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제인을 바라보던 루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일정하지 않았다.
느리거나 빠르게, 또는 멈추다가 흘러갔다. 중심에는 항상 제인이 있었다. 루는 영원 같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뺨을 만지자 시간이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과 혀가 닿으면서 시간은 또 흐르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느린 입맞춤 끝에 눈을 뜬 제인은 흐트러진 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루는 앞만 보며 걸어가는 제인을 느긋하게 따라갔다.
“괜찮아. 내 시간도 엉망진창이거든.”
“무슨 뜻이야?”
제인의 미심쩍은 물음에 루는 다정하게 답했다.
“사랑한다는 뜻이야.”
우뚝 멈춰 선 제인은 손바닥으로 심장을 두드리면서 또다시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햇살이 드러났다. 이윽고 맑게 갠 하늘 아래 빗방울을 머금은 숲이 명료하게 빛났다.
루가 제인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제인, 저기 봐.”
숲 아래 전방에 크고 선명한 무지개가 걸쳐있었다.
제인은 문득,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아주 행복한 꿈.
사랑하는 이와 시원한 비를 실컷 맞고, 심장에 해로운 입맞춤을 하고, 비가 그친 숲에서 무지개를 바라보는 순간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마워. 좋은 꿈을 꾸게 해줘서.”
루가 제인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젖어서 뭉친 은빛 머리카락, 이마부터 턱 끝까지 땀처럼 맺힌 빗방울, 무지개를 담은 잿빛 눈동자.
모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꿈이라면 슬플 만큼.
“꿈일 리가.”
그의 대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제인이 무지개를 가리켰다.
“그럼 저거 갖고 싶다고 하면 줄 수 있어?”
“제인, 나는 무지개 요정이 아니야.”
루가 방긋 웃었다.
“하지만 무지개 요정을 산 채로 잡아다 줄 수는 있지.”
제인도 방긋 웃었다.
“됐거든.”
별장으로 돌아온 제인은 곧바로 따뜻하게 데운 물에 몸을 씻었다.
욕실 밖으로 나온 제인은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루가 피워놓은 난롯가에 앉았다.
여름이었으나 기온이 낮은 데다 비를 맞고 와서 그런지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습도가 높아서 불을 지피자 공기가 가벼워졌다.
별장 위층 욕실에서 씻고 나온 루가 포도주와 잔 두 개를 가지고 와서 제인의 곁에 앉았다. 제인은 포도주와 루를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지금?”
“지금.”
비가 갠 맑은 오후였다.
루는 코르크를 따고 나른하게 말했다.
“같이 비를 맞아 주었으니, 이번에는 같이 술을 마셔 주었으면 하는데.”
“아직 낮이잖아.”
“마시고 낮잠 잘 생각이거든.”
자신의 술주정이 퍽 충격이었던 제인은 그날 이후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게다가 ‘또 마시면 그건 사람 아니야. 개지.’라고 엄포까지 놓지 않았던가.
루는 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마셔도 되지 않나.”
이어서 제인의 손에 포도주잔을 쥐여주었다.
“어차피 내 강아지니까.”
* * *
그 시각, 명계.
마석을 닦던 다간은 라트올을 멍하게 보며 생각했다.
소문이 사실이구나.
라트올이라는 메 데시안의 미모는 앞으로 백 년 동안은 없을 거라던데. 그럼 라트올이 모신다는 데시안의 외모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소문도 사실일까?
“……얼굴 뚫리겠다.”
라트올의 말에 다간은 자신이 그를 너무 빤히 보았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사과했다.
“미, 미안해!”
“채굴장 소속이네.”
평생을 명계의 마석 채굴장에서 지낸 다간은 헉,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명계의 마석은 채굴되기 전후의 농도가 달라서 잔여 마력이 묻는다. 하지만 그건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트올은 타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채굴장 소속이 왜 여기 있어?”
“하하…… 신입이야. 며칠 전에 채굴장에서 데려왔어.”
타타가 땀을 삐질거리며 어색하게 웃자 라트올의 미간이 팍 좁아졌다.
“신입?”
“어어, 내가 요새 들어서 눈도 침침하고 혼자 일하려니까 힘들어서, 하하하…….”
라트올의 얼굴이 전보다 더 구겨졌다.
“나는 눈이 안 보였을 때도 잘만 일했었는데? 명계에서 나는 마석은 손으로만 만져봐도 마력, 농도, 색상, 중량, 등급까지 전부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타타는 라트올이 말도 안 되는 것들로 타박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졌다.
“내가 너랑 같냐?”
몇 마디 더 하려던 라트올은 구석에서 마석을 닦으며 자신을 힐끔거리는 다간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타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부나 줘.”
“자, 여기. 정산은 매입장에서 하고 갔어. 확인해 봐.”
장부를 확인하던 라트올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몽말을 이 값에 올렸어?”
거저 주는 것과 다름없는 값에 라트올이 다시 한소리 할 기세로 얼굴을 들었다.
타타는 장부를 빼앗아 들면서 명계 입구 쪽을 가리켰다.
“야, 너 그냥 가라. 잔소리 듣기 싫다.”
“이럴래?”
