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세실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너 공부할 시간도 없을 텐데.
-있으니까 염려 마. 그래도 다행이네. 하고 싶다고 말로만 하면서 투덜대는 건 꼴불견이라고 해주려던 참이었는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넌 왜 응원도 재수 없니?
-응원인 거 알면 됐지, 재수도 있어야 해? 우리 세실은 욕심쟁이네.
세실은 머리와 몸을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야! 내가 느끼하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우리 세실은 부끄럼쟁이네.
-……너는 진짜!
신체계 치유 마법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호엘리반의 반응 역시도 그다웠다.
-우리 동생, 오빠의 유명세가 부러웠어?
-……너는 진짜.
믿기지 않지만 그게 응원이라는 사실을 세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시오와 호엘리반을 제외한 모두가 ‘안 될 거다’라고 입을 모았다.
세실은 사람들의 마음이 자신의 꿈을 부정하는 것만큼 하나가 된다면 세계평화가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쟁을 왜 하나?
‘세실의 꿈을 반대합시다!’ 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될 텐데.
그러나 몇 년 후, 세계평화보다 세실의 계열 전환이 더 빨랐다.
드호아망이 발칵 뒤집혔다.
그녀의 꿈을 부정하던 사람들은 기억회로에 문제라도 생겼는지 ‘너라면 할 줄 알았어!’라고 말하며 축하해주었다.
세실은 그들의 뇌를 꺼내어 자신의 꿈을 부정했던 날짜와 시간, 초 단위까지 확인해서 말해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꿈이 이루어졌다.
기뻤다.
그 기쁨을 만끽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데 그 꿈이 아버지에게 상처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세실도, 호엘리반도, 프시오도 모두 예상치 못한 지점이 있었다.
펠드툰이 세실의 꿈을 반대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하는 딸이 혹시라도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상처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애정 어린 노파심이 전부였다.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딸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 펠드툰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딸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왜였을까. 이상하게도 무력하게 통증만 덜고 보냈던 아내가 떠올랐다. 딸의 꿈이 이뤄져서 끌려오는 생각이라고 보기에는 몹시 비참한 생각이었다.
만약 내가 신체계 치유 마법사였다면.
그랬다면 내 손으로 치료하는 노력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아내가 살아 있을 때도 펠드툰은 그 생각을 수백, 수천 번을 더 했었다. 딸이 신체계 치유 마법사가 되자 기쁨과 함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펠드툰은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가장 먼저 펠드툰의 충격을 눈치챈 건 호엘리반이었다. 호엘리반은 그에게 존경을 담아서 말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어머니도, 저도, 세실도 아버지께서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게 생각해요, 아버지.
세실은 무너져버린 아버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태도로 그를 대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려웠다.
아버지를 대하는 게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나?
세실은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사이 호엘리반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빠졌다. 바쁜 와중에 아버지의 곁을 지켜주었다.
좋은 아들, 좋은 오빠.
아마도 어머니의 유언이었으리라.
세실에게 했던 어머니의 유언도 비슷했으니까.
-호엘리반이 우리 가족을 참 좋아해.
호엘리반과 달리 세실은 제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도 추스를 틈도 없이 앞에 마주한 신체계 치유 마법사로서의 험난한 과정들을 미친 듯이 밟아나갔다.
다행히 신체계 치유 마법사로서의 학문은 끝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세실은 쉼 없이 달렸다.
잠이 부족했다. 최고가 되려니 시간은 더 부족하기만 했다.
각성제.
각성제가 필요했다.
세실은 파탐을 만들어서 피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엘마뉴엘로 떠나셨다. 어릴 적 꿈이었던 드래곤 마스터가 되기에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나라, 엘마뉴엘로.
호엘리반의 도움으로 엘마뉴엘에 정착한 아버지는 예전처럼 호쾌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실이 느끼는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
세실은 여전히 아버지를 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딸이었다.
세실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독보적인 신체계 치유 마법사의 정점으로.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걸. 그래서 몸의 상처만큼이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걸.
하지만 드호아망에는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없었다.
엘마뉴엘로 떠나버린 그녀의 아버지가 유일했었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는 타고나길 희소한 데다가 마법이란 자고로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였으므로 정신계 치유 마법사는 대우가 좋지 않았다.
