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0)화 (90/168)

90.

그레데엘므는 엔니오를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조각했던 엔니오의 작품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레데엘므는 그의 앞에서 그의 작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읊었다.

꼭 시를 낭송하듯이.

그뿐만 아니라, 로안나가 신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던 노래의 제목부터 가사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알고 있었다.

-신을 사랑하는 손님, 그거 알아?

그레데엘므는 입술을 잠시 다물었다가 열렸다.

-지금 천계의 모든 결정은 천사들이 한다는 거 말이야. 신은 존재해. 그리고 당신들을 사랑하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이어서 두 손으로 엔니오의 뺨을 감쌌다.

-아무것도.

이어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 손님도 똑똑히 봐.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을. 손님을, 손님의 아내를, 그리고 나를 그저 바라만 보는 신을.

엔니오는 눈물을 닦고 나서야 그레데엘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을.

그의 눈을.

그의 눈에 담긴 무엇을.

-어떻게…….

엔니오는 그레데엘므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해! 그것도 신을 사랑하는 눈으로!

신을 사랑하는 엔니오는 알아보았다.

그레데엘므의 눈에 담긴 것은 신을 향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증오였고 애증이었으며 애정이었다.

결국, 사랑이었다.

엔니오는 시간이 잠시 멈춘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목이 졸리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레데엘므는 울고 있었다.

눈물 없이 우는 얼굴을, 엔니오는 처음 보았다. 살면서 두 번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지독하고도 오래된 슬픔이었다.

그렇게 시야가 까마득해지던 순간, 다시 숨이 쉬어졌다.

-……싫네.

그레데엘므의 웃음소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신에게 보내주기 싫어졌어.

엔니오의 목에서 손을 뗀 그레데엘므는 주저앉아서 콜록거리는 그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급히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명령하는 투로 말했다.

-더 살아.

-……죽어도 그럴 생각이었어. 로안나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

엔니오는 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로안나를 사랑했다.

적어도 로안나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다짐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레데엘므가 방긋거렸다.

-궁금해.

그는 엔니오의 머리채를 더 세게 부여잡으며 말했다.

-사랑의 묘약은 축복이자 저주야. 누군가에게는 축복이고, 누군가에는 저주지. 손님과 손님 아내의 결말은 어떨까. 과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같은 예쁜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

-궁금해졌어.

그레데엘므는 엔니오의 머리칼을 툭 놓았다.

-가.

-…….

-나는 변덕이 심해. 얼른 가.

-……로안나는 깨어날 수 있나?

그레데엘므는 엔니오의 목에 난 붉은 손자국을 멍하니 보다가 말했다.

-신에게 묻고, 신에게 빌어. 아무것도 안 하는 신에게.

엔니오는 어쩐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걸음마다 무겁고 진득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문 앞에 다다른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신에게 못 가는 건가.

-내가 한 짓을 좀 봐. 갈 수 있겠어?

검붉은 날개가 사라진 그는 엔니오에게서 등을 지고 서 있었다.

-그래도…… 별이 되면 조금 가까워지려나.

엔니오는 여전히 그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몇 번이고 죽어 있었다. 죽고 죽어서 우는 법을 잊어버린 모습으로 슬퍼하는 인형 같았다.

그 인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단 한순간이라도 가까워지면, 나는 기쁘려나.

그렇게 엔니오는 타락한 천사의 닳아빠진 슬픔을 뒤로한 채 향수 가게의 문을 나섰다.

“엔니오.”

프시오의 부름에 엔니오는 뒤늦게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시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타락한 천사를 만났다고…….”

프시오가 염려스러움에 말을 끝맺지 못하자 엔니오는 괜찮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이어서 그자에게 묘약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자를 만나고 알았어요. 로안나를 향한 제 사랑은 평생을 다 바쳐도 모자라서 원망하거나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걸요.”

원망하거나 슬퍼할 시간이 없다.

엔니오는 강한 사람이구나.

프시오는 자신의 손을 펼쳐 보았다. 자신에게 저주를 걸기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모습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으려나.

그때 엔니오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안나는 살아 있어요. 언젠가 깨어날 거라고, 사랑의 묘약 저주도 풀릴 거라고 믿어요.”

원망과 슬픔에 멈춰져 있던 엔니오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로안나를 사랑했다.

신에게 기도했으며 가진 재능으로 주어진 일을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엔니오가 옅게 웃었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지만, 살아가다 보면 동화 같은 순간들이 틀림없이 올 테니까요.”

프시오는 이어지는 엔니오의 말에 두 사람의 미래를 구태여 불행에만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당신이 써준 주례사처럼요.”

프시오가 나직이 미소 지었다.

“네, 그럴 겁니다.”

