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5)화 (95/168)

95.

얼마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세실이 재떨이에 파탐을 짓이기며 프시오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정보를 모두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고?”

“응. 밀리타에게 이야기 듣고 곧장 엘마뉴엘에 계시는 아저씨께 페브리아에서 접촉해왔는지 여쭤봤어. 아직 없다고 하셔서 접촉해오면 연락 부탁드렸어.”

프시오는 엘마뉴엘에 갔을 때 드래곤 연구를 함께하기 위해 펠드툰과 의견을 바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마법 양피지를 주고받았었다.

“고맙다.”

말과 다르게 세실의 낯빛이 어두웠다.

프시오가 물었다.

“……내일이지?”

“어. 관문을 못 넘을 건 아는데 제인의 정신이 얼마나 박살 날지 감이 안 잡혀.”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그 틈에 호엘리반은 줄곧 신경 쓰였던 걸 세실에게 물어보았다.

“회복될 때까지 네가 봐주기로 했어?”

“그렇게 말하니까 루가 이러던데.”

세실은 루의 오만한 말투를 그대로 따라 했다.

“제인을, 네게, 왜?”

“…….”

“…….”

호엘리반과 프시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착잡한 표정의 세실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내일 나와 같이 술 마셔 줄 사람, 거수.”

지금도 포도주를 마시고 있긴 했으나 호엘리반과 프시오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말없이 손을 들었다.

고개를 젖힌 상태라 그들의 손이 보이지 않았을 세실이었으나, 그대로 찬장에 있던 술병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따자.”

“……비싼 건 귀신같이 알지.”

호엘리반의 말에 세실이 동문서답으로 답했다.

“내일은 독한 게 필요하거든. 아주 독한 거.”

고개를 똑바로 든 그녀는 프시오의 잔이 빈 것을 보고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밀리타는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주입받았대?”

“드래곤의 피를 혈액석으로 가공해서 알약처럼 복용했대. 하루에 두 알, 한 달간. 밀리타 포함해서 스무 명 가까이 복용했는데 다 죽고…….”

잠시 말을 멈춘 프시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에 밀리타 혼자만 살아남았었대.”

“나랑 같은 체질인가 본데.”

호엘리반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복용한 양과 기간이 차이 나니까 다르려나.”

“…….”

프시오는 그대로 굳어서 한마디도 못 했다.

세실 역시 가만히 호엘리반의 안색을 살피다가 미간을 좁히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호엘리반.”

호엘리반은 세실의 부름을 무시하고 프시오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도 비교해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말이 나온 김에 세실, 나 채혈 좀 해줄래? 밀리타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호엘리반, 그만 하세요.”

프시오가 어렵사리 호엘리반을 보며 입술을 떼었다.

“숨 막힙니다.”

엘마뉴엘에서 왔던 날에도 호엘리반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평소에 자기 피와 관련한 이야기를 극도로 꺼려했던 호엘리반이었기에 프시오는 그때도 바짝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세실도 이 상황이 아찔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나 괜찮아.”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면 옆에 있는 제가 힘듭니다.”

“프시오.”

호엘리반은 프시오를 달래듯 부드럽게, 그러나 설득이라기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난 지금도 충분히 빠른 길을 놔두고 돌아가고 있어.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고 드래곤 마석을 주입할 방법을 찾지 않는 한, 네 계획은 승산이 없어.”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맞는 말이었다.

호엘리반의 계획은 당장이라도 시행할 수 있었다.

페브리아 결계의 핵인 드래곤 마석을 산산조각 낸 후, 결계가 풀린 틈을 타 마법 부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계획이었으니.

그러나 프시오의 계획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처럼 계속 페브리아 교황청 문서를 빼돌릴 테니까 프시오는 방법을 찾아줘. 그 외에는 전부 내 선에서 처리할게.”

“……네.”

호엘리반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창밖은 겨울이었다.

흰 눈이 쌓이고 쌓여서 깨끗하기만 한, 그래서 핏자국이 더욱 선명해질 겨울.

“겨울이 끝나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해.”

* * *

집으로 돌아온 세실은 소파에 기대었다.

취기에 정신이 가물가물하면서도 내일 있을 제인의 관문이 걱정스러워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제인은 비위가 약하니 토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옆에 빈 통을 놓아둘까? 아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혀를 깨물지도 모르니 재갈을 물리는 게 낫지 않을까?

재갈을 물리면 토할 때 기도가 막힐 수 있으니 둘 중 하나는 골라야 했으나 쉽게 정하기 어려웠다.

세실은 문득, 이런 거지 같은 고민을 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얼마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세실은 그리 복잡한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신체계로 바꾼 이유도 단순했다.

