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세실이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그게 호엘리반은 아니었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닐 것 같은데.
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루가 호엘리반 곁에 있어도 세실은 크게 괘념치 않을 수 있었다.
적어도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오늘, 그 대화가 루에게 의미 있는 대화였다는 걸 알게 된 세실의 얼굴에는 얕지 않은 황당함이 비쳤다.
“언제부터 제 말을 그렇게 잘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들어 줄 만할 때, 가끔?”
“……기껏 찾았으면 소중히 하는 게 어때요? 제인이 물건도 아니고 망가져도 아름답네, 어쩌네 하는 지랄 같은 개소리를 할 게 아니라.”
“세실.”
위압적인 부름이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네가 꽤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해. 넌 어떤 선상에도 나를 두지 않아. 비단 나 뿐일까. 세상 모든 걸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편이지.”
“…….”
“그러니 앞으로도 내게 꽤 괜찮은 인간으로 남아줬으면 해.”
“제 관심은 당신이 아니란 걸 아실 텐데요.”
“알다마다. 하지만 나와 계약한 이상.”
루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느릿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제인은 내 소유야.”
내 소유.
그의 입술에서 나온 발음은 무척이나 달콤하고 나른했으나 날이 서 있었다.
세실은 생각에 잠겼다.
루가 이렇게까지 제인에 대한 소유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은 꼭 이를 드러낸 사자가 웃고 있는 듯했다.
죽고 싶으면 건드리라고.
제인을 향한 자신의 소유욕을 건드리는 순간 그게 누구든, 무엇이든, 남김없이 죽여버리겠다고.
그가 이어서 말했다.
“계약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것이니 제인을 향한 관심은 나를 향한 관심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그러니까 제인이 망가지든 말든, 가만히 닥치고 있어라?”
루가 빙긋 웃었다.
말귀를 잘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그러나 세실은 그의 칭찬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그러기엔 제가 정이 들어버려서 말이죠.”
“……정.”
짧게 읊조리던 루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독백과도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것도 마음의 일부 아닌가?”
곧 고요히 가라앉은 강물 같은 푸른 눈동자가 세실을 응시했다.
“참고하도록 하지.”
* * *
호엘리반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프시오가 돌아온 데다가 시끄러운 연분홍색 드래곤이 엘마뉴엘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프시오는 짐을 풀면서 펠드툰과의 대화에서 찾아낸 일말의 성과들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호엘리반이 문가에 서서 그녀가 하는 말을 즐겁게 경청하고 있었다.
“우선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펠드툰 아저씨와 드래곤 마력을 생명에 지장 없이 주입하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프시오.”
“네.”
호엘리반이 느릿한 노래를 부르듯 천천히 프시오의 이름을 반복했다.
“프시오, 프시오, 프시오.”
프시오가 우뚝 멈춰서 호엘리반을 올려보았다.
“……세 번 대답해야 합니까? 애초에 제 얘기를 듣고 있긴 했습니까?”
“난 너 없으면 안 돼.”
프시오가 천장 쪽으로 고개를 슬 젖혔다가 다시 호엘리반을 쳐다보았다.
“……어림잡아서 족히 이십 분은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안 듣고 있었다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바라는 바야.”
“…….”
“나를 가만두지 마.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내 옆에만 있어.”
짐 정리를 끝낸 프시오가 깊게 한숨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틀렸습니다.”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호엘리반은 호기심 반, 즐거움 반인 얼굴로 그녀를 따라 천장까지 높이 트인 창가로 갔다.
프시오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땐 어디든지 함께 가자고 해야 하는 겁니다.”
“…….”
“명심하세요. 제 저주가 풀리고 프러포즈할 때는 어디든 함께 가자고 하세요. 똑똑한 사람이 이런 건 왜 매번 틀립니까?”
심각한 표정의 프시오와 달리 얼굴을 가리고 큭큭거리던 호엘리반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프시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배울게.”
그가 거듭 말했다.
“네가 알려주면, 하나씩 배울게.”
프시오는 묵묵히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어서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는 호엘리반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까 제 얘기는 듣고 있었습니까?”
“너 정말…… 지독해.”
“……제 스승이었던 당신보다 지독합니까?”
“…….”
“그때 당신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면 별장이라도 빌려서 14박 15일간 재우지도 않고 설명해야 다 얘기할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 정도였어?”
“그 정도였냐는 질문이 뻔뻔할 정도로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제 얘기 듣고 있었습니까?”
호엘리반이 졌다는 투로 두 손을 들며 웃었다.
“응, 내 피도 필요하면 말해.”
이어서 그녀에게라면 뭐든지 다 줄 수 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드래곤의 마력이 주입된 피니까 도움 될 거야.”
* * *
제인은 정신이 몽롱했다.
느리게 풀리고 있는 수면 마법 탓인지, 침대 위의 루가 꿈처럼 느껴졌다.
