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85)화 (85/168)

85.

제인은 숙소 부엌에서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세실이 마물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밀리타를 돌보는 동안 종일 펠드툰과 수련하고 온 그녀의 얼굴이 멍했다.

정신계 치유마법을 가르쳐주던 펠드툰의 괄괄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탓이었다.

-도끼를 떠올려라, 도끼!

-도끼로 고통의 매듭을 끊어내야 한다!

-크고 날카로운 도오오끼이이!

제인은 수련 내내 고통의 매듭이고 나발이고 도끼라는 말만 백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았다. 귓속에서 울리는 도끼라는 단어에 진절머리를 낼 때였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현지 드래곤 마스터들이 숙소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들의 숙소는 제인 일행이 묵고 있는 숙소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마련돼 있던 터라 소란스러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제인은 문득 마물 공격에 다친 밀리타가 떠올랐다.

밀리타의 부상은 일련의 우연으로 빚어진 사고였다.

사고의 시작은 솜브였다.

엘마뉴엘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줄곧 잠만 자던 솜브가 드래곤의 마력이 섞인 대기권에 익숙해지자 정신 사납게 방방 날아다녔다.

-꺄하하! 꺄하하! 힘이 불끈불끈 솟아요!

밀리타의 뒤에서 마물의 잔여 공격을 막고 있던 프시오가 아주 잠깐 솜브에게 한눈을 팔았던 게 화근이었다.

일순 집중력이 흐트러진 밀리타가 마물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제인은 물잔을 내려놓고 젖은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 때문인가.”

“아뇨.”

혼자라고 생각했던 제인은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카이를 뒤늦게 발견했다.

“아, 깜짝이야!”

제인은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고요.”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어요.”

수통을 채우고 물을 마신 카이가 말을 이었다.

“밀리타의 안 좋은 습관이에요. 방어하면서 공격해야 할 때 공격부터 할 때가 있어요.”

그가 고개를 돌리고 제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밀리타가 그때 피할 수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카이 또한 드래곤을 타고 마물을 해치고 있었기 때문에 시선을 분산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카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보니까요.”

“그 상황에서 밀리타를요? 어떻게요?”

“어떻게든.”

“둘이 무슨 사이에요?”

카이는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 정도로 자연스러운 인간이 있나 싶을 만큼.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내가 왜……. 당신은 도대체…….”

제인이 도무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문질렀다.

카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야, 밀리타가 당신에게 호감이 있으니까.”

“…….”

호감.

제인은 그 단어를 마냥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밀리타는 제인이 밀어뜨리는 손에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진심으로 제인이 강해지길 바랐다.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눈을 마주칠 때면 늘 웃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 모든 게, 호의라고 보기에는 카이의 말대로 호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로 어제, 밀리타가 제인의 머리카락을 잡은 그 순간. 제인의 눈에 한 사람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밀리타가 아니었다.

언제나 밀리타의 뒤에서 무심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눈으로 응시하는 카이였다.

그의 시선은 늘 그렇듯 조용했으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밀리타가 모를 리 없을 만큼.

그러니까.

“와아, 진짜 더는 못 들어 주겠네. 당신까지 날 끌어들이면 어떡해요?”

카이의 눈에 의아함이 비치는 사이 제인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검지를 천천히 위로 올리더니 그를 척하니 가리켰다.

“밀리타가 가장 의식하는 건 당신이라고요.”

* * *

카이는 숙소로 들어와 잠든 밀리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손끝이 밀리타의 이마로 향하다가 멈추었다. 차마 피부에는 닿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밀리타의 이목구비는 잠들면 어릴 적 얼굴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여섯 살배기 조그만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언제나 보육원으로 봉사하러 온 어른들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저 사람에게는 어떻게 굴어야 예쁨받을 수 있을까? 하는 얼굴로.

그렇게 눈치를 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배시시 웃었다.

예쁘게 웃을게요.

그러니까 나 좀 예뻐해 줄래요?

사랑해 줄래요?

