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4)화 (94/168)

94.

라트올은 할 말이 없었다.

호엘리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보다 재능 있는 거, 꼴 보기 싫어요.”

“……하.”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시기, 질투 그런 것들이 모두 싫어요.”

호엘리반은 루의 안목과 미학을 받았고 라트올은 약간의 시력을 받았다. 안경으로 시력을 잡아야만 볼 수 있는 미비한 시력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등한 실력처럼 보였으나, 호엘리반은 그와의 격차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라트올이 세공한 마석은 언제나 자신이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그 이상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라트올은 매번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 갖다 놓았다.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드호아망의 가을 축제 때 납품받았던 라라테를 보았을 때 호엘리반은 뱃속 아래에서부터 꿈틀거리는 열등감과 무력감을 선명하게 느꼈다.

시기이자 질투였다.

호엘리반은 루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 세공된 라라테는 아름답긴 했지만, 원하던 색이 아니었어요.

원하는 색이 아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빛의 각도를, 호엘리반은 그려내지 못했다. 그려내지 못했으니 원하지도 못했다.

시기는 치기를 낳았다.

다시 제작해오라고 한 라라테는 호엘리반이 생각한 그대로의 빛을 띠었다. 치기의 결과마저 참담할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당신이 싫어요.”

라트올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호엘리반은 실없이 웃으면서 세공한 마석을 두고 몽말을 만지작거렸다.

가히 최상급 몽말이었다.

지금 착용하고 있는 안경알보다 서너 배는 품질이 더 좋았다. 이 마석으로 안경을 만들면 어떻게 될까.

라트올을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호엘리반은 허무한 패배가 익숙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당신이 안경을 주면서 손을 떠는 게 좋아요. 당신의 눈과 같은 안경이 내 손바닥 안에 들어올 때가 유일하게 당신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순간이니까.”

몽말을 쥔 호엘리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붉은 빛의 마력이 몽말에 퍼졌다. 몽말은 용암과도 같은 빛을 내뿜더니 곧 안경의 형상으로 뒤바뀌었다.

“그런데 여분 안경을 만들어 달라니요.”

호엘리반은 라트올의 손에 몽말로 만든 안경을 쥐여주며 웃었다.

“싫어요.”

라트올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표정이 어떨지 예상되었다.

질색하고 있으리라.

“……언행일치가 상당히 징그럽다고 생각 안 하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호엘리반이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기존 안경을 여분으로 두고, 지금 만들어드린 안경을 착용하세요. 알고 있겠지만 훨씬 좋은 몽말이에요.”

라트올은 안경을 바꿔서 착용했다. 전반적으로 시야의 감각이 배는 더 살아났다.

몽말의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굴절의 각도를 정밀히 계산해 만들지 않으면 끌어낼 수 없는 감각이었다.

라트올은 황당했다.

이런 능력이 있으면서, 뭐? 내 재능이 싫어? 진짜 또라이 새끼 아니야?

그때 호엘리반이 차분하게 말했다.

“가을 축제 때 세공한 라라테, 처음 만들었던 게 훨씬 좋았어요.”

“알아.”

라트올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호엘리반은 조용히 웃으며 책상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가품을 발견하시면 저한테 먼저 말씀해주세요. 세공 업체는 그쪽이 맞지만 드호아망 이름으로 나간 거잖아요.”

기존의 안경을 주머니에 챙겨 넣던 라트올이 움찔거렸다.

이 자식…… 다 알고 있었구나.

“……어, 그럴게.”

멋쩍어하는 라트올의 태도에 호엘리반은 기분 좋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몽말로 안경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 마법사가 세상에 본인 한 명밖에 없었다면 절대로 만들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이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라트올은 다른 연금술 마법사를 찾아갔으리라.

호엘리반은 안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싫었지만 라트올의 안경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은 더 싫었다.

눈과 같은 라트올의 안경이 자기 손에 들어올 때가 유일하게 우월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은 기분이 더러웠으므로.

“앞으로도 안경 수리할 일 있으면 계속 저한테 오세요. 제가 개 같이 굴어도요.”

“지랄하네.”

라트올은 안경을 살짝 위로 올려 쓰며 이동의 문을 열었다.

“애초에 너만큼 만드는 새끼가 없는데, 무슨.”

호엘리반은 멍하니 닫히는 이동의 문을 보았다.

들끓던 열등감으로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유치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밖으로 꺼내 보였더니 속에서 꿈틀거렸던 시기와 질투가 가라앉았다.

내장 밑에서부터 뜨거운 한숨이 올라왔다.

“싫다, 너무 싫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호엘리반의 말에 프시오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서고에서 돌아왔는지 테이블 위에 갖가지 서류들을 올려놓고 분류하면서 입술을 떼었다.

“저녁에 세실이 식사하러 올 겁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오늘은 바로 퇴근하세요.”

“응.”

호엘리반이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한 채 빙그레 웃으며 불렀다.

“프시오.”

“네.”

“평생을 못 이길 사람이 네 곁에 있는 기분이 어때?”

“……그게 당신이라는 말씀입니까?”

