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러나 속도와 상관없이 장면들이 눈에 박히듯이 들어왔다.
모든 게 다이애나였다.
구김살 없이 밝게 인사하는 다이애나, 제인의 옆에 앉는 다이애나, 말없이 웃어주는 다이애나, 동요를 불러주는 다이애나, 꽃과 풀을 가리키며 즐겁게 재잘대던 다이애나.
수많은 다이애나가 지나가다가 어느 장면부터는 느릿하게 펼쳐졌다.
제인이 마음의 문 안에서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절벽이었다.
다이애나의 절규가, 풍덩 빠지는 물소리가, 달음박질하는 제인의 발소리가 귀를 파고들 듯이 뒤엉켜갔다.
제인은 엎드린 채 불규칙한 밭은 숨을 겨우 내쉬었다. 또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귓가가 웅웅거렸다. 눈앞이 아득해져 갔다.
그러다 시야가 트이면서 장면이 차르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 순간, 한 장면에서 멈췄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하임의 연구실 간이침대에 제인이 누워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려서 굴러버린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문 닫힌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애나, 정말 절벽에서 발을 헛디딘 걸까?
-그런 거 아니야? 저 고아가 그걸 알리려고 뛰어오다가 넘어진 것 같은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의문들이 들려왔다. 한참이 지나서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목소리들을 끊어냈다.
-……지나가겠습니다.
어린 제인의 의식이 돌아올 때쯤, 하임이 발을 절며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린 제인은 어슴푸레한 의식 속에 있었다.
하임은 어린 제인의 생채기 곳곳을 소독했다. 일순, 무릎 부근에서 멈췄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살펴보더니 핀셋으로 무릎의 생채기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누워있던 어린 제인은 어슴푸레한 의식 속에서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장면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의 제인은 알고 있었다.
이끼였다.
파도가 부서져 맞부딪히는 곳에서만 나는, 절벽 아래의 이끼.
이끼를 보던 하임은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동시에 제인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제인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고함인지, 슬픔인지, 괴로움인지, 아니면 속을 뒤집을 듯한 토기인지, 뭘 막으려는지도 모르게 막았으나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
하임, 당신은 알고 있었구나.
당신이 남몰래 가슴에 품고 있던 다이애나가 나를 살리다가 나로 인해서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나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절벽 끝에서의 진실을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었을까.
내게 당신은 보호자이자 스승이었고, 동료였으며, 끝내는 친구라 여겼는데.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었을까.
가끔, 다정한 웃음이 지워진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냉랭하다고 느꼈던 건 나를 향한 미움이었을까. 분노였을까.
아니면…… 증오였나?
그래서 내가 나를 학대하는 그 많은 시간 속에 당신이 없었나?
나는 당신을 기다렸나?
그러지 말라, 보듬어 주기를 원했나?
멈춰주길 바랐나?
나는, 나는…….
모든 장면이 걷히고, 다시 한낮의 절벽으로 돌아왔다.
제인은 일정하지 않은 호흡으로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키듯 토해냈다.
절벽 아래에서 돌과 흙에 갈린 손이 가시덩굴처럼 기괴하게 움직이며 위로 뻗어져 나왔다. 삐걱거리며 움직이던 손이 제인의 목을 틀어쥐었다.
제인은 목이 졸린 채 가볍게 아래로 떨어졌다.
눈물방울보다 더 가볍게.
바닷속.
한낮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빛에서 어둠으로 끝없이, 끝없이 내려갔다.
제인은 목을 틀어쥔 다이애나를 마주 보았다. 초점이 없는 눈이었다. 눈이 마주친 건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눈동자가 흐렸다.
그때 다이애나의 얼굴이 일그러져갔다.
어둑해져 가는 바닷속 물방울들 틈에서 모습이 변한 그녀는…… 다이애나가 아니었다.
제인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제인을 보고 있는 환영.
제인의 목을 틀어쥔 환영이 손을 끌어당겨서 자신을 더 가까이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반가운 듯 입꼬리를 높이 끌어 올렸다.
<드디어 만났네.>
“……!”
제인은 숨이 막히고,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마주 선 환영을 멍하니 응시했다.
<네가 날 여기에 처박아 버리고 도망가서 꿈으로 찾아갔던 건데, 그마저도 피하더라? 악마에게 널 바치면서까지.>
“뭐……?”
제인은 환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사이 환영의 원망이 이어졌다.
<줄곧 궁금했어. 왜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발버둥 쳤어?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어? 그럼 뭐해? 나는 너고, 너는 나라서 완전히 버릴 수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데.>
제인은 힘겹게, 한 자씩 힘을 주어 물었다.
