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86)화 (86/168)

86.

공터에 주저앉은 제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푸흡…….”

그러다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맞은 편에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솜브가 씩씩거리다가 꽥 소리쳤다.

“웃지 마세요!”

“안 웃……, 푸흐, 흐, 안 웃었어.”

“거짓말! 웃었잖아요!”

제인이 솜브를 힐끗 보다가 결국 배를 잡고 깔깔깔 웃어버렸다.

어떻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세실의 지시에 따라서 마물의 난이도를 단계적으로 올리며 연습했던 제인은 드디어 마비 마법을 쏘는 대로 명중하고 있었다.

그것도 솜브에게.

제인이 아예 데구르르 구르면서 솜브의 말랑한 발길질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들 곁으로 온 세실이 옆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이어서 파탐에 불을 붙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오밤중에 지랄하지 말고 들어가서 자라.”

“잘 밤에 각성제를 피우면 어떡해요? 잠 못 자게.”

“남 이사.”

“남 이사 오밤중에 지랄하든 말든 그건 무슨 상…….”

따악!

“악!”

들뜬 기분에 방심했던 제인이 세실에게 딱밤을 맞고 뒤통수를 문질렀다.

와, 씨, 더럽게 아프네.

그녀가 살짝 마비력을 올리자 곧바로 통증이 멎었다.

“세실, 오면서 봤죠? 저 이제 백발백중이에요.”

세실은 마비력을 올리고 방글방글 웃는 제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덕인 줄 알아.”

“알아요.”

제인이 품에 안은 솜브의 말랑말랑한 뺨을 쭉 잡아당기며 웃었다.

“역시 세실이랑 오길 잘했어요.”

솜브가 샐쭉한 표정으로 제인을 보았다.

제인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너랑도.”

“흥.”

솜브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이 오는지 금세 눈이 가물거렸다. 제인이 몇 번 쓰다듬어 주자 고롱고롱 소리를 내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제인이 솜브에게 시선을 두며 조용히 물었다.

“밀리타 다친 곳이요, 후유증은 없을까요?”

“어.”

“…….”

또다시 이어지는 정적이 평소와는 달리 어쩐지 불편했다.

제인이 재차 말문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프시오는 펠드툰 아저씨한테 가는 것 같던데요.”

“그래서.”

“……그렇다고요.”

“어.”

“…….”

좀처럼 끊어낼 수 없는 어색한 정적에 제인이 이마를 문질렀다.

“뭔데요? 얘기해요. 이 넓은 공터에서 하필 여기 앉았으면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세실은 휴대용 재떨이를 열어서 꽁초를 넣고 파탐 한 개비를 더 물었다. 불을 붙이는 그녀의 미간이 야트막하게 좁아져 있었다.

일순, 먼 거리로 향해 있던 그녀의 시선이 발밑에 있는 제인에게 닿았다.

거의 다 왔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제인은 관문을 넘기 직전까지 와 있었다.

세실이 재를 털며 무심하게 물었다.

“꼭 넘어야겠니?”

제인은 그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다. 마법사가 되는 관문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와 묻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세실도 넘었잖아요. 그걸 넘어서 신체계로 전환했던 거잖아요.”

“꼴통아, 네 문은 내 것과 비교가 안 되게.”

“엉망이라는 말이죠.”

“…….”

“세실, 나는요. 지긋지긋해요.”

“…….”

“도망치는 거.”

세실을 직시하는 잿빛 눈동자가 달빛에 또렷하게 빛났다.

“이제 그거 안 할래요.”

세실은 제인을 보면 늘 화가 치솟곤 했다.

하지만 의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원래 불쌍하고 가여운 걸 보면 속이 터지고 화가 나는 성정이었다. 더군다나 제인의 언행이 화를 부추기는 데 크게 한 몫 거들기도 했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

달빛에 빛나는 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세실은 왜 그토록 제인을 보면 화가 났었는지 깨달았다.

기대하게 만들어서였다.

세실이 마탑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에서 이렇게까지 가능성이 희박한 것도, 그럼에도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제인이 유일했다.

실망이 유력한 기대는 불쾌하기 그지없다.

세실은 가느다란 한숨을 쉬다가 파탐 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 떠날 준비를 마치는 대로 내가 머무는 숙소로 와. 떠나기 전에 널 수면 마법으로 재울 생각이니까.”

“재워요? 왜요?”

제인의 무구한 표정에 세실은 질릴 대로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엘마뉴엘에서 나가는 방법도 드래곤이 유일하니까. 너 여기 왔을 때 도착하자마자 토했던 거 기억나니? 차라리 재워버리는 게 낫지.”