눈에 보이는 아픔을 보고 지나칠 수 없어서였다.

드호아망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신체계 마법을 배워서 드호아망의 다친 개와 고양이는 죄다 치료해 주고 다녔던 꼬마였다.

인적이 드문 수풀까지 뒤져가며 다친 강아지를 찾고는 왜 여기서 나뒹굴고 난리야, 라고 하며.

그러다 열네다섯 살쯤.

아버지가 생전 데리고 다니지 않았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또래 남자아이를 소개해 주었다.

사전에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았으나 세실은 여자를 보는 순간 알아챘다.

앞으로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건 그렇고, 고급 레스토랑이라니, 정말 너무 안 어울리는 내숭 아닌가?

세실은 아버지가 퍽 웃겼다.

고급 레스토랑이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는 몹시 어색하게 메뉴를 주문했고, 그만큼 어색하게 식사했다.

세실은 그의 뻣뻣함이 웃겨서 속으로 나중에 꼭 놀려드리리라 생각하며 고기를 썰었다. 여자가 간간이 세실에게 질문했고, 세실은 살갑진 않았지만 시원하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여자는 혈색이 창백하긴 해도 미인이었다.

아버지가 눈이 높네.

세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란 존재는 애초부터 세실의 세상에 없었다. 세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던 터라 오히려 어머니의 부재나 그리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 틈을 없애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는지는 아홉 살쯤부터 알아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누군가가 제 어머니의 자리를 꿰차려 든다는 거부감 역시 없었다.

태도가 뻣뻣한 아버지도, 말씨가 자상한 여자도 세실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또래 남자아이 빼고.

남자아이는 상냥하고 살가웠다. 특히나 아버지에게는 잘 웃었고, 먼저 질문도 곧잘 했다. 그만큼 이미 어느 정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호엘리반이었다.

호엘리반!

앙디스에서 온 천재 마법사!

세실은 잠시 놀랐으나, 금세 기분이 개 같아졌다. 그 녀석이 생일이 두 달 빠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오빠가 될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빠.

그 단어에 남자아이가 작게 웃었다.

지금까지의 웃음과는 무척이나 분위기가 다른, 조소에 가까운 미소였다.

세실은 우걱우걱 고기를 씹어 먹었다.

참나. 야, 나도 너 같은 오빠는 됐거든?

네 사람은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세실이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 여자는 몸이 아팠다. 그것도 많이. 온몸에 종양이 퍼져서 오래 살아도 삼 년이 고작이었다.

치료는 불가능했다.

정신계 치유 마법사인 아버지를 통해 고통이라도 덜기 위해 진료를 보다가 서로 마음을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정신계 치유마법으로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렸고, 어머니는 세실에게 가족이 된 지 삼 년 하고도 반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따뜻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살아 계실 적, 세실과 담소 나누는 걸 좋아했다.

-호엘리반이 동생 생겨서 좋아해. 정말로.

세실은 어머니에게 고작 두 달 차인데 왜 자신이 동생이냐고 씩씩거렸다.

-동갑인데 그냥 남매지, 오빠 동생은 무슨!

그러자 어머니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호엘리반이랑 같이 있을 때 사람들이 ‘오빠니? 동생이니?’라고 물으면 ‘남매인데요.’라고 하니?

-네.

-그렇구나. 그럼 세실, 쌍둥이는 어떠니?

다정한 목소리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여자였다.

세실이 학을 떼며 질색했다.

-그건 더 싫어요!

하지만 그녀도 어머니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농담 섞인 장난이 좋았다. 투박하고 거친 아버지와 실랑이하는 것도 좋았지만 어머니와의 대화는 다른 의미로 즐거웠다.

물과 기름 같은 호엘리반과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면 어머니를, 아버지를, 가족을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실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러다 딱 한 번, 마음 아픈 말을 했다.

-엄마가 아파서 미안해.

-얼굴이 예뻐서 괜찮아요. 예쁘면 다 용서되는 세상이야. 몰랐어요?

농담처럼 말을 했지만, 그날 밤 세실은 참 많이 울었다. 소리를 삼켜내는 울음이 얼마나 목구멍을 맵게 하는지 알게 된 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호엘리반은 드호아망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세실은 신체계 치유 마법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어쩐지 말하기도, 결심하기도 어려웠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실의 결정을 반대했다. 그것도 아주 완강하게.

마탑 동기인 프시오가 물었다.

-왜 안 된대?

-전례가 없대. 그래서 안 될 거래.

세실은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래서 해보려고.

세실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례가 없는 건 과거고, 그래서 안 될 거란 말은 미래인데 난 여기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 해봐야 아는 거지!

그녀의 말에 프시오가 담백하게 말했다.

-그래, 해 봐. 내가 도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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