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입가에 이 세상 무엇보다도 무해한 함박웃음이 걸려있었다.
“시온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뭐든 했어. 시온이 바라는 게 전부 소박한 것들이라서 시시했지만 그래도 좋았어.”
제인은 극단적인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다이애나의 죽음이 슬펐다가, 그녀가 행복했었다는 말에 안심되었다가, 그렇게 안심하는 자신에게 또 구역감을 느꼈다가, 다시 분노로 돌아섰다.
“그런데 어째서…….”
숨소리와 같은 제인의 목소리가 금세 공기 중에 흩어졌다. 입술만 잘근 깨물던 그녀가 목에 힘을 주고 물었다.
“어째서 그따위 모습으로…….”
그가 재차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제인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검은 안개.”
“…….”
“다이애나를 왜 그따위로 데려갔던 거야.”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으나 제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차오르던 눈물이 결국 바닥을 찍고 난 뒤에야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리고 뒤늦게 그레데엘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보다 더 멍한, 어딘가 확실히 고장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멍한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놓칠 수 없었어…….”
“…….”
“놓칠 수 없었어.”
이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백 년을 하루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는데, 그 시간을 또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러니 놓칠 수 없었어. 놓칠 수 없었어. 놓칠 수 없었어…….”
그는 한참을 놓칠 수 없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꼭 저주에 걸린 듯이.
제인은 그 저주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 안에 폭발하던 분노가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하…… 하하…….”
실소를 터트린 제인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저 모든 게 허무했다.
너무 허무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오랫동안 자신을 속박하고 짓눌렀던 지옥이, 저주가, 악몽의 밤이 허무했다.
다이애나를 뒤로하고 달음박질했던 죄책감이, 원망하고 증오했던 망상이, 평생을 따라다닐 것 같았던 어두운 나날들이 너무나 허무하고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하하, 하하…….”
허리를 숙인 채 배가 당길 정도로 한참을 웃던 제인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굽어진 등이 규칙적으로 크게 오르내렸다.
그렇게 숨을 고를 때였다.
또다시 괴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죽었을 인간 아냐?>
제인은 그 목소리가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두렵지도, 숨 막히지 않았다.
한낱 망상이다.
응어리진 죄책감이 만들어낸 나약한 망상.
제인은 고개를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다이애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정말로, 진심일 리 없잖아…….”
햇살 같았던 다이애나.
내가 당신을 잃고 괴로워했던 수많은 날 중 한 번쯤은 내게 와주었다면 기뻤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당신이 행복했으면 됐어.
당신이 웃으면서 눈을 감았으면 됐어.
냉이꽃을 줄 만큼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그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서 행복하게 웃었다면 나는 그걸로 됐어.
그때, 저주에 걸린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던 그레데엘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온도 죽어버렸어. 하지만 나는…… 나는 계속 살겠지. 그리고 또 세 번째, 네 번째 시온을 찾아 헤매겠지.”
“…….”
“꽃밭에서 만개했던 웃음, 고작 그 웃음 하나를 다시 보고 싶어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저주에 걸린 것처럼 이 지겨운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겠지.”
“…….”
“지겨워. 지루해. 지쳤어. 나는 정말, 정말 너무 지쳤어.”
“…….”
“나는 별이 될 거야. 그리고 너의 데시안은 나처럼.”
그레데엘므의 말이 탁 끊겼다.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조용히.”
제인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아플 만큼 놀랐다.
그레데엘므의 뒤에서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있는 루와 눈이 마주쳤다. 루가 서늘한 눈을 하고서 자조적인 미소를 그린 채 한 번 더 말했다.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지.”
그레데엘므가 입을 막고 있던 루의 손을 끌어 내리며 뚱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애송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루는 아무 반응도 없이 묵묵히 제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레데엘므는 미친 것 같은 얼굴을 닦아내고 전처럼 낭창하게 루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야? 내가 꼬마랑 있는데 화도 안 내네? 아까부터 천장에서 안 내려오길래 왜 그러나 싶었는데, 오늘 정말 이상하네.”
“걱정 마요, 화났으니까.”
루는 겉옷을 벗어서 제인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폭 감싸도록 덮어 주었다.
제인은 자신이 바다에 빠져서 홀딱 젖어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이애나를 보는 순간부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자각하지 못했던 터라 뒤늦게 한기가 들었다.
하지만 곧 그의 겉옷에서 따뜻한 온기가 강하게 훅 일더니 순식간에 보송하게 말랐다.
그레데엘므가 루에게 명랑하게 물었다.
“정말? 화났어?”
