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그래서 닷새 뒤에 오라고 하셨어.”
제인의 말에 루는 느긋하게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여행이나 갈까.”
제인은 고민했다.
마법 연습도 하고 싶었고 도서관에서 찾아봐야 할 책들도 산더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루와 여행 가고 싶기도 했다.
-연습은 하루에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닷새 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실컷 쉬어라.
세실도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제인이 망설이는 사이 루가 부드럽게 말했다.
“대답해야지, 제인.”
고압적인 말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 보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디로?”
“지금은 겨울이고 봄은 다녀왔으니, 여름이나 가을. 네가 원하는 계절로.”
루는 그녀의 대답을 예상했다.
아마도 가을이겠지.
제인은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그 계절 속, 제인의 발걸음은 어느 계절보다 가장 듣기 좋았다.
생각만 해도 그 사랑스러운 걸음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때 제인이 대답했다.
“난 어디든 좋은데. 네가 있는 계절이면 어디든 좋아.”
“어디든?”
루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모습에 제인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넌 아닌가 봐?”
“아니야.”
“날 사랑한다면서.”
“사랑하지, 무척.”
루는 제인을 보지 않은 채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미소를 베어 문 입술 사이로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가을을 좋아하거든. 네가 좋아하는 9월 하순의 무화과가 열리는 가을을.”
“…….”
“그러니 가을로 갈까 싶은데.”
제인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네가 좋아하는 계절을 좋아한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귓가가 심장 박동으로 먹먹했다.
제인은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윤기 나는 은발이 그녀의 뺨을 가렸다.
그녀는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두렵고, 그래서 짜증이 났다.
언제까지 말 한마디, 눈짓 한 번에 일희일비해야 하지? 이 빌어먹을 심장은 또 언제까지 이렇게 뛰는 거지? 대체 언제까지?
거대한 행복의 파도에 휩쓸려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부유감을 만끽하면 좋으련만, 행복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오히려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 또 그의 말을 떠올리면 행복이란 것이 제인을 제멋대로 삼켰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여름이 좋겠어.”
“가을이 아니라?”
“가을은 나중에.”
이어서 힘겹게 말했다.
“……지금 가면 심장이 터질지도 몰라.”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옆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귓가가 눈에 들어왔다.
루는 이럴 때마다 몇 번이고 생각했다.
제인이 묘약의 저주에 걸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지금처럼 고작 네가 좋아하는 가을을 나 역시 좋아한다는 말에 붉게 물든 귓가를 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득한 공허가 조금은 더 채워졌을까.
저주에 걸리지 않았어도, 과연.
* * *
“잘 다녀오세요.”
라트올이 변했다.
닷새나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해야 할 일을 나열하며 땍땍거려야 했을 라트올이었다.
루의 침묵에 라트올은 괜히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필요한 마석은 이미 다 입고해 두신 거 확인했고, 나머지는 저 혼자서 하면 돼요.”
루의 의뭉스러운 시선에 라트올이 말을 이었다.
“애당초 세공 주문을 최소한으로 가려서 받고 있잖아요. 이달에 들어온 드호아망 주문 건은 가공까지 마치셨으니 납품만 하면 되고요.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라트올, 죽나?”
깨끗한 안경알을 계속 닦아대던 라트올은 한숨 쉬면서 안경을 썼다.
“안 죽어요.”
이어서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내 주인님이 죽기 전까진 절대로 안 죽어요.”
“난 네 주인이 아니래도.”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루는 작게 웃다가 시선을 떨어뜨리고는 제법 심각하게 말했다.
“데코토들을 데려갈지 말지 고민 중이야.”
“그걸 왜 고민해요? 데려가세요.”
“…….”
“…….”
낯선 침묵에 라트올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설마.”
그가 다다닥 말을 이었다.
“제인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 처음부터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두고 가자니 설거지 같은 잡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당신이 하거나 제인이 하는 건 더 싫고, 뭐 그런 거예요?”
“완벽하군.”
루가 경쾌하게 손뼉을 두 번 쳐주었다.
