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미소 짓는 그레데엘므의 안광에 은은한 광기가 돌았다.
“유난히 감이 좋던, 그 꼬마.”
“…….”
“꼬마야.”
제인의 호칭이 손님에서 꼬마로 바뀌었다.
“감이 좋은 인간은 불행해지기 쉬워.”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제인이 불쾌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레데엘므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무구하게 물었다.
“시온, 보고 싶어?”
“그게 누구…….”
“그렇지? 보고 싶지? 그럼 가자, 보러!”
제인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레데엘므는 향수 가게에서 봤을 때와 약간 달랐다.
그곳에서의 그는 묘한 위화감이 들면서도 온화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낭창하면서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위압감은 그대로였기에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이게 본 모습인가? 하긴 무엇이 본 모습이든 무슨 상관인가.
제인은 지쳐있었다.
살아온 시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버거웠고, 살아갈 시간은 더 막막했다. 한 달이 넘도록 많이 울었고, 애써 웃었다.
도무지 그레데엘므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어서 절벽 끝으로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그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레데엘므가 제인의 등을 가볍게 쳤다.
“자! 가볼까!”
얕은 숨을 내뱉으며 일어난 제인은 그레데엘므를 지나쳐서 절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떨렸지만 전보다는 덜했다.
절벽 끝까지 서너 발자국 정도 남았을 때였다. 목이 뒤로 당겨지면서 확 졸렸다가 풀리는 감각이 연이어 들었다.
“하…….”
시선을 아래에 두자 루가 주었던 목걸이가 끊어진 채 새하얀 눈 위에 놓여 있었다.
푸른 보석이 더욱 차갑게 빛났다.
“목줄은 좀 풀자, 꼬마야.”
“…….”
“안 그래도 여길 지켜보던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걸 봤거든!”
제인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텅 빈 껍데기 같았던 그녀 안에 분노가 차오르는 건 잠깐이었다. 곧바로 눈앞의 형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검은 안개였다.
그레데엘므가 온 데 간 데 사라진 자리에 검은 안개가 기괴하게 뭉글거리다가 순식간에 제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절벽 아래 바다로 풍덩 빠져버렸다.
* * *
제인은 현실감이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꽃무덤도, 원을 그리며 혼자 왈츠를 추는 미친 그레데엘므도, 덩그러니 놓인 비석에 갖가지 꽃에 파묻혀서 넝쿨과 가시에 묶인 다이애나의 시신도 무엇하나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가 아찔해지도록 충격을 받은 제인은 주저앉아 미소 짓고 있는 다이애나의 시신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석상처럼 가만히 숨만 쉬면서.
멀리서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레데엘므가 어느새 제인의 곁에 앉아서 함께 다이애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추었던 왈츠곡이 귀에 들리 듯 발끝만 까딱거렸다.
제인은 몸이 떨려왔다.
불규칙한 숨을 고르며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꺾인 꽃들이 한 움큼 쥐어졌다.
“……당신이었어?”
“뭐가?”
“검은 안개.”
“그게 뭐야?”
제인이 그를 붙들고 소리쳤다.
“다이애나를 끌고 갔던 검은 안개!”
“……아.”
무언가 생각난 듯한 그레데엘므가 조금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명계로 떨어지면서 색깔이 변했어.”
그가 이어지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외형은 그대로인데 말이지.”
제인의 몸에서 힘이 주르륵 풀렸다.
심장이 뼈대를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뛰었다. 귓가를 메우는 심장 박동의 울림에 따라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신이…….”
그녀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물었다.
“당신이 다이애나를…… 죽였어……?”
그레데엘므가 낮게 웃었다.
“백 년 전의 시온은 내가 죽인 거더라.”
그레데엘므는 허리를 숙인 후 다리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래 장난하듯이 꽃잎을 긁어서 위로 뿌리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온은 아니야.”
백 년 전의 시온은 뭐고, 두 번째 시온은 뭐란 말인가.
제인은 그의 허무맹랑한 부름에 분노해야 할지, 아니면 이유를 알려고 노력해야 할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제인은 먹먹한 뇌를 꿈틀거리는 감각으로 돌리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사이 그레데엘므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처럼 꽃잎이 크고 많이 달린 꽃 하나를 주워서 하나씩 떼어내며 짓이겼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제인의 숨통을 끊어내려고 작정한 것처럼 옥죄었다.
“두 번째 시온은 몸이 약하게 태어났어.”
두 번째 시온이라는 게, 다이애나를 말하는 건가?
제인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시온을 데려왔던 날 알았어. 일 년도 못 살고 죽을 운명이라는걸.”
동시에 괴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죽었을 인간 아냐?>
구역감이 치밀었다.
