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2)화 (92/168)

92.

푸른 눈동자에 제인이 담겼다. 고요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루가 물었다.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건가.”

“응.”

루는 차갑고 흰 손으로 제인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불안정한 맥박, 식은땀, 공포로 얼룩진 감정이 묻어 나왔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주제에, 잘도.”

제인은 나직하게 웃으며 그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비가 갠 한낮의 여름 속, 루의 몸에서 나오는 냉랭한 온도가 좋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제인은 난롯가 옆 탁자에 포도주잔을 올려두고 바닥에 몸을 뉘었다. 루를 올려다보면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루가 옆으로 누워 저를 마주 보자 제인은 미소를 지었다.

“……다이애나를 만나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야. 슬픈 일이긴 하지만.”

“그럼 뭘 두려워하지?”

마음의 문.

그 안에 다이애나가 있을 것이다.

“괴물.”

그리고 괴물이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있을 끔찍한 나.”

입꼬리를 올리며 짧게 웃던 제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루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깜빡이는 그녀의 눈보다 더 느리고, 천천히.

어느새 제인은 까무룩 하게 잠이 들었다.

루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별장 안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제인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뒤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풀잎과 비가 섞인 흙냄새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어느 밤과 비슷한 낮이었다.

인간 하나가 잠들었을 뿐인데 숲의 소란스러움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고요한 적막 속.

그의 귓가에 미치광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제인이 너를 구원해 준다면 나는 밤하늘의 별이 되고 너는 사랑하는 인간을 잃게 될 거야.

몸을 돌린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잃을 리가.”

* * *

밀리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꼽으라면 버림받는 것이었다.

버림받는 것.

그것은 나약하고 무력하기 때문이다.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강해져야 했고 쓸모 있어야 했으며 누군가가 자신을 원해야 했다.

버림받지 않는 것.

오직 그 하나를 위해 달려온 삶이었다.

그 삶에 선과 악, 옳고 그름과 같은 도덕적 윤리 의식 따위는 없었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주워가며 달리기에는 밀리타가 있는 곳은 너무나 밑바닥이었다.

어느덧 밀리타가 쥔 검은 그녀와 마주 선 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그어 놓았다.

암살자와 시체.

짧은 문장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밀리타가 살아온 시간은 그리 간결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쥐는 피부의 감각, 살을 파고드는 찰나의 순간, 터져 나오는 피 냄새와 부서진 그림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이 전부라고.

부유하는 먼지같이 살았다.

그런데도 늘 땅을 디디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버려지지 않을 만큼 높이 올라가서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먼지가 아니라, 사실은 민들레 홀씨라고 믿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도망칠 수 있는 페브리아에서 떠나갈 수 있는 언젠가를 기다렸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카이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날조차도 페브리아는 밀리타에게 고향이었다. 뿌리를 내리고 싶었던 소중한 땅이었다.

“밀리타.”

프시오의 부름에도 밀리타는 손에 쥔 서류를 무감하게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실종 사망서.

페브리아 교황청에서 발행한 그 서류에는 밀리타의 이름과 약제사 신분, 기타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마드리안 교황의 수락 아래 페브리아 떠나온 밀리타였다.

적어도 3년 후에야 발행되어야 하는 서류였다.

버림받은 것이다.

또.

“그렇군요.”

밀리타가 나직이 웃었다.

“버림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버렸어야 했군요.”

프시오는 마주 앉아서 가만히 바라볼 뿐 밀리타에게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육원을 후원하면서 품었던 의문이 있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답을 내리기 어려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는 건 시간이 아니었다.

시간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넘어지고 쓰러진 아이들을 두고 가버린다. 흐르는 강물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게 되면 그대로 고여버리거나 거친 물살을 만나서 휩쓸리듯 껍데기만 어른이 되어버린다.

어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진부한 것이다.

따뜻한 사랑.

사랑의 총량이 채워지면 어른이 된다. 채워진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좋은 어른.

프시오가 밀리타를 직시했다.

“아뇨.”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밀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똑똑히 들으세요. 당신은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버리지 마세요. 그 땅에 다시 설 수 있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프시오는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여전히 작은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누군가에게 내밀어 줄 만한 손이 아니었다.

“저를 믿으라는 버거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딱히 좋은 어른이 아니라서요.”

밀리타에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

“…….”

“주세요.”

잠시 고민하던 밀리타가 쥐고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

프시오는 서류를 천천히 찢었다.

