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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9)화 (99/168)

99.

세실이 찾아오던 날, 제인은 덤덤하게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삼 일에 한 번 오시지 않아도 돼요. 관문은…… 시간을 주세요.”

시간을 주세요.

세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제인의 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자신을 마주보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세실이 억지를 써서라도 제인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였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갔다.

저녁 식사를 마친 제인이 일찍 잠든 저녁이었다.

루는 오랜만에 작업실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라트올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제인이 관문을 치르고 온 날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묻는 것이었다.

“한 달하고 보름요.”

“……그래.”

“그동안 드호아망 주문 외에는 전부 받지 않았어요. 납품 예정이었던 마석은 우선 마력 가공 없이 납품했고요. 녹니스 원료는 이제 충분해요. 더 끌어모으지 않아도 돼요.”

“그래.”

“문제는…… 마왕님이 두 번이나 부르셨는데 안 가셨다는 거예요.”

“그래.”

라트올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얘기는 그래, 라는 대답이 돌아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명계에서 마왕의 부름에 불응하는 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했다.

그에 반해 루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라트올도 마왕이 그를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게 불응한 데시안을 가만히 둘 위인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름에는 그가 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 주인님이 원래도 미쳤는데 지금은 더 미쳐서 정신이 없다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다음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데려오겠다며 사정했다.

미친놈을 수하로 둔 하이데스는 미친놈을 주인으로 둔 라트올을 애잔하고 가엽게 보더니 관용을 베풀어 돌려보냈다.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관용이리라.

“어쩌시려고 그래요.”

라트올의 물음에 루는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글쎄.”

“……제인이 뭐 때문에 저러는지 물어는 봤어요?”

“지금 내가 알면 어떻게 할지, 너는 알 텐데.”

“…….”

루는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루가 제인의 밑바닥을 알게 된다면 몇백, 몇천 명을 현혹해서라도 제인이 원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질 것을.

그렇게 모든 게 거짓인 세상을 과연 좋아할까 싶으면서도 결국에는 제인까지 홀리고 말 것을, 루도, 라트올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한 달 하고도 보름.

그 시간 동안 루는 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제인의 껍데기 같은 모습을 보면서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그녀를 현혹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따위 껍데기로 있을 거면 차라리 내 손으로 홀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제인 만큼은.

세상 모두를 홀려도 제인 하나만큼은 현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타고나길 현혹하는 데시안인 그는 매 순간 제인을 홀리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떨었다.

겉으로는 잔잔한 호수처럼 있었으나 안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본성을, 본능을, 욕구를 미친 듯이 억누르며 견뎌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정오.

관문을 넘는 데 실패한 이후 처음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제인이 침대에 누워있는 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루가 제인의 허리를 감싸고 품으로 끌어안았다.

“어딜 가려고.”

“도서관. 엊그저께 말했잖아.”

제인이 루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동안, 루는 드호아망의 도서관에 다녀오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기억해냈다.

입가에 번진 미소와 달리,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보내기 싫은데.”

“그럼 다음 주에 갈게.”

“그때도 보내기 싫으면.”

“그다음 주에 가지, 뭐.”

루는 제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잡고 제 입술로 끌어당겼다. 짧지 않은 입맞춤 끝에 그가 입술을 떼고 나른하게 말했다.

“고집을 이상하게 부리는군.”

“그건 너 아니야?”

제인과 루는 서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웃음의 의미가 같은지는 알 수 없었다. 루는 그녀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루가 다녀와, 라고 말해서 제인은 또 웃었다.

루에게서 풀려난 제인이 이동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루가 제인을 불렀다.

제인은 발을 떼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 위, 벽에 기대어 앉은 루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제인, 얼음은 녹아.”

“응?”

“그래도 녹지 마. 봄이 올 때까지는.”

* * *

눈 쌓인 절벽.

제인은 이동의 문에서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바닥이 꽁꽁 얼어있는 눈더미를 파고들자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이어서 대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마나를 억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페브리아의 결계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제인은 마비력을 올렸다.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숨을 쉬고 싶어 하는 자신이 너무나 시시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작게 하하, 하고 웃었다.