카를르 남작가의 주인이었던 부모님을 따라서 미르나비 보육원에 봉사를 다녔던 카이는 그런 밀리타의 얼굴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고 눈에 아른아른 밟혔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보육원에 갈 때마다 밀리타에게 줄 간식을 따로 챙겨갔다.

사탕, 젤리, 초콜릿, 쿠키…….

-와아……!

밀리타는 정말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 눈과 입이 모두 동그랗게 벌어졌다.

카이는 그 얼굴을 보는 게 퍽 좋았다. 유난히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간식들은 기억해 뒀다가 다음번에도 꼭 챙겨가곤 했다.

밀리타는 두 팔을 벌리고 카이를 안아주었다.

-카이가 세상에서 최고야.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던 카를르 부부는 밀리타를 입양하려고 했다.

당시 페브리아에서는 전쟁고아들을 입양하는 귀족 가문에 상당한 혜택과 권리를 부여하여 한창 떠들썩했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카이의 가문인 카를르 남작가 역시 입양을 계획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왕이면 아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가 좋으니 한동안 카이를 데리고 보육원으로 봉사를 나갔던 것이었고, 그의 부모도 애교 있는 밀리타가 집안의 막내딸로 들어오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카이는 달랐다.

밀리타의 입양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평소 무던하고 말수가 적은 아들이 본 적 없는 태도로 거부감을 표하는 것에 부인은 적지 않게 충격받았다.

-밀리타여서가 아닌 것 같아요, 여보. 입양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지도 몰라요.

카이의 부모는 그날부터 보육원에는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밀리타는 다른 가문에 입양 갔으나 사 년 만에 파양 당하고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는 바로 밀리타를 보러 갔다.

그리고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열 살의 밀리타는 웃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가 되어있었다. 어딘가 망가진 소녀가 카이의 옷깃을 잡았다.

옷깃을 잡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카이는 밀리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물음조차 밀리타에게는 고통이 될 것 같았다.

작은 몸이 온통 멍과 상처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리타가 초점 없는 눈으로 물었다.

-나 아파. 아프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해?

-…….

-……카이는 똑똑하잖아. 나보다 뭐든 많이 알잖아……. 그러니까…… 카이, 가르쳐줘.

밀리타의 눈가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카이의 몸을 덮쳤다. 그는 그 파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죄책감이었다.

내가 입양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런 생각이 카이의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카이…….

부서질 듯한 부름에 카이는 입매를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그는 검술을 다시 배웠다.

타고난 재능과 달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검술을 밀리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밀리타는 카이의 가르침을 곧잘 따라왔다.

강해질 거라는 일념 하나만으로.

시간이 흘러, 밀리타는 또래보다 독보적인 검술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날도 카이가 밀리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위해 미르나비 보육원으로 오던 길이었다. 보육원 교사들이 창문을 보며 사담을 나눴다.

-저기 또 오네요.

-누구?

-카를르 남작가 자제분 말이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밀리타는 복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요량이었다. 앳된 교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보는 질문에 밀리타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듣기로는 몇 년 전에 카를르 가문에서 밀리타를 입양하려고 했었다는데, 사실이에요?

-맞아. 그런데 저 자제가 심하게 반대했었어.

-이상하네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 동안 검술을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입양 간 가문에서 내내 학대만 당하다가 파양 당했으니…… 불쌍해 보였겠지.

우연히 그 대화를 듣게 된 밀리타는 처음으로 죽일 듯이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카이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그의 몸에 올라탄 채 검을 겨눴던 그녀는 악을 써대며 모든 원망을 쏟아냈다. 조용히 곪아가던 원망을 쏟아낼 사람이 필요했으니 적절한 시기였고, 적절한 존재였다.

이윽고 그녀가 검을 뽑았다.

그의 목덜미를 겨누며 남아있던 울분까지 모조리 토했을 때, 마른 바닥에 검날을 내리꽂았다.

카이는 생각했다.

내가 입양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그렇게 수백, 수천 번도 넘게 생각했던 가정의 끝은 잔혹하리만치 언제나 같았다.

“밀리타, 나는…….”

카이는 마물의 공격을 받았던 밀리타의 어깨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불을 목까지 올려주며 작게 읊조렸다.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카이가 나간 