제인은 어기적거리면서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박하 향이 났다. 다시 그를 올려다보던 제인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더듬거렸다.
“안녕, 루.”
“안녕.”
루가 뺨에 얹힌 제인의 손을 잡으며 재차 인사했다.
“안녕, 제인.”
“……보고 싶었어.”
제인의 웅얼거림에 루는 입가에 미소를 물었다.
“얼마나.”
“사람의 언어로는 다 표현 못 해. 너는?”
루는 느긋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 듯싶더니, 잡은 제인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 또한 무척.”
그의 대답에 기쁘게 웃으려던 제인은 느닷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루는 그녀의 눈물을 혀로 훔치고,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왜 울지?”
“행복한 꿈이라서.”
그녀가 웃었다.
매달려 있던 방울들이 재차 떨어져 내렸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건, 처음이야.”
루는 그녀의 눈물이 이상했다.
슬픔에는 고통과 절망밖에 없어야 마땅했으나 그런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꿈은 늘 불행했거든.”
불행을 말하는 말속에서도 참담함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있는 꿈은, 불행하지 않아.”
더욱 이상한 건 그녀의 눈물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욱신거리는 감각이었다.
미약한 통증이 이어질 때였다.
“깨고 싶지 않아.”
“…….”
“행복한 꿈이라서.”
“꿈이 아니야, 제인.”
“…….”
루는 제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이어서 말했다.
“보고 싶었어.”
제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루를 보았다.
루가 웃으며 말했다.
“네 잿빛 눈동자, 가지런한 눈썹, 콧대, 입술, 그리고…….”
살결 위로 가볍게 했던 입맞춤을 멈추었다.
루는 옆에 누워있던 제인을 위로 올라오도록 했다.
은빛 머리카락이 은하수처럼 흘러내렸다. 차디찬 손가락이 윤기 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네 혀까지.”
이내 그녀를 재차 당겨서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입술이 벌어지는 틈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고 그녀의 혀를 찾아 감았다. 그는 제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였으나 그녀의 혀를 가장 좋아했다.
살아 있기에 붉고, 반질거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
루는 검지로 제인의 입술을 만지며 나른하게 말했다.
“벌려 봐. 내가 볼 수 있도록.”
루의 위에 올라타 있던 제인이 잠결에 붉어진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이윽고 그녀의 피부보다 더 빨갛고 반질거리는 혀가 드러났다.
루는 느슨하게 풀려가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예뻐.”
이윽고 느리게 입술을 벌리고 그녀에게 다시 다가갔다. 뜨거운 것과 찬 것이 한데 얽혀서 따뜻하게 되어가는 사이에 그가 이름을 불렀다.
“제인.”
제인이 대답하려는 순간, 그가 선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제인.”
* * *
제인은 몇 번이나 쾌락의 끝에 도달했다.
흘러간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한 몸짓은 제인의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이미 쓰러지고도 남을 만큼 루는 집요하게 그녀를 탐했다.
뱃속 아래에서부터 울컥거리기를 수차례.
제인은 더 이상 쾌감을 느낀다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루는 제 몸이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않도록 포박하듯이 허리를 잡았다.
“힘들면.”
루는 이어서 제 위에 포개어 앉은 제인의 한쪽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
“이대로 쉬도록 해.”
“……이러고 어떻게 쉬어.”
“쉬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루의 얼굴에 제인은 낯빛이 확연히 어두워지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루는 개의치 않고 산뜻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제인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듯이 말했다.
“한 번 더 말해봐.”
루가 주저 없이 말했다.
“이리 와.”
“말고.”
제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챈 루는 제인이 귀엽게만 보였다.
“사랑해, 제인.”
제인은 다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듣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거짓말?”
“아니.”
“말장난?”
“아니.”
“정말로?”
“정말로.”
제인은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손목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
붉은 정원의 수레바퀴.
지워지지 않는 향기로운 저주.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 거짓이라도 좋았던 말인데, 진심이라 생각하니 우습게도 거짓보다 더 거짓처럼 느껴졌다. 꽃밭에서 느껴졌던 그의 사랑이 환영 같았다.
나는 네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네가 사랑한다는 말을, 오로지 진심이라 여길 수 있을까.
제인이 깊은 상념에 잠긴 사이, 루는 나직한 웃음을 그려냈다.
사랑한다는 루의 말에 제인의 몸에서 의심과 의혹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데시안에게는 무척 달게 느껴지는 감정이었으나 루는 어째서인지 그 달콤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두 손에 힘을 주어 제인의 허리를 지그시 눌렀다.
“……나로 채워, 제인.”
제인이 작은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흠칫 떨었다. 동시에 루의 위로 쏟아지듯 쓰러졌다.
루는 맞닿은 그녀의 살결과 온도에 취할 지경이었다.
“그래, 이렇게.”
그가 만족스러운, 그러면서도 결핍된, 무언가를 갈구하는 목소리로 제인을 탐했다.
“몸도, 마음도, 머리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