제인은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에 안간힘을 주고 겨우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한 발짝씩 디딜 때마다 괴물을 떠올렸다. 죽어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던 다이애나가 제 안의 괴물이었다는걸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까지.

-네가 날 여기에 버리고 도망가서 꿈으로 찾아갔던 건데, 그마저도 피하더라?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어?

-나는 너고, 너는 나라서 완전히 버릴 수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데.

제인은 모든 말에 수긍했다.

그 시절, 다이애나를 향한 원망과 증오의 허상은 산 정상에서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결국, 허상은 끔찍한 망상이 되었다.

병으로 죽어버릴 인간이었던 여자가 재수 없게 저를 구해주고 숨 막히는 죄책감을 주었다는 망상.

그렇게 제인은 잠 못 드는 밤마다 좀처럼 발이 닿지 않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역겨운 망상에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언제였더라.

늦은 밤까지 약제실에 있었던 제인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침에 하임이 챙겨 주었던 우산은 탁자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으리라.

폭우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하임이 그녀의 뒤에서 우산을 씌워주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유순하게 휘어지는 그의 눈매.

다이애나를 애틋하게 담았던 그의 눈동자.

하임.

제 삶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스승이고 동료이자 친구.

빗속에서 우산을 씌워주는 그의 존재가 제인의 경멸스러운 망상을 깨부수어 주었다. 더불어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역겨운 인간인지 깨달았다.

토기가 밀려왔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잘못했다고, 죄송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멸시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에게만큼은 미움받을 자신이 없었다.

하임은 하얗게 질린 제인을 걱정했다.

제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푸른 달빛이 서늘한 시간쯤, 몸을 일으켜서 약제실로 되돌아갔다.

바로 그날이었다.

처음으로 맹독을 복용하고 역겨운 망상을 무의식의 밑바닥에 처박아 두고 말끔히 지워버린 날.

소량의 맹독을 복용했던 제인은 사경을 헤매다가 이틀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망상을 감쪽같이 기억에서 지웠다. 스스로 망상을 지워낸 제인은 이전처럼 숨이 막히는 일이 없었다.

그랬다.

악몽을 꾸기 전까지는.

-날 버리고 도망가서 내가 네 악몽이 되었어.

기억 너머의 모든 걸 상기한 제인이 엷게 웃었다.

다이애나의 얼굴을 하고서 매일 밤 꿈으로 찾아왔던 괴물은 제인이 지워버린 망상이었다.

절벽 끝에 다다르자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눈 덮인 절벽 끝자락.

다이애나가 숨을 거둔 곳이자, 숨 막히는 죄책감부터 원망과 증오, 그리고 망상이 시작된 지옥이었다. 제인은 눈을 감고 느릿하게 허공에 발을 디뎠다.

제 안의 괴물이 함께하고자 했던 절벽 아래의 바다로 가기 위해서.

그 순간.

누군가 제인의 뒷덜미를 투박하게 잡아당겼다.

짙은 박하 향이 났다. 그는 순백의 새하얀 눈밭 위에서 후광이 비칠 만큼 빛나는 천사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누가 남의 추억의 장소에서 천지 분간 못하고 청승을 떠나 했더니…….”

그레데엘므였다.

“손님도 죽을 때가 아니야, 아직은.”

제인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그레데엘므를 봤다.

마주 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건 제인만이 아니었다. 그레데엘므도 아리송한 표정으로 제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손님. 이상하다. 여기서 보니까 낯이 익네?”

그레데엘므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제인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떼려고 하자 그레데엘므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은 채 질질 끌고 절벽 뒤편의 바위에 가볍게 던지다시피 앉혔다. 이어서 그녀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짓누르며 해맑게 말했다.

“내가 겉으로만 봐서는 젊고 잘생겼지만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 생각 좀 하게 말 걸지 말고 기다려.”

미친 새끼…….

제인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레데엘므는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는지 다시 제인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위 위에 앉혔다.

“예절 교육이 덜 됐네. 어르신이 곰곰이 생각 중인데 버릇없이 일어나면 어떡해?”

제인은 향수 가게에서처럼 발바닥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마비력을 더 끌어올려서 발을 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그때였다.

“아!”

그레데엘므가 발랄하게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탄성을 질렀다.

“그 꼬마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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