“내가 널 버리고 도망가서, 그래서 꿈으로 온 거라고? 그래서, 악몽이 되었다고……?”
<그래. 날 버리고 도망가서 내가 네 악몽이 되었어.>
그럴 리가.
제인은 환영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불행의 원인은 악몽이었다.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학했고, 루에게 자신의 절망을 주겠노라 계약했다.
그러므로 전혀 짐작되는 게 없었다.
자신이 악몽 이전에 무엇을 버렸는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
환영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기괴한 미소를 짓듯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기억 안 나는구나? 까맣게 잊어버렸구나?>
제인은 제 얼굴임에도 그 모습이 너무나 섬뜩해서 얼어붙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속 악몽 이전에 도망친 무엇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넋이 나가버린 제인의 얼굴을 보던 환영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좁아졌다. 그러다 섬찟한 광채를 내비치고 괴이하게 웃어댔다.
곧이어 미친 것처럼 발악했다.
<기억 안 나겠지, 넌 나만 뚝 떼어서 이 지옥에 처박아 두었으니까! 마치 네가 아닌 것처럼 나를 부정하면서 새까맣게 잊고 지냈겠지!>
한껏 발악하던 환영은 말을 끝맺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대로 고개를 까딱거리다가 다시 제인과 눈을 맞추었다.
섬찟함이 뼈마디까지 흘렀다.
<알아? 여긴 지옥이야.>
“…….”
<나랑 같이 지옥에 있자. 나랑 같이 고통스럽게. 나랑 같이 있자.>
환영이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이윽고 다른 한 손으로 제인의 눈을 가렸다.
<기억나게 해줄 테니까.>
제인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고장 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몸이 제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깜깜한 어둠.
그 적막에서 이전처럼 수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그러다 한 장면에서 멈췄다.
삼 년이 지나 제인이 열 살이 되던 해, 하임이 제인을 데리러 온 날이었다.
-궁정으로 갈래?
다이애나가 죽은 후, 고아원에 돌아온 제인은 벙어리가 되어버려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임이 이어서 말했다.
-내 호적으로 입양은 어렵지만 아마 보육원보다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하임은 귀족 가문의 자재였으므로 마음대로 입양할 수는 없었다. 입양이 아니더라도 보는 눈이 많았기에 무턱대고 데리러 올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열 살부터는 궁정에서 시종 생활이 가능했기에 하임은 삼 년을 기다렸다가 데리러 온 것이었다.
-…….
제인은 말없이 유순하게 휘어지는 눈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인은 하임을 알고 있었다.
저 눈에 담긴 다이애나가 얼마나 애틋했던 지까지도.
다이애나가 보육원으로 봉사를 오는 날에는 늘 항상 하임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는 몹시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이애나를 눈에 담았다.
그 눈길이 얼마나 애틋했던지, 제인은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보육원으로 봉사를 온 사람들은 귀족 가문 출신인데다 절름발이인 그를 서먹하게 대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정한 다이애나는 하임에게도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녀의 햇살 같은 웃음을 마주할 때면 하임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만연했다.
하임은 벙어리인 제인에게 계속 말했다.
-다이애나는 네가 약제사가 되면 좋겠다고 했어.
-…….
-다이애나가 살아 있을 때, 네 얘기를 자주 했었거든. 한 번 알려준 약초는 잊어버리지 않아서 기특하다고 했어.
-…….
-네가 약제사가 된다면 다이애나가 기뻐하지 않을까.
-…….
-궁정으로 가고 싶으면, 따라오렴.
하임은 그대로 뒤돌아서 걸어갔다.
제인은 보육원 돌담 벽에 웅크려 앉은 채 발을 절며 멀어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약제사가 되면 정말로 다이애나가 하늘에서 웃어줄까. 웃어주면 좋을 텐데. 그녀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제인은 땅에 손을 짚고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한 발짝, 한 발짝 걷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절벽에서 멀어지던 그날처럼 달려 나갔다.
햇살이 눈 부신 날이었다.
그렇게 제인은 하임을 따라 궁정에 들어갔다.
하임은 제인에게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제인 역시 벙어리였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제사 시종으로 지낸 지 몇 년이 조금 지나서 제인의 말문이 트였다.
그런데도 하임은 다이애나의 죽음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제인 역시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궁정에서, 제인이에게서 다이애나의 죽음은 소리 없이 잊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습 약제사 하나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디면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제인이 잊고 있던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기억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