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3)화 (93/168)

93.

반딧불이를 따라 걷는 제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한소끔 가라앉은 질투에 열기가 아직 식지 않고 있긴 했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그 사랑의 묘약과 루의 현혹이 전부 뒤섞여서 자신의 진심을 가려내기 어려웠다.

몇 번일까. 너는 몇 번이나 나를 홀렸을까. 처음부터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제인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난 네게 몇 번이나 홀렸어?”

루는 걸음을 멈췄다.

정면을 향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잿빛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몇 번?

검은 새의 모습으로 처음 봤던 그 날, 허술한 덫을 풀기 위해서 제인에게 현혹을 사용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홀려지지 않았고, 루는 그 뒤로 그녀에게 그 힘을 쓴 적이 없었다.

“없어. 한 번도.”

제인이 고개를 들어서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눈동자의 주인이 웃었다.

세상 어떤 죽음에도 무덤덤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너를 홀릴 바에는, 죽을 거야.”

* * *

“제가 아는 모든 걸 말씀드렸어요.”

프시오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페브리아와 마드리안 교황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하면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밀리타도, 그녀가 말한 내용도 모두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밀리타, 당신은 어떻게 이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던 거죠?”

“고위 직급 분들께 예쁨받았었거든요.”

밀리타가 낭랑하게 웃으며 침대에서요, 라고 덧붙여서 찻잔을 잡으려던 프시오의 손이 약간 허둥거렸다.

그러다 부산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제인은 옴푸푸스 풍토병의 내막을 알고 있나요?”

“글쎄요. 자세한 얘기는 나눠보지 않아서요. 확실하진 않지만 제 생각에 제인이라면 아마 옴푸푸스 풍토병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느끼고 있을 거예요.”

밀리타가 낮고 명료하게 말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

밀리타가 아는 제인은 대외적으로 밝혀진 원인 외에 분명 석연찮음을 느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옴푸푸스는 제인의 손에서 종식되었고 그 이후로 페브리아 내에서 다른 풍토병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녀도 더는 파고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그래서 석연치 않음에 근거가 따라붙었다면 처음부터 교황청에서 요청한 모든 연구서류를 순순히 넘겨주지 않았을 터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프시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페브리아의 결계, 마드리안 교황의 신의 손, 옴푸푸스를 비롯한 지금의 돌림병까지 그 모든 게 정말 드래곤의 마석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마드리안 교황의 다음 타깃은 아마…….”

밀리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시오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엘마뉴엘이겠군요.”

“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틀림없이 노릴 거예요.”

* * *

제인의 닷새는 평화로운 여름에 머물러 있었다.

약속한 대로 루가 요리하면 제인이 그릇을 씻었다. 낮에는 계곡에서 수영하거나 그늘막에서 새들이 가져온 간식을 먹었다.

루는 여유롭고 안락한 그늘 밑에서 종종 숲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시를 읽었다.

“시를 좋아해?”

“시는 마음의 파편이니까.”

제인은 루가 읊는 시가 이해되지 않는 단어의 나열 같았으나 이상하게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해되지 않지만 아름다운 데시안은 시를 읽고, 포도주를 마셨으며, 낮잠을 잤다.

그가 고른 숨을 쉬며 낮잠을 잘 때마다 제인은 나태하고 권태로운 그의 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서 관문을 넘기 위한 연습을 하곤 했다.

인간들보다 훨씬 잠귀가 예민한 루는 제인의 행동을 모르지 않았다. 행동이 마음에 들지도, 이해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 할 일을 마치고 다시 품속으로 들어오는 게 귀여워서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둘은 여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원 없이 산책했다.

별장 숲에는 갖은 약초와 독초가 널려 있었다. 제인은 불쑥 ‘이게 여기서도 나네!’라고 하면서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루에게 식물의 효능을 말해주곤 했다.

“재미있지 않아? 먹으면 독이지만 바르면 약이 되기도 한다는 게. 그리고 어떤 건 양에 따라서 독이 되고 약이 되기도 해. 독이지만 독이 아니고, 약이지만 약이 아닌 거야.”

“…….”

“듣고 있어?”

“아니.”

“……그래, 됐다.”

“계속해.”

“안 해. 안 듣잖아.”

루는 제인의 손을 잡고 즐겁게 웃었다.

“계속해. 네 목소리는 듣기 좋으니.”

그러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쾌락과 절정이 깃든 시간을 보냈다.

루는 관계를 한 후에 제인의 몸을 씻겨주는 것을 즐거워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부터 부드러운 살결과 굳은살이 박인 발바닥까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씻겨주었다.