찢긴 서류가 힘없이 테이블 위로 날리며 떨어졌다.

“하지만 제 약속은 믿어도 됩니다. 약속을 함께 지켜 줄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프시오는 검지로 밀리타와 자신을 번갈아서 가리켰다.

“우리 곁에요.”

* * *

제인은 대체로 질투를 받는 쪽이었다.

이를테면 연구를 가장한 가학적인 자학에 따라오는 것들이 그러했다.

독과 해독제를 수년 동안 복용하던 자학은 몸과 마음을 너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는 시기와 질투가 불순물처럼 달라붙은 명성과 명예를 안겨주었다.

꽤 마음에 드는 불순물이었다.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한 제인에게 불순물은 그녀를 오만에 이르게 하는 달콤한 것이었다.

질투란 그런 것이었다.

달콤한 것.

그토록 달콤한 것이 발산될 때는 달지 않다는 걸 호엘리반을 통해서 한 차례 배웠다. 구태여 두 번, 세 번 익히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제인은 별장의 창문을 열고 문틀에 두 팔을 포갰다.

“너는.”

제인의 부름에 머리통 두 개가 그녀를 보았다. 미소를 머금은 제인은 몸서리치도록 들끓는 질투를 목구멍으로 삼키며 말했다.

“너는 막 끼를 부리네?”

루는 옆에 있던 님프를 힐끗거리다가 제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인.”

달콤한 것을 먹은 얼굴로.

제인이 이렇듯 질투에 활활 타오르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포도주 한 병을 비우고 루와 함께 낮잠을 잔 그녀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와중에 별장의 문이 덜컥거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루는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이윽고 좋지 않은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이유 없이 기분이 더러운, 그런 느낌.

제인은 밖이 잘 보이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바깥 풍경을 본 제인의 입가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인적이 드문 숲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예쁘장한 여자가 루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처럼.

-너는 막 끼를 부리네?

루는 그 말이 달았다.

잘 익은 열매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 더 탐을 내볼까, 할 때였다.

제인이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라는 듯.

루는 그녀의 손짓에 가볍게 웃었다.

순종적이어야 하는 건 제인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제인을 사랑했고, 휘둘리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루가 창문 가까이 다가가자 제인이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뭐 해?”

커다란 창문은 제인 하나 나오기에 충분했다.

루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이내 그녀의 팔을 당겨서 순식간에 품에 안았다.

당황한 제인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그는 님프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별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자 님프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별장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제야 루가 말했다.

“난 게으르거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제인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주변은 늘 깨끗하고 쾌적하길 원해.”

루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별장 앞마당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자 투명한 아지랑이가 벽처럼 일렁였다.

“그래서 별장 앞에 덫을 놓았지.”

“덫은 뭐하러.”

“청소나 하라고.”

“뭐……?”

“마침 님프 하나가 걸려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아무거나 잡아 올 참이었어.”

제인은 별장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루의 말대로 님프가 부엌에서 그들이 먹은 것들을 홀린 듯이 치우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제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루는 끼를 부린다던 그녀의 말과 질투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즐거운 듯 킬킬 웃었다.

제인이 물었다.

“난 속이 터지는데, 넌 즐거워 보이네?”

“응.”

다행히도 그녀는 이럴 때마다 외우는 주문이 있었다. 이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이 새끼는 사람 새끼도, 개새끼도 아니고 악마 새끼다.

제인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루에게 한 번 더 손짓하자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고분고분하게 허리를 숙여주었다. 한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린 제인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 상상해봐.”

제인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봄의 한 가운데에 내가 있어. 주변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나비 떼가 날아다녀.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야. 내 앞에는 한 남자가 있지.”

“…….”

“나는 그 남자를 보면서 웃고 있어. 그런데 그게…….”

“…….”

“네가 아니야.”

곧바로 제인의 손이 끌어 내려졌다.

다분히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보며 제인은 수긍하듯이 주억거렸다.

“지금 내 기분이 그래.”

“……고맙군. 같은 기분으로 만들어 줘서.”

“설거지는 내가 하면 돼. 넌 지금처럼 맛있는 요리나 잔뜩 해줘.”

루는 그녀의 말이 온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인은 별장 안으로 시선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미 홀린 님프를 쫓아내기도, 그냥 들어가기도 싫었다.

“기분도 더러운데 산책이나 하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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