그날의 토 냄새가 떠올랐는지, 제인도 입을 틀어막았다.

“……욱. 알겠어요.”

“알겠으면 들어가서 자, 새끼야.”

* * *

루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며칠 만에 돌아온 제인이 세실의 등에 업혀서 올 줄은 몰랐기에.

멀미 때문에 수면 마법을 걸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의 등에 업혀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리 줘.”

루의 말에 세실이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침대로 바로 집어 던지게 방이나 안내해요.”

루는 다시 한번 웃으면서 말했다.

“세실, 이리 줘.”

“……잘하면 죽이겠네요.”

“원한다면.”

세실이 조용히 혀를 차며 루에게 제인을 넘겨주었다.

제인을 품에 안은 루가 침실로 들어가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마력으로 침대 온도를 높이고 이불을 덮어 준 후에도 한동안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제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물었다.

“안 가고 뭐 하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세실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커피 한 잔 주시죠.”

“……그러지. 어떻게?”

“진하게요.”

잠시 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세실이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제인은 이제 곧 관문을 넘을 거예요. 제 예상은 못 넘는다는 쪽이에요.”

“그렇군.”

“그렇게 되면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다시 문을 넘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말고는 없어요. 나머지는 모두 제인의 몫이에요.”

루의 표정은 무감했다.

세실은 괴로운 듯 말을 이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망가지게 될 거예요. 최악의 경우 자해나 자살 시도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렇군.”

“……그게 다인가요?”

세실은 품에서 파탐을 꺼내어 찾았으나 이미 동이 나고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좁아질 대로 좁아진 미간은 이내 들려오는 루의 말에 더욱 일그러졌다.

“망가지라지.”

“…….”

“내 눈길이 닿는 곳에서 망가지는 건 나쁘지 않아. 아름다운 건 부서지고 망가져도 아름다운 법이니까.”

“루.”

세실이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는 듯이 이름을 불렀으나 루의 미소는 옅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 잘 보살펴 주도록 하지.”

세실은 제인을 향한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실수다.

제인에게 마음을 너무 줬다. 빌어먹게도 정이 들어버렸다.

이래서 다친 길고양이 한 마리도 집에서 키운 적이 없었거늘, 개 같은 길고양이보다도 더 사람 속을 뒤집는 녀석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머릿속을 좀 정리하고자 루와 얘기하려 했던 것이었으나 오히려 말이 길어질수록 뭔가 제 가슴을 콱 누르는 것 같았다.

답답했다.

“제대로 보살필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제게 맡기세요.”

루가 조용히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눈매도, 입매도 모두 부드럽게 휘어졌으나 어떤 위협보다 더 사납게 느껴졌다.

이어서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곱씹듯이 물었다.

“제인을, 네게, 왜?”

세실은 제인의 손목에 표시된 각인을 처음 봤을 때 이미 눈치챘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어떤 빛으로도 밝힐 수 없는 그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집착과 독점욕을.

세실은 어쩌면 그 감정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인간이 여기는 사랑과 데시안이 여기는 사랑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루는 누구와도 종속 계약을 맺지 않는 데시안이었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인 호엘리반은 물론, 자신이 데리고 있는 메 데시안인 라트올에게조차도.

그런 그가 인간과 종속 계약을 맺었으니 결코 가벼운 감정이나 이유는 아닐 터였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왜 제인이죠?”

“한 줄기 빛이니까.”

이어지는 뜻밖의 루의 대답에 세실은 말문이 막혔다.

“아주 우스운, 나의 빛, 나의 구원.”

루는 데시안이다.

어둠으로부터 존재하는 데시안이 빛과 구원을 원한다니.

세실은 저도 모르게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 펴도록 해. 이건 네가 알려준 거잖아?”

“……무슨 말이죠.”

“오래전, 네게 물은 적이 있었지. 현혹의 데시안인 내가 인간을 현혹하지 않고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

“그때 네가 했던 대답, 기억나지 않는 건가?”

세실은 할 말을 잃었다.

루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으나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호엘리반이 도서관에서 찾은 책으로 봉인되어 있던 루를 깨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던 세실이 그에게 물었다.

-호엘리반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세실이라고 했던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루는 대답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현혹의 데시안인 내가, 인간을 현혹하지 않고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세실은 속으로 무척 탄식했다.

현혹의 데시안답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을 홀릴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그러니 그의 물음은 난제에 가까웠다.

무엇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침묵 속에서 고심하던 세실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찾으세요.

-무엇을.

-그런 사랑을 받고 싶은 인간부터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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