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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03)화 (103/168)

103.

제인은 며칠 만에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었다.

페브리아의 결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비력을 올렸던 덕분이었다.

더불어 무너져가던 마음도 빠르게 추슬러졌다. 제인이 살아온 인생 전반에 걸쳐 심신이 가장 건강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데시안 하나와 메 데시안 하나, 인간 하나가 사는 집에서 제일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라트올이었다.

제인은 한동안 라트올을 보지 못했기에 수척해진 그를 마주하고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인은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은 당신한테 있었고요.”

라트올은 들고 있던 컵을 개수대에 넣었다.

“다시는 부엌 구석에 처박혀서 울지 마세요. 그거 민폐예요.”

“…….”

제인은 그제야 라트올과 마주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무심하게 제인을 지나쳐가던 라트올이 멈춰서서 돌아보았다.

“묘약의 저주에서 풀렸다면서요.”

제인이 작게 주억거렸다.

라트올이 제인을 유심히 보았다.

“나는 애초에 당신이 묘약의 저주에 걸렸던 게 맞나 싶었어요. 그건 사랑에 빠지는 축복이 아니라 의심하는 저주에 가까운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은 그렇지 않아 보였거든요.”

아니다.

제인은 저주의 구렁텅이에서 매일같이 굴렀다.

온갖 추태를 떨었다.

세실은 염병도 저런 염병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어떤 날은 그녀에게 묵직한 박수도 받았다.

살면서 별 지랄 염병을 다 보여줘서 고맙다고. 넌덜머리 난다는 말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많이 배웠으니까 그만 좀 할 수 없냐고.

개차반 같은 나날이었다.

라트올이 보지 못했을 뿐.

그렇게 사랑은 제인의 이성을 매번 툭툭 끊어냈다. 심장은 또 어떻고. 루를 볼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뛰었고, 동시에 욱신거렸다.

정말 빌어먹을 짓이었다.

독에는 해독제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약도 없거니와 내성이 생기지도 않았다. 세상 어떤 맹독보다 더 독했다.

제인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 이제 알겠어! 나는 심장병으로 죽게 될 거야.

제인은 미래 자신의 사인이 무엇인지를 확신했다. 그렇게 정신을 살짝 놓고서 마음껏 루를 사랑했다. 연어구이를 만들었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듣길 원했다.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러면서 자신의 그 마음이 온전히 저주만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달아 갔다.

그녀는 분통이 터졌다.

말이 돼? 이 마음이 어떻게 가짜란 거야?

억울했다. 도서관을 전부 뒤져서라도 묘약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루에게 자신의 사랑이 타락한 천사의 농락 따위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개새끼, 개새끼.

제인은 수시로 그레데엘므를 욕했다.

저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마웠다.

제인은 관문을 넘기 전부터 제 안에 있는 괴물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으로는 평범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무의식적으로 루를 향한 마음을 억눌렀다. 경계하고 외면하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묘약이 저주에 걸린 후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일련의 생각을 이어가던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저주래요?”

그녀는 은은하게 웃으며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교양있게 말했다.

“저한테는 축복인데.”

라트올은 팔다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가 조용히 헛구역질하는 사이 제인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지 핍이 안 보이네요? 어제부터 불렀는데 안 와요.”

“눈치 없이 부르지 마세요. 한동안은 못 올 거예요. 걔도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동물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트올이 무심하게 말했다.

“번식기요.”

“…….”

제인은 라트올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하고 교양있게 말했을 때 알아들었어야 했다며 속으로 자책했다.

* * *

그 시각.

루는 느긋하게 시집을 읽고 있었다. 평온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의 몸에 가볍게 올라탄 인간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조그맣게 웃으며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는 모습에 입꼬리가 저절로 패였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스러운 인간은 세상 무구한 얼굴을 하고서 그의 여유와 웃음을 부수길 작정한 듯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루의 얼굴이 굳었다.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가만히 듣던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안아서 눕혔다. 그대로 그녀의 몸에 올라탄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인. 더는…….”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내 시간을 망가뜨리지 마.”

제인이 손을 뻗어서 그의 좁아진 미간을 살짝 문질렀다. 그리고 눈썹, 눈가, 뺨까지 천천히 만지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전부 다 주기로 약속했잖아.”

“…….”

“내게 용기를 줘.”

“…….”

“나를 지지하고.”

“…….”

“네 믿음을 줘.”

루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게 어떤 감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견디기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너는 나를 믿어야지, 루.”

“…….”

“세상 모든 존재가 나를 믿지 못해도 너만큼은 나를 믿어줘야지.”