루는 제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네. 멀쩡한 목걸이는 왜 망가뜨렸어요. 그런다고 못 찾는 것도 아닌데, 갈수록 고약해지시네. 갖고 싶으면 말씀하시지.”
“말하면 만들어 줄 거야?”
루가 그레데엘므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뜨리고서 비웃듯 대답했다.
“미쳤다고.”
“……애송아. 어른을 놀리면 못 써.”
제인은 그들의 대화를 머리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루를 애송이라고 부르는 그레데엘므와 그런 그에게 말을 높이면서도 적의가 흘러넘치는 루의 대화는 제인의 머리가 해석하지 못하고 모조리 물음표를 띄웠다.
그들의 비정상적인 대화를 듣고 있던 제인은 그레데엘므가 한 말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까마득한 천장에 별처럼 보이는 게 반짝거렸다.
제인이 흠칫거렸다.
그럼…… 루는 언제부터 저기 있었다는 거지?
그때 그레데엘므가 부루퉁하게 물었다.
“목걸이 내가 망가뜨린 건 어떻게 알았어? 이상하다. 분명 네 부엉이가 날아간 뒤에 끊어버렸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루의 말에 그레데엘므가 팔짱을 끼며 심각하게 말했다.
“중요해. 나한테는 무지무지 중요해. 둘이서 네가 끊었니, 아니니 오해하고 다투고 질질 짜길 바랐단 말이야.”
“…….”
“…….”
루와 제인은 그의 말에 대꾸도 하기 싫었다.
부루퉁하게 있던 그레데엘므가 어느 순간 헤, 웃으며 익살맞게 말했다.
“그 목걸이 아무나 못 끊는 거구나?”
루의 침묵에 그레데엘므가 감동스러운 얼굴로 방정맞게 꺅꺅거렸다.
“꺅, 나 정도는 되어야 끊을 수 있는 거구나!”
그레데엘므의 추태를 가볍게 무시한 루가 제인의 손목을 잡고 뒤를 돌아섰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가 사뭇 놀라며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자, 제인이 버티고 서있었다.
“무덤…….”
루는 그녀의 뜻을 곧바로 이해하고 손목을 느슨하게 풀었다.
제인이 간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다이애나 무덤 만들어 줘야 해…….”
“꼬마야.”
그레데엘므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여기가 무덤이야. 너희가 천사라고 부르는 르젤들은 죽음의 의식을 이렇게 치러.”
르젤은 의식을 치르는 순간 새하얀 빛으로 사라지지만 다이애나는 인간이었기에 그레데엘므가 부패하지 않도록 해둔 것이었다.
제인은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이애나의 시신을 장식품처럼 생각하지 않고 의식을 치렀다는 말을 들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다이애나의 시신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간의 눈에는 아름답다기보다 기괴한 광경에 가까웠다.
“당신이 사랑했던 게 천사예요?”
“…….”
“당신이 사랑했던 건 인간이잖아요.”
그레데엘므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참을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어서 어둡고 컴컴한 천장을 응시했다.
“땅속에 묻히면 어둡잖아. 두 번째 시온은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걸 무서워했어.”
제인은 그제야 그가 다이애나의 무덤을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까마득한 천장 아래 어디까지가 벽인지 가늠할 수 없는 흰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그러했고, 다이애나가 묶인 비석에 핀 갖가지 꽃들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냉이꽃이 그러했다.
제인이 말했다.
“무덤 주변에 꽃을 피워주세요.”
“…….”
“그럼 다이애나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그레데엘므는 고민하는 얼굴로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제인은 그레데엘므를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루는 두 눈에 새겨넣듯이 바라보았다.
페브리아에서 제인을 데리고 나오던 날, 그녀가 몽유병으로 바다에 빠졌을 때 루는 알았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 장소는 분명 바다이리라.
제인은 그전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을 독으로 자학했다.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목에 칼날을 겨누며 제 목숨을 터부시했어도 그 이면에는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 있었다.
하지만 바다에 빠졌던 그때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죽음을 수용하려 했다.
그랬기에 바다에서 호흡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던 금화를 꺼내어 인어들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이 냄새를 가진 여자가 바다에 빠지면 구하도록 해. 그게 어느 바다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오늘.
눈 쌓인 절벽 끝에 떨어져 있는 제인의 목걸이를 발견했을 때, 그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페브리아의 결계 때문이 아니었다.
제인은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데다 인어들이 보호해줄 것이니 뛰어든다고 한들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목걸이를 보니 그녀가 정말로 죽으려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갑갑함이 느껴졌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그를 덮치듯 몰아쳤으나 소화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루는 곧장 그레데엘므의 꽃무덤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인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한 여자의 시신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