오래전, 밤마다 자신을 괴롭혔던 망상의 진실에 제 안의 괴물이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 봐.
어차피 죽었을 인간이었잖아?
제인은 눈을 감고 속을 게워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호흡은 불안정했고 목덜미부터 등허리까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억누르려 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그레데엘므는 바들거리며 힘겨워하는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훑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시온이 내 곁에서 삼 년을 더 살았어. 나는 그 시간 동안 두 번째 시온이 바라고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줬어.”
“…….”
“딱 하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빼고.”
“…….”
“우습지 않아?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레데엘므는 ‘그깟 이름이 뭐라고.’라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꽃의 꽃잎을 모조리 떼어내고는 두 다리를 세운 채 벌러덩 누웠다.
“불러줄걸…….”
그의 말이 몸서리치도록 애달프게 들렸다면, 누가 믿어줄까?
제인은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어내며 고개를 뻣뻣하게 가로저었다.
죽은 다이애나를 저토록 소름 끼치게 매달아 놓은 미치광이가 하는 말을 어떻게 애달파하는 것으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제인은 불현듯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서 다이애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신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손가락을 움직일 것 같았다.
제인은 어느덧 다이애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 손이 닿았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제인은 자신이 흘리는 눈물의 온도가 서글펐다.
그때 그레데엘므가 명랑한 어조로 물었다.
“꼬마는 냉이꽃 꽃말이 뭔 줄 알아?”
냉이꽃.
그 꽃의 이름에 제인이 가만히 못에 박힌 듯이 서서 침묵했다.
그레데엘므는 정적을 끊어내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시온은 봄에 나는 꽃들을 유독 좋아했어. 그중에서 냉이꽃을 가장 좋아했지.”
“…….”
“작고 볼품없는 꽃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하는지 몰랐는데 어느새 나도 좋아하게 됐어. 계속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
“그러다 언젠가, 냉이꽃의 꽃말을 아느냐고 묻는 거야. 인간들이 끼워 맞춘 의미를 내가 알 리가 있어? 뭐냐고 물었더니 냉이꽃으로 만든 꽃반지를 끼워주면서 비밀이래.”
“…….”
“나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지! 그럼 자기가 죽을 때까진 몰랐으면 한다면서 웃더라고. 그래서일까? 시온이 살아 있길 바라서인지…….”
그레데엘므는 시차를 두고 말을 끝맺었다.
“나는 아직도 그 꽃말을 몰라.”
“…….”
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냉이꽃을 꺾어서 꽃말을 알려주었던 다이애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레데엘므를 향한 다이애나의 마음을, 그녀를 향한 그레데엘므의 그리움을 모두 알아버린 제인은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이제 그녀를 덮쳐오는 건 비릿한 구역감이 아니라 해일과도 같은 슬픔이었다. 손금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꽃무덤 위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던 그레데엘므가 이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는 궁금해. 꼬마는 알아?”
그레데엘므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눈물 없이 슬퍼하고 있었다. 세상 누구라도 그의 슬픔을 모두 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그레데엘므는 제인의 눈물을 무감하게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알면, 알려줄래?”
“…….”
“역시 모르는 게 나으려나.”
제인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다이애나가 원했어……?”
“무얼.”
“페브리아로 돌아오지 않고 당신 곁에 있기를 정말로 원했어?”
“응.”
제인은 혼란스러웠다.
저 미치광이의 말을 믿어도 될까? 다이애나의 시신을 썩지도 못하게 만들고 꽃들과 함께 매달아 놓은, 그리고 그 앞에서 왈츠를 추는 저 미치광이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냉이꽃은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지어낼 수도 없는 말이지 않은가.
“꼬마야, 두 번째 시온은 귀족 가문의 입양아였어.”
그레데엘므의 말에 제인의 머릿속에서 얽히던 혼란이 끊어졌다.
“입양된 후에 희귀병이 생겼어. 그리고 치료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대받고 자랐지.”
제인은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토록 밝게 웃는 여자가 학대받고 자랐다니, 제인은 믿기 어려웠다.
“내가 데려왔을 땐 이미 병이 재발한 상태라 일 년밖에 못 산다는 걸 시온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시온에게 약속했어. 남은 생을 내 곁에서 보내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이야.”
제인은 같은 의문을 반복했다.
저 미치광이의 말을 믿어도 될까?
의문은 다이애나의 마지막 미소 앞에서 힘없이 바스러졌다.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지을 수 없는 웃음이었다.
“다이애나가 당신 곁에서 행복했어?”
“응.”
제인은 전보다 더 넋을 잃고 그레데엘므를 보았다.
“나는 시온의 웃는 얼굴을 좋아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