* * *

엔니오를 만나고 귀가한 프시오는 서재에 앉아있던 호엘리반을 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퇴근하신 겁니까?”

그가 야근하지 않고 제시간에 퇴근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호엘리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프시오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페브리아 외곽에서 원인 모를 병이 돌고 있어. 외곽이라고 해 봤자 그 나라의 속국인 변방이지만.”

“결계는요?”

“이제 막 돌기 시작해서 아직 큰 변화는 없어. 증상도 피부 습진 정도인 데다가 환자가 속출하는 속도도 느려.”

“돌림병입니까?”

“단순한 돌림병인지 그게 아니면…….”

그가 다소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의도한 연출인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프시오는 마드리안의 신의 손 사건이 제인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호엘리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는 풀어지지 않는 호엘리반의 얼굴을 살폈다.

“마드리안 교황이 벌였던 신의 손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까? 하지만 제인은 지금 페브리아가 아니라 루와 함께 있지 않습니까.”

호엘리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선은 계속 주시할 예정이야. 그리고 이건 보름 전에 페브리아에서 발행한 서류인데…… 한번 확인해 봐.”

호엘리반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서류를 받아 확인하는 프시오의 안색이 확연하게 어두워졌다.

“알지? 시기상 맞지 않는다는 거. 제인은 제 발로 도망쳐서 나왔다고 해도, 밀리타는 그게 아니잖아.”

“……카이는요?”

“카이에 대한 서류는 발행되지도 않았어. 이게 무슨 뜻인지 너도 짐작할 거야.”

“…….”

“밀리타에게 전해줘.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테니까.”

* * *

제인은 여름에 와 있었다.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한여름에.

별장 안에서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제인 곁으로 루가 다가왔다. 그는 창문을 등지고서 여유 낙낙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른 여름으로 갈까. 아니면 가을?”

이곳이 아니더라도 소유한 별장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루는 제인이 원하는 계절과 날씨를 말해준다면 그곳으로 데려다주어야지, 생각하던 차였다.

제인은 창밖으로 눈을 떼지 않고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비나 맞을까…….”

루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제인은 여전히 창밖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같이 비 맞아 줄래?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비, 한 번쯤 맞아 보고 싶었거든.”

정적 사이로 빗소리가 메워졌다.

루는 조용히 제인을 눈에 담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원하는 것들은 대체로 쾌락과 향락에 취하기 쉬운 사치스러운 욕망이었다.

그런 욕망을 들어주는 일은 루에게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계약을 맺었을 때부터 제인에게 인간이 원하는 것들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과 보석, 사치품, 화려한 옷을 주어도 좀처럼 기뻐하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루에게 원했던 것들은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위로해주는 것,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런 제인이 봄의 꽃밭에서 꽃처럼 활짝 웃었다.

페브리아에 있던 사계절 내내 그녀에게 새를 보내어 불렀었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봤었다.

다른 계절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또 어떻게 웃을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데리고 온 곳에는 비가 내렸고, 제인은 햇볕이 있는 다른 계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길 바랐다.

이번에도 그녀의 바람은 루에게 낯선 것이었으나 들어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루가 손을 내밀었다.

“가지. 비 맞으러.”

“응!”

제인은 기분 좋은 미소로 그의 손을 잡았다.

문을 열자 빗소리가 선명해졌다.

바깥은 한낮의 숲이었다.

구름에 햇빛이 가려 있었으나 딱히 어둡지는 않았다. 비 냄새와 함께 흙과 풀 내음이 섞인 곳으로 발을 디뎠다.

곧이어 머리부터 어깨, 팔, 다리까지 온몸이 젖어 들었다. 제인과 루는 동시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가 쫄딱 젖어가는 서로를 보고 킥킥거렸다.

둘은 손을 잡고 숲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의 냄새가 더 짙어졌다.

초록 잎사귀, 진흙이 된 땅, 몸 곳곳이 빗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제인이 문득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싱그럽게 웃었다.

아, 시원하다.

그렇게 제인은 비가 쏟아지는 여름 한가운데에서 얇은 막 하나를 벗은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면 아침부터 우산을 챙겨 주던,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릴 때면 우산을 가져와 기다리던, 그렇게 비 한 방울 맞지 않게 해주었던 사람.

하임.

그녀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사실 한 번쯤, 비를 맞고 싶었다고.

그 속에서 울고 싶었다고.

한 번쯤은 그랬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제 빗속이 아니어도 툭하면 우는 울보가 되었다. 굳이 빗속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왜일까.

비가 쏟아져 내리는 이곳에 온 순간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 루와 함께.

제인은 잡고 있던 루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햇살보다 더 밝게 웃었다.

“역시, 행복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