프시오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호엘리반이 능글맞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프시오는 환멸스럽다는 표정으로 다가가서 빈 종이를 한 장 건넸다.

“도대체 어떤 욕을 처먹고 싶은 겁니까?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적어보세요. 다 해드릴 테니.”

책상에 팔을 포개어 눈만 보이게 엎드린 호엘리반이 소년처럼 웃었다. 엎드려 있는 그와 어린아이 모습을 한 프시오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프시오는 그를 보다가 책상 위에 있는 마석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라트올이 다녀갔구나.

힐끔 보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프시오는 호엘리반이 라트올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얼마나 흉하게 표출하는지까지.

호엘리반은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물었다.

“형편없어 보여?”

“네.”

“그리고?”

“사람 같아 보입니다.”

프시오가 호엘리반을 지그시 보았다.

“적어도 제 눈에는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이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형편없는 지금 모습이 나쁘지 않습니다.”

프시오는 책상 위에 놓인 마석들을 하나씩 상자에 주워 담았다.

“늘 뛰어나다는 소리만 듣고 살아왔으니 오만, 자만, 거만, 교만이 뼛속까지 베여있지 않습니까? 물론 밖에서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요.”

대외적으로 호엘리반은 강하면서도 상냥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집권자이자 마탑주였다.

더군다나 아버지에게까지 좋은 아들의 모습으로만 대하고 있으니 그의 이면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자신과 세실 정도였다.

사람이 아닌 것을 포함하면 둘이 더 있지만.

“앞으로 겸손만 하면 되겠습니다.”

상자에 마석을 모두 넣은 프시오는 덮개를 닫고 호엘리반에게 밀어 주었다.

“사람처럼 보이는 데까진 왔으니, 이제 사람이 되세요.”

호엘리반은 미소를 지으며 상자 위에 올린 프시오의 손을 잡았다. 무척 작은 손이었다.

호엘리반은 그녀의 손을 만지며 상체를 세웠다.

“가혹해. 왜 하필 이렇게 작은 어린아이로 변하는 저주를 걸었어? 눈이 세 개가 된다든지 그런 저주도 많잖아.”

“……저주를 걸지 않았길 바라는 게 정상 아닙니까?”

“바랐다면.”

호엘리반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바랐다면, 안 했어?”

“…….”

“내게 바랄 기회는 줬어?”

프시오는 눈꺼풀을 내리고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고개를 다시 든 그녀는 문득 그가 앉은 자리의 뒤편 벽에 꽂힌 단검들을 발견하고는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앙디스입니까.”

호엘리반도 말없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프시오는 그의 뒷자리로 가서 벽에 꽂힌 검들을 하나씩 뽑았다.

집무실 안에는 강력한 보호 마법을 쳐 놓았기에 날아오는 속도에 제한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손으로 만져보니 역시 마력이 낮은 마법이 걸려있었다.

이런 마법으로 종일 공격한다고 해도 호엘리반에게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 뽑고 뭐 했습니까? 인테리어 소품으로 마음에 듭니까?”

“좋아서.”

“……다시 꽂을까요?”

황당해하며 물어보자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프시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번 더 소년처럼 웃었다.

“프시오가 내 걱정해주는 게 좋아서.”

* * *

세실은 앉은 자리에서 파탐을 네 개비째 피우고 있었다.

내일 있을 제인의 관문 생각만으로도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복잡한데, 프시오가 하는 이야기는 식사 내내 소화 불량을 일으켰다.

정적 속에서 호엘리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마드리안 교황이 드래곤의 마석을 탐내기 시작했던 게 콜드리센 때부터였다는 거네. 그다음이 앙디스였었고, 다음 타깃은 예상대로 엘마뉴엘이 되겠지.”

프시오가 대답했다.

“네.”

호엘리반은 앙디스인이었으나 앙디스에 애정이라고는 쌀알 한 톨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담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콜드리센인이었던 프시오가 저처럼 담백하게 대답하는 건 마음에 걸렸다.

“프시오.”

호엘리반의 마음을 읽은 프시오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당시 콜드리센의 테라얀과 페브리아의 마드리안이 각각 묘략을 펼쳤고, 페브리아가 승기를 잡은 겁니다. 그뿐이에요.”

그녀는 묵묵하게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적군의 진영으로 더 들어가지 않고 멈출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관련된 기록물을 다시 찾아봐도 그때 콜드리센이 모든 병력을 셀로느에 집중했던 건 실수이자 오만이었고 욕심이었습니다.”

호엘리반과 세실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기록물을 찾아봤구나!

프시오가 비워진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승리에도 도수가 있으니, 거기에 취하다 보면 이성을 잃기 마련이니까요.”

호엘리반과 세실은 또다시 같은 생각을 했다.

냉정해!

호엘리반은 문득, 집무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분류하던 기록물을 아무런 보고 없이 정리하던 프시오를 떠올렸다.

그게 테라얀 로디테와 관련한 기록물이라 생각하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장씩 넘겨보던 그녀의 표정에 새삼 닭살이 돋았다.

호엘리반은 그런 프시오가 무척 좋았다.

소름 끼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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