처음에는 질색했던 제인도 나중에는 나른하게 몸을 풀고 그에게 맡겼다.

그렇게 제인은 마법을 연습하는 시간 외에는 먹고 자고 마시며 사치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향락과 쾌락에 흠뻑 젖은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닷새째가 되는 날.

루와 함께 한낮의 포도주를 즐기며 발을 까딱거리던 제인이 물었다.

“너는 안 늙어?”

“응.”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겠지?”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루가 삼키지 않고 그대로 제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 안에 고여있던 술을 마신 제인은 얼굴을 붉히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려 했다.

그녀의 손을 잡은 루가 입술에 맺힌 포도주를 대신 핥았다.

“오래 살고 싶나?”

나긋한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했던 제인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만약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환생과 지금의 삶을 아주 오래오래 지속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할 거야.”

이어서 장난스레 검지를 가로로 휙휙 저었다.

“또 태어나는 건 싫거든.”

“어째서?”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잖아. 하지만 태어난 이후에는 선택할 수 있어. 살아갈지, 죽을지.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갈지.”

제인은 루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포도주 맛이 났다.

무척 달콤하고, 취할 것 같은.

“내가 너라는 절망을 선택한 것처럼.”

* * *

집무실에 있던 호엘리반은 라트올을 보며 빙긋 웃었다.

“싫은데요.”

라트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주억거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개같이 굴지.

“왜 싫은데?”

“여분 안경을 만들어 주면 지금 착용하고 있는 안경이 망가져도 재깍재깍 안 올 거잖아요.”

“그런데?”

“그래서 싫어요.”

“…….”

라트올은 근래 들어 무척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루가 없는 사이 혼자서 녹니스를 만들었으며 명계에 이어 연옥에도 성실하게 납품하러 갔다.

연옥의 담당관인 솔레리안의 상태는 저번보다 더 심각했다. 그녀는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 줄줄 읊어댔다.

라트올은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녹니스의 문제점을 한 시간 동안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호엘리반에게 온 게 불과 십 분 전이었다. 라트올은 드호아망에 납품해야 할 마석과 함께 몽말을 그에게 주었다.

-여분 안경 좀 만들어줘.

-싫은데요.

라트올은 어이가 없었다. 싫은 이유까지 들어봤으나 그마저도 얼토당토않지 않아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작은 의문이 들었다.

이게 사람 새낀가?

라트올이 숨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왜 싫은데, 이 또라이 새끼야.”

“안경이 망가질 때마다 와서 애걸복걸하는 꼴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요. 저보고 그걸 포기하란 말이에요?”

“……애걸복걸?”

호엘리반이 책상에 턱을 괴고 웃었다.

“모르나 봐요? 안경 망가질 때면 손 떨잖아요, 당신. 나는 그게 그렇게 보여요.”

라트올은 탄식했다.

주변에 미친놈은 주인님 하나로 족하거늘.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라트올은 명계에서 나름대로 이름이 꽤 알려진 메 데시안이었다. 으뜸인 미모와 마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이목을 끌었던 건 인간이 악마라 통칭하는 그들의 본성과는 다른 성실함과 인내심을 가진 성정이었다. 흠이라면 완벽주의에 따른 극악무도한 잔소리와 실명했던 눈 정도.

그런 인내심을 가진 라트올이 인간계에 와서 꾸준하게 진절머리 치는 인간이 바로 호엘리반이었다.

라트올이 말했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겠어.”

“네.”

“근데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어. 좋아할 이유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개 같이 굴 이유라도 있어?”

“하하, 그것도 몰라요? 당신은 정말 아는 게 없네요.”

……죽일까.

라트올은 제법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주요 고객이라 지금까지 안 죽였던 이유가 제일 큰데 그냥 죽여버릴까. 죽이고 루한테는 뭐라고 하지? 주요 고객이자 당신을 봉인에서 풀어준 새끼가 너무 좆같아서 죽였어요?

젠장……. 내가 그때 왜 살려줬을까.

미쳤지, 돌았지.

라트올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였다.

호엘리반은 라트올이 가져온 납품 상자를 다시 열고 세공된 마석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하나같이 마도구를 만들기에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된 마석이었다.

호엘리반이 말했다.

“나는 당신 눈이 싫어요.”

라트올은 헛웃음이 나왔다. 뭐라고 더 지껄이려나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호엘리반은 앞에 놓인 마석 하나를 들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하게 반사되는 광택을 무감하게 보았다.

“당신 안목이 싫고, 당신 능력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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