그녀가 저를 가리키며 웃었다.

“네게 믿음을 가르쳐 준 인간이잖아. 안 그래?”

루는 부정하지 못했다. 실로 그레데엘므의 저주가 눈앞에서 풀어졌지 않은가.

널 사랑해.

널 위해 죽을 만큼, 그만큼 널 사랑해.

그런 그녀가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어여쁜 목소리로 말한다.

저를 믿으라고.

루는 실소했다.

이 자그마한 여자야말로 인간들이 부르는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비처럼 품에 안겨서 저를 지옥에 처박아버리는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제인.”

그의 냉랭한 부름에도 제인은 애살스럽게 방글거렸다. 동시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난 네 거야.”

루는 신에 반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태초의 신에게 절실히 묻고 싶었다.

이 인간은 도대체.

“맹세할게.”

눈앞에 있는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이길래, 조금만 힘을 줘도 짓무르는 무화과같이 나약한 주제에 이길 수 없게 만든 건가.

태초의 신인 당신은 어떤 실수를 한 건가.

“내 머리카락 한 올, 뼈마디 하나하나 전부 다 네 거야. 그러니 나를 망가뜨려서 너를 슬프게 하는 일, 두 번 다시는 안 해.”

인간이라면, 정말이지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맹세를 믿어.”

루는 그녀의 말에 잠시 흔들렸다.

마치 자신을 구원해 줄 것 같았던 그날처럼 심장을 관통했다. 그러나 엉망진창인 시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겪을 자신이 없었다.

만약 또 그런 순간이 온다면 루는 망가진 제인을 현혹하고 싶은 욕구와 충동을 이겨 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건 더 없는 지옥이었다.

“제인, 내가 주는 것들을 받으면서 편하게 지내.”

“…….”

“관문 따위는 잊고.”

그러자 제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꼭, 시계 초침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릿느릿.

그녀의 눈빛이 불쑥 아련해졌다.

“고백할 게 있어. 들어 볼래?”

“아니.”

루는 사양했다.

분명 그러했으나 제인은 아련하고도 얕은 흥분과 광기가 뒤섞인 눈을 하고서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나 잘난 척하는 거 무지무지 좋아해.”

“…….”

“그리고, 그거 알아?”

루는 그게 뭐든 모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제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루의 손에서 힘이 풀어지자, 제인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끌어내리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이어갔다.

“잘난 인간은 머저리 같은 얼치기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잘난 척이 된다? 잘나서 시기 질투 받는 거, 너무 좋아.”

“…….”

“정당한 노력과 실력으로 남을 업신여길 때 그 쾌감은 말이야…….”

제인은 그렇게 한참을 시기 질투가 주는 삶의 활력에 대해 길고 상세하게, 그리고 사력을 다해 설명했다.

루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관점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데시안이었음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이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다소 복잡한 감정이 얽힌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담아내다가 조용히 감아버렸다.

골이 아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인간이 은근하게 미친 눈으로 하는 망발을 듣고 있으려니 전에 없이 막막했다.

그때였다.

“루.”

제인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작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나를 위해 살다가 너를 위해 죽을 거야.”

루는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른 눈에 잿빛 눈동자를 담은 그는 저도 모르게 미친 생각을 했다.

데시안인 저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고, 가졌던 것도 몰랐던 마음을 빼앗은 인간에게 믿음까지 바쳐볼까 하는, 그런 미친 생각.

“……맹세해, 제인.”

말을 잇는 순간에도 그는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망가지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리고 나지막하게 웃었다.

홀린 것은 나였구나.

그것도 그토록 홀리지 않으려 무던히 애쓴 인간에게 단단히 홀려버렸구나.

“응, 맹세할게.”

제인이 그의 목을 끌어당겨 이마를 가볍게 맞대었다.

“너를 아프게 하지 않아.”

* * *

늦은 밤.

세실의 집 현관문이 울렸다. 그건 초인종 소리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파동에 울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세실은 그 울림만으로도 누가 온 것인지 알아챘다.

현관문을 열자, 예상대로 루가 서 있었다.

그가 무성의하게 단어를 읊조렸다.

“실례.”

그 말에는 ‘무례를 범할 예정이니 알아서 견뎌보도록’의 의미가 다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마저도 예의를 차린 것임을 세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루를 거실 한편의 의자로 안내했다. 이내 포도주 한 잔을 건네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마실 게 커피랑 그것밖에 없네요.”

“충분해.”

루는 천천히 포도주를 마셨다.

세실은 그에게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 밤에 용건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미 그의 용건을 짐작하는 터였다.

내일 있을 제인의 두 번째 관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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