>
환영이 제인의 옷깃을 놓지 못하고서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까지 날…….>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혼자 두면 안 되잖아. 나도…… 나도 너잖아. 왜 나를 외면해? 왜 나를 혼자 둬? 왜 나를 외롭게 해? 왜?>
환영이 한참을 울었다.
제인은 울고 있는 환영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겐 눈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울었던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울고 있는 환영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늘 울고 있었구나. 슬픔이라는 건 눈물로만 흐르는 게 아니구나. 쌓이고 또 쌓여서 마음속에 바다를 이루기도 하는구나.
환영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쯤 나직하게 말했다.
“생각해봤어.”
잔물결이 일지 않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너는 나고 나는 너잖아. 살면서 용서를 빌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용서하는 법도, 용서받는 법도 몰라.”
환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바닥에 붙은 그림자처럼 생기 없는 얼굴로 제인을 마주 보았다.
“미안하다고 한들 용서해 줄까. 사과가 위로나 될까. 사과받고 싶어 하긴 할까. ‘미안해’라는 한마디가 무성의하다고 느끼진 않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제인의 주변에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방울, 두 방울의 물방울이 파동처럼 번져 나가듯.
“그래도 미안해.”
<…….>
제인은 다시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을 잇기 위해 애를 썼다.
일렁이는 슬픔에 제 진심이 희석되지 않도록, 한 글자 한 글자 느리게 힘을 주어 말했다.
“미안해.”
<…….>
“이렇게 춥고 어두운 곳에 혼자 둬서 미안해. 널 잊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