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88)화 (88/168)

88.

제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었다.

몸도, 얼굴도 모두 보송보송하게 닦여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옆을 돌아보았으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루와 관계를 한 뒤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통증까지는 아니었지만 유쾌한 자극도 아니었다.

속에서부터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다. 혼자 깬 게 뭐 그리 서러운 일이라고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루는 가지고 온 은쟁반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 제인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상하군. 악몽이라도 꾼 건가?”

루가 그럴 리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할 때였다.

“네가 없어서.”

……내가 없어서.

제인의 말을 이해한 루가 세상의 온갖 푸름이 담긴 눈을 곱게 접었다.

“수프 만드느라.”

“아…….”

루는 협탁 위에 올려둔 은쟁반에서 유리그릇을 가져왔다. 이어서 아직도 뜨거운 수프를 후, 불어서 제인에게 먹여주었다.

“소화 시키기 좋은 재료로 만들어 왔는데, 부족할까?”

“충분해.”

제인은 유리그릇을 잡으려다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루를 보았다.

루는 킬킬 웃었다.

“뜨거워서 못 잡을 텐데.”

“넌?”

“내 몸은 온도가 낮으니까.”

루가 얕게 웃고는 계속해서 수프를 제인에게 떠먹여 주었다. 뜨거운 수프는 루가 불어준 숨에 금방 먹기 좋은 온도가 되었다.

제인은 얌전히 받아먹으며 말했다.

“……아까 조금 무서웠어.”

“통증은?”

“약간 욱신거리는 정도.”

루는 제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미안.”

“……?”

제인은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바짝 굳었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처음 해보는 것 같은데.”

제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해야지.”

시키지도 않은 사랑한다는 말에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다니…….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렸다.

수프 건더기들이 침과 엉키다가 흐물흐물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따뜻한 음식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과는 달리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응.”

“무슨 일?”

“네가 없는 동안 내 시간이 엉망이 됐지. 온 집 안의 시계를 다 망가뜨려 놓을 만큼.”

“…….”

“그만큼 네가 그리웠어.”

자연스럽게 침실 벽에 걸려있던 시계로 시선이 갔다. 낯선 시계가 걸려있었다.

제인의 눈동자가 이전보다 더 흔들렸다.

“정말로, 정말 나를 사랑해?”

“사랑해.”

“……안 믿겨.”

루는 제인의 말에 작게 웃었다.

이제는 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적당히 따뜻해진 수프를 먹여주며.

“알아. 나 역시 네 사랑을 못 믿으니까.”

제인은 심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달라붙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야만 무언가 심장을 쥐고 비트는 듯한 고통이 설명될 터였다.

그녀는 그 손을 찾아서 애원하고 싶었다. 그만 쥐라고. 그만 아프게 하라고.

그만큼 심장이 아팠다.

동시에 아파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에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루의 말에 아파하는 게 우습기만 했다.

인간이 이기적인지 자신이 이기적인지 알 재간이 없었다.

“다 먹었군.”

루는 은쟁반과 그릇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심장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제인은 허리를 숙이고 박하 향이 나는 품으로 기어가듯 안겼다.

“무섭기만 한 건 아니었어. 무섭고, 야하고, 아름다웠어.”

“내 강아지가 말을 예쁘게 하는군.”

제인이 고개를 들고 방긋 웃었다.

“사랑하니까.”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제인의 일상은 틀에 박힌 듯 똑같았다. 아침엔 세실에게 수련받고, 낮엔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거나 연습했다.

루와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드호아망 도서관에 가서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왔다. 간혹 골라놓은 책을 모두 읽지 못할 때면 오늘처럼 빌려와서 마저 보곤 했다.

제인은 침대 위에서 책을 읽다가 풀썩 덮었다. 눈앞에 네 글자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가망 없음.

제인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고대부터 전해지는 사랑의 묘약에 관한 서적들은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추측성 이론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시판하는 사랑의 묘약 제품들은 관련 서적을 찾아봐도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일주일 정도 지속하고 휘발하는 마법 약들뿐이었다.

한마디로 불량식품 같은 것들이었다.

제인과 로안나가 걸린 묘약과는 완전히 달랐다.