라트올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좋아하는 것을 탐닉하는 것 외에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루가 데코토들의 대동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고민씩’이나 하고 앉아있는 상황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턱은 좀 다물지.”
루가 손등으로 라트올의 턱을 닫아주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라트올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혼란을 느끼는 와중에도 루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럼 그냥 필요할 때마다 지나가는 명계 것들, 마물들, 혹은 님프들 홀려서 일만 시키고 보내세요.”
루가 단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군.”
* * *
“……어떻게 지냈습니까, 엔니오.”
프시오는 마주 앉은 엔니오에게 ‘잘 지냈습니까’라는 인사를 건네기가 어려웠다. 조금 전에 보고 온 로안나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혼수상태인 로안나는 옅은 조명 아래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더 서글프게 느껴졌다.
엔니오가 마른 입술을 떼었다.
“처음에는 매일 울었고, 그다음에는 원망할 수 있는 모두를 원망했어요. 또 그다음에는 칼을 쥐었죠. 누구를 죽여야 하나.”
그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프시오가 당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엔니오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을 덧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도 못 죽였어요.”
이어서 잔 백작을 찾아가서 소스키엘과 만났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렇게 참담한 심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던 프시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잔 백작이 사랑의 묘약을 만든 자가 있는 곳을 알려 줬어요. 거기로 갔더니 정말로 그자가 있더군요.”
“!”
프시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묘약을 만든 자는 타락한 르젤이었다.
드호아망에서 프시오조차도 끝끝내 찾지 못했던 자를 엔니오가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을 것이다.
그 존재가 엔니오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엔니오의 속눈썹 아래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였어요.”
엔니오는 사랑의 묘약 저주를 푸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레데엘므가 조그맣게 웃었다.
-사랑하는 묘약을 푸는 방법은 의심 없이 사랑하는 마음밖엔 없어.
-그게 무슨……!
-손님들 마음대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야.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었다.
엔니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법이 있을 리 없어…….
-손님, 내가 만든 사랑의 묘약은 마법 같은 게 아니야. 그런 건 인간들이나 하는 거잖아.
-당신은 인간이 아닌가?
-응. 나는 인간이 아니야. 하늘 위, 천계에서 사랑을 주관하던 천사였어. 사랑의 묘약은 신의 지시에 따라 만들던 거야.
그레데엘므가 엔니오의 심장 부근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사랑의 묘약에 걸리면 사랑에 눈이 멀게 돼.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과연 이 사랑이 진실일까, 거짓일까, 의심도 더 커지지. 의심을 잠재울 수 있는 게 뭐겠어?
-……믿음.
-정답.
-그게…… 신의 뜻이란 말인가?
-응.
엔니오의 심장 부근에서 느리게 손을 거둔 그레데엘므는 그대로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는 무언가 잃어버린 아이처럼 주먹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랑은 우리의 축복으로 꽃 피울 수 있지만 믿음은 인간 스스로가 지녀야 하는 것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으라는, 신의 뜻.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주먹을 쥐기 전과 같이 아무것도 없었다.
-시련이라고도 부르지.
-그럼…… 이 모든 게…… 신의 뜻……?
엔니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레데엘므가 킥킥거렸다. 이내 웃음을 지운 그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강한 바람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엔니오는 향수 가게 안에 느리게 흩날리는 깃털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그레데엘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색에 가까운 검붉고 큰 날개는 보기만 해도 압도당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손님, 나 좀 봐.
-…….
-지금의 난 사랑을 주관하는 천사가 아니야. 타락했으니까. 다시 말해서 손님의 상황은 온전히 나의 뜻이야. 나의 장난이고 나의 심술이지. 나의 슬픔이며 나의 원망이야.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로안나.
사랑하는 나의 로안나.
엔니오는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와 미소,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목울대가 시큰거렸고 시야가 번져갔다.
그레데엘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물은 무엇이 그리 무거운지 고일 틈도, 뺨에 머물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바빴다.
그때 그레데엘므가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은 신을 믿지?
-…….
엔니오는 목이 멨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레데엘므가 한 번 더 물었다.
-신을 사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