허울뿐이었다.
그 사실을, 세실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남들이 허울이라고 하는 것을 외로이 지켰던 사람이 펠드툰이었다는 것까지.
-정신계 치유 마법사가 필요해.
세실은 프시오에게 자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했다.
계열의 희소성부터 내면의 고통이 클수록, 그래서 관문이 지옥 같을수록 강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랬는데, 만난 것이었다.
내면의 고통이 지옥 같은 아이, 제인을.
소파에서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세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제인이 멀뚱하게 서서 세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꼴사납게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세실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 귀가하고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제인의 정강이를 가볍게 차버렸다.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간단하게 씻고 나온 세실이 빈 통을 하나 가지고 왔다. 비위가 약한 만큼 혀를 물더라도 토하고 물겠지 싶어서였다.
세실은 관문을 넘기 위한 마법진을 거실 중앙에 신중하게 그렸다.
손에서 나오는 햇살과도 같은 빛이 둥글게 퍼지면서 그 안에 균형 잡힌 기하학 도형과 무늬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세실이 마법진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라.”
제인이 마법진 중앙에 앉았다.
세실은 얕게 한숨을 쉬고 한쪽 무릎을 굽혔다. 눈높이가 맞춰지자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잘 들어. 처음에는 나를 따라서 육체의 눈을 감으면 내면의 눈이 떠질 거다. 그 감각을 기억했다가 관문을 멈추거나 나오고 싶을 땐 육체의 눈을 뜨면 돼.”
“네.”
“마음의 문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내가 안내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 하지만 들어간 후, 관문이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내 목소리가 안 들릴 거다.”
“네.”
세실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약간의 경고와 다분한 걱정이 섞인 투로 말했다.
“관문을 멈추는 건 스스로 눈을 떠야만 멈출 수 있어. 고통스러우면 눈을 떠. 참지 마. 도망쳐도 돼. 오늘 못 넘으면 다음에, 다음에 못 넘으면 그다음에 해도…….”
“세실.”
나지막하게 그녀를 부른 제인이 말없이 웃었다.
세실은 그래, 그래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세실이 눈을 감았다.
제인 역시 따라서 눈을 감자, 세실의 손끝에서 시작한 마법진의 동그란 빛에서 장막이 올라오더니 돔의 형태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내면 깊숙이 들어갔다.
“그곳이 네 마음의 문이다.”
제인은 마른 웃음을 뱉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걸 과연 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입구는 가림막이 찢어진 형태로 어둠만 토해내고 있었다.
폐허였다.
“문에 손을 가져다 대라. 무언가 나와서 잡아끌면 그대로 들어가면 돼.”
세실의 안내에 따라 제인이 조심스럽게 폐허에 손을 가져가자 가시덩굴이 뱀처럼 기어 나왔다. 가시덩굴은 기괴한 움직임으로 제인의 손목을 할퀴며 잡았다.
그로 인해 피가 맺혀서 떨어졌으나 통증은 없었다.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
이내 가시덩굴이 곧 강하게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문 안으로 들어간 제인이 조용히 생각했다.
숲……?
발에 밟히는 풀의 감각과 냄새는 숲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초승달과 드문드문 박힌 별이 보였다.
밤의 숲이었다.
세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지금부터 보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영역을 지나가기 전까지는 난 네게 그 어떤 안내도, 도움도 줄 수 없어.”
손목에는 문 안에 들어올 때 생긴 상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둑한 숲길을 걷고 또 걷자 눈을 뜰 수조차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들어서 손목으로 눈을 가리던 제인은 눈 부신 빛이 확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한 번에 눈을 뜨기가 어려워 제인은 눈살을 몇 번이나 찌푸리다가 겨우 가늘게 눈을 떴다.
한낮.
파도 소리가 들리는 숲의 절벽이었다.
다이애나가 죽었던, 절벽의 끝.
제인의 동공이 좁아지면서 헉 소리를 삼켜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이 풀렸다. 숨이 막혀왔고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머리가 멍해졌다.
순식간에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몸 가득히 잠식할 때였다.
눈앞에 수없이 많은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빠르게,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