알아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관련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으나 노력에 비해서 이렇다 할 도움이 되는 정보가 없었다.

시계를 보자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부엌으로 나온 제인은 생당근을 아삭아삭 씹어먹고 있는 라트올과 마주쳤다. 미지근한 물을 따라 마시던 제인이 대뜸 물었다.

“루한테 무슨 일 있었죠?”

“인사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체할 것 같아요.”

“체한 적 있어요?”

“없어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라트올이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무 말이요. 졸려요.”

제인이 빈 잔에 물을 따랐다. 넘치기 직전까지 채운 후 라트올에게 말했다.

“대답해 줘요. 엘마뉴엘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루의 분노가 이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는 느낌이었단 말이에요.”

이어서 물잔을 개수대에 확 부어서 비워냈다.

그러고는 빈 잔을 보여주었다.

“다녀오고 나서는…… 분노가 싹 사라졌어요.”

“…….”

라트올은 제인을 빤히 보았다.

“당신처럼 감이 좋은 인간은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 환영받기 어려울 텐데요.”

“덕담 고맙고요. 루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줘요.”

“……깨달은 거죠.”

라트올이 당근을 아삭, 베어 물며 묘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에 대한 마음을.”

* * *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수련 시간.

세실은 제인의 손바닥에서 번져 나오는 광활한 빛의 향연을 보며 실소했다.

지금까지 제인의 체력과 마비력을 죽어라 올렸던 이유가 바로 그 손바닥 안에 있었음에도 한 번에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힘 풀어라.”

회복력을 풀고 천천히 눈을 뜬 제인은 생경한 감각에 말을 더듬었다.

“바, 방금 뭐죠?”

제인은 자신의 두 손바닥을 멍하게 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손에서 처음 느껴보는 힘이…… 쥐면 손가락 사이로 폭발할 것 같은 소용돌이 같은 게…… 공기가 밀도 높게 압축된 느낌이…….”

세실이 제인의 말을 툭 끊어냈다.

“9할의 회복력이다.”

“회복력이요? 비율로 따지면 저한테 1밖에 없었잖아요. 그런데 9할이요?”

“네가 가진 9할의 마비력을 회복력으로 비틀어서 힘을 이동시킨 거다.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수련해왔다고 보면 돼.”

세상 그 무엇도 완벽한 것은 없다.

세실이 깨달은 진리이자 이치였다. 이는 세상 어떤 것에도 맹점이라 불리는 모순의 틈새가 있다는 의미였다.

세실이 신체계에서 정신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건 마나 계열의 맹점을 찾아서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제인의 마비력을 회복력으로 비트는 방식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세실이 전환한 것이 계열 자체였다면, 제인이 비튼 것은 이동이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계열의 산하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힘의 이동이라는 이론이 현실로 구현될 확률은 수치상으로 극악에 가까웠다. 게다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체력소모가 극심해서 탈진하거나 기절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세실은 그 힘이 마비력과 회복력이라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판단했다.

마비력을 끌어올린 채 회복력으로 비튼다.

비트는 순간.

그 순간에 체력만 받쳐준다면, 그리고 적응만 된다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게 지금껏 제인의 체력과 마비력을 괴물처럼 올린 까닭이었다.

그래도 한 번에 될 줄은…….

세실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앞에 고지가 있는데, 그 고지가 지옥문으로 보였다. 제인을 그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막막했다.

세실은 입안이 썼다.

“엘마뉴엘에서 아버지한테 연상으로 매듭 끊는 법 배웠지?”

“네. 도끼…….”

제인이 영혼 없이 흐린 눈으로 미소 짓자 세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여전하시네.”

이어서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했다.

“꼭 도끼가 아니어도 돼. 끊어내는 것 중에서 연상하기 편한 걸 찾아서 연습해. 무리하면 탈진할 테니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만.”

“네.”

“오늘 배운 힘의 이동이랑 같이.”

“네.”

“그동안 수고했다.”

“네. 네……?”

손바닥에 남아있는 회복력의 감각에 얼떨떨해하던 제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없이 눈을 껌뻑거렸다.

세실이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툭 올렸다.

“넘자, 관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