“원래 너 주려고 빼둔 거였어! 네 안경, 몽말로 만드는 거잖아. 몽말 중에서도 그만한 투명도는 몇 년간 보기 힘들어.”
“…….”
“내가 주고 싶어서 챙겨둔 거니까 잔말 말고 그냥 받아.”
“재고 확인 없이 왔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주려고 하기도 전에 찾으러 와서 김샜던 거거든?”
“……고맙다.”
타타는 라트올에게 장부를 돌려주며 어물쩍거렸다.
그사이 다른 기록까지 모두 확인한 라트올이 타타에게 장부를 돌려주었다.
타타가 장부를 받아들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어떻게 지내는 거야……?”
“잘.”
“아…… 잘 지내는구나…….”
“왜.”
“네 주인님, 다시 봐도…… 어…… 그러니까…… 조금 제정신 아닌 것 같아서.”
라트올이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조금?”
그리고 자신의 관자놀이 쪽으로 검지를 빙빙 돌렸다.
“조금 돌아 보인다고?”
타타는 영혼 없이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많이 돌아 보이더라.
* * *
제인은 포도주 한 병을 비워냈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불 꺼진 난로 앞에서 포도주를 마시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루. 나는 관문을 못 넘고 망가질지도 모르겠어.”
제인이 아는 세실은 말에 보탬이나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것이든 설명에 있어서 가늠의 수치가 대부분 정확했다.
-정신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어. 그래도 해야겠니?
아마 그 말도 사실에 근접했으리라.
루가 대답했다.
“세실도 그렇다고 하더군.”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어?”
“망가지라지.”
루가 산뜻하게 말하며 제인의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었다.
채워진 잔을 보던 그녀는 무구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말했어?”
“응.”
“그래, 다행이네.”
“……다행?”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제인이 잔을 내려놓고 루를 응시했다.
“나 때문에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플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절대로 슬퍼하지 마. 망가지라지, 그런 개 같은 태도를 유지하라고.”
루는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제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더 망가질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세실의 말을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망가지게 될 거예요.
애초부터 망가져 있었고.
-최악의 경우 자해나 자살 시도로 이어질 수 있어요.
수없이 많은 발버둥을 보았으므로.
그녀의 관문 또한 지금까지와 다름없는 발버둥 중 하나일 것이다.
루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런데, 알면서 왜 하려 들지?”
제인은 짧지 않은 침묵을 끌다가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난로에 시선을 머문 채 입술을 떼었다.
“죽어서 나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있어.”
그녀가 덧붙인 이름은 루에게도 낯익었다.
“다이애나.”
루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시간을 거슬러 순식간에 그레데엘므의 진창으로, 밑바닥으로, 꽃무덤으로 빠르게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이애나.
흔한 이름이지 않은가.
이어지는 제인의 목소리가 그레데엘므의 꽃무덤에 있던 루를 다시 여름의 별장으로 돌려놓았다.
“그 여자는 나 때문에 바다에 빠져서 죽었어.”
무표정하고 무덤덤한 그녀를 셀 수 없이 봐온 루였다.
그러나 지금의 얼굴은 무척 낯설었다.
인간의 음습한 마음을 파고들어서 현혹하는 데시안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깊은 어둠에 잠식되어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이 얼굴이야말로 제인의 민낯임을.
“무덤도 없이 죽은 여자는 어느 날부터 악몽이 되어서 나를 따라다녔어. 그러다 혼자서 바다에 빠졌을 때, 그 여자가…….”
제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꿈 바깥으로 나왔어.”
잿더미에 한참을 머물러 있던 제인의 시선이 루에게 닿았다.
“꿈 바깥에 나온 다이애나가 까마득한 심해에서 나를 끌어당겼어. 그리고 순간 깨달았어.”
제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아, 내가 죽어야만 저 여자에게서 벗어나겠구나…….”
“…….”
“죽으려고 했어.”
그때 제인은 바다에 몸이 가라앉던 게 아니었다.
스스로 더 가라앉힌 것이었다.
아래로, 더 아래로.
“그런데 그때 네가 생각났어.”
바다에 저를 가라앉히던 찰나.
자신을 제게 달라던, 그래서 지금보다 더 어두운 진창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심장과 영혼을 달라던 그의 말과 공허가 떠올랐다.
“눈을 떴는데 거짓말처럼 네가 살려준 거야.”
고개를 돌린 제인이 포도주를 마저 들이켰다.
“있지, 난 그때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해.”
그녀는 살면서 그 순간만큼 밀려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살아난 게 아니라 두 번째 목숨 같았다.
다이애나가 따라다니는 두 번째 삶.
그 삶에서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면 스스로 절망을 선택하고 싶었다.
“너에게 나와 내 절망을 준 이유야. 네 덕분에 당장은 악몽에서 달아났지만, 그 여자는 여전히 날 따라다니고 있어. 이대로는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거야.”
드래곤을 타고 엘마뉴엘로 갔을 때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제인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물렸다.
“그래서 만나고 싶어.”
세실과 펠드툰 아저씨가 말했던 마음의 문.
그 안에 다이애나가 있을 것이다.
“내 안으로 들어가서 다이애나를 만나야 해. 그래야만 끝이 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