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도대체 저 많은 눈물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몸 안에 바다라도 지닌 건가.
루는 착잡한 심경으로 그녀의 소리 없는 울음부터 몸의 떨림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가서 눈물을 훔쳐주고 싶었다. 젖은 머리카락과 몸을 데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질문이 그의 충동을 붙들었다.
당장 뛰어 내려가면?
그럼 저 나약한 인간의 응어리는?
무덤도 없이 악몽으로 따라다닌다고 했던,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을 거라던 진득한 응어리는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도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며, 만나고 싶다던 제인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을 조금만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 얼룩진 응어리가 미약하게나마 풀릴 수도 있을 터였다.
루는 한 세기를 어둠 속에서 보냈던 것보다 더 고행하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견뎠다. 제인이 자신이 만든 지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레데엘므가 루를 자극하기 위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지껄이는 순간에서야 그는 꽃무덤에 발을 들였다.
바로 그때, 얼어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인을 보자 자조적인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루는 잿빛 눈동자로 파고 들어갈 기세로 응시했고, 제인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그런 제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 * *
집으로 돌아온 제인은 곧바로 따뜻한 물을 받아서 몸을 씻었다. 그녀는 두 무릎을 끌어 앉고 있다가 젖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집으로 오기 직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레데엘므는 한적하고 양지바른 언덕에 그녀를 묻은 뒤 무덤 주변에 모든 계절의 꽃들을 둥글게 피워주었다.
그 꽃들을 바라보던 제인의 마음이 재차 짓눌렸다.
다이애나가 좋아하던 꽃들이었다.
하나같이 전부 다.
제인은 짧지 않게 묵념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무덤 앞에 앉아있는 그레데엘므의 등을 보다가 돌아왔다.
몸을 다 씻은 제인이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부엌 식탁에는 가볍게 먹기 좋은 수프가 올라와 있었다.
자리에 앉아 그릇을 비워냈을 때쯤, 그녀를 말없이 집요하게 바라보던 루가 제인의 무릎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가볍게 안아 들었다.
“방에 들어가지.”
제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루는 제인이 무엇을 하러 페브리아에 갔는지 이미 아는 듯싶었고, 제인은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궁금하군.”
어느새 침대에 눕혀진 제인은 제게로 손을 뻗는 루를 응시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언제까지 딴생각만 할 건지.”
그는 차가운 손길로 제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녀는 다정한 그의 시선과 손길에 더없이 숨이 막혀왔다.
“혼자 생각하지 말고, 말해 봐.”
제인은 뭐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루가 짤막하게 말했다.
“뭐든.”
제인은 다이애나의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풀어내었다.
다이애나에게 마음을 열고 따랐던 보육원에서의 시간과 그날의 사건, 절벽을 뒤로하고 달아날 때의 참담한 마음, 말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죄책감, 그러다 시작된 악몽까지 낱낱이.
그 모든 걸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담담하게 제인의 말을 듣던 루가 제인의 허리를 감싸고 바짝 끌어당겼다.
“그래서.”
얼굴이 가까워져 서로의 숨이 피부에 맞닿았다.
“날 사랑한다면서.”
숨에 섞인 나른한 미소가 제인의 이마에 닿았다.
“죽으려 했나?”
“…….”
“나를 두고.”
그의 낮은 음성과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잘 벼려진 칼날이 되어 제인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목이 잠겨왔다. 제인은 거의 숨소리와 가까운 목소리를 겨우 짜내어 그에게 말했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제인은 목울대를 조이는 울음을 삼키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었다.
“내가 너무 역겨워서.”
“…….”
“너무 끔찍하고 징그러워서.”
이런 나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어. 네 곁에 있을 수 없었어.
루가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작게 웃었다.
“끔찍하고, 징그럽고, 역겨워? 네가?”
루는 몸에서 제인을 천천히 떼어내고 그녀의 손을 잡아서 자기 심장에 올려두었다.
제인이 영문을 몰라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고작이라니, 나는.”
“나는.”
그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나는, 제인. 네가 웃으면서 내 살갗을 파고 심장을 퍼먹어도 좋아할 텐데. 그래도 나는 네 손톱 하나 태우지 않을걸.”
제인의 얼굴이 조금 멍해졌다.
그녀와 달리 그는 마치 상상만 해도 기쁜 듯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원망? 분노? 그럴 리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특해할 거야. 다른 이의 몸에 손대지 않고 내 것을 먹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루는 꼭 그 순간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차가운 손길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내 말이 비유나 농담 같나?”
제인은 멍한 눈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저었다.
루는 조금 전보다 더 기쁘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작고 보드라운 입술을 훑던 손가락이 부드럽게 밀려들어 갔다.
따뜻하고 말랑한 혀가 느껴졌다.
그는 안쪽을 더 살피려는 듯이 제인의 혀를 지그시 밑으로 눌렀다.
그가 웃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제인은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의 완력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루는 전보다 더 벌어진 입안 사이로 혀에 난 미세한 흉터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정말로 끔찍한 건, 너를 원하는 나야.”
“…….”
“너를 향한 내 사랑이,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를 이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징그러운지 알면,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까 싶은데.”
젖은 손가락이 입 안쪽을 훑으며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그녀가 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루는 그대로 제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느리고 깊게, 오랫동안.
“날 두고 죽으려면, 제인.”
제인이 조금 더 밭은 숨을 내쉬는 사이,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귓속부터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날 위해서 죽어.”
제인의 시선이 느릿하게 루를 향했다.
그곳에는 무엇보다 푸르고 황홀한 눈동자가 제인을 담고 있었고, 제인에게 담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푸른 눈동자 속.
제인은 시간이 멈춰진 듯한 영원한 감각으로 유영하다가 그의 아득함과 공허에 가려진 것들을 보고야 말았다.
제인이 작게 탄식했다.
“아…….”
……그렇구나.
현혹의 데시안이 끝까지 홀리려 하지 않았던 인간. 하지만 그에게 속절없이 홀려버린 인간. 결국, 그렇게 악마에게 홀려서 죽을 인간.
그 모든 게 나구나. 저 푸른 눈동자에 옭아매 진 나구나.
-사랑한다면 목숨 바쳐서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곁에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쓸쓸하지 않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제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는 인간이 아니었다. 제인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았고, 살 것이다.
저 없이, 아주 오랫동안.
삶의 순리에 따라 제인은 루를 두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결국, 이해할 수 없지만 아름다운 한 편의 시와 같은 데시안이 제인에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척이나 담백한 대답에 루는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눈을 감고 뜨는 그 짧은 찰나조차 미약한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제인.”
제인은 소리 없이 흔들리는 루의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추며 작게 웃었다.
“너를 사랑해.”
떨어진 그녀의 입술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인은 이어서 그의 코끝, 뺨, 이마까지 가볍게 입술로 누르며 속삭였다.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그러니까, 루.”
루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믿기 어려웠다. 자신이 잇새로 나온 말을 몇 번이고 되짚었으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죽음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응, 이라고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과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제인은 그의 귀를 의심하는 말들을 계속해서 쏟아 냈다.
“떨지 마.”
“…….”
“무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마. 널 위해 죽기도 전에 마음 아파서 죽을 것 같으니까.”
“…….”
루는 숨도 쉬지 않고 그녀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다 겨우 눈을 깜빡이고는 입술을 떼었다.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제인,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을…….”
말을 잇던 그의 입술이 멈췄다.
이윽고 미간을 좁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러나 그 말 역시도 끝맺지 못했다.
데시안에게 믿음이란 없다.
목숨을 다 바쳐 사랑하겠노라는 맹세는 오래전 앙디스에서 수없이 들었다. 그때도 루는 믿지 않았다.
지금은 다를까.
아니, 다르지 않다.
여전히 그는 인간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럼에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것에 볼품없는 희망을 걸고 또 걸었다.
굴레다.
굴레의 덤불에 몸이 묶여버린 그는 벗어날 수 없다. 그가 숨도 쉬지 못하고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제인을 볼 때였다.
제인이 말갛게 웃었다.
“널 사랑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어.”
루는 언어를 잃어버린 존재처럼 제인을 바라만 보았다.
“널 위해 죽을 만큼, 그만큼 널 사랑해.”
그때였다.
방안에 석양으로 물든 꽃과 풀잎의 환영들이 가득 피어나면서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향기가 퍼져나갔다.
제인과 루는 놀란 얼굴로 예상치 못한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고요한 정적 속, 물방울 소리가 울리는 찰나.
주변에 파동이 일렁이면서 모든 것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석양 색으로 물든 꽃, 풀잎,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향까지 모두.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인은 본능적으로 손목에 코를 박으며 냄새를 맡았다.
“안 나.”
“…….”
“그 향기가 안 나……!”
* * *
그날 밤.
그레데엘므는 동그란 유리병 하나를 코끝에 살짝 가져갔다가 내려놓았다.
이어서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재미있는 꼬마네, 그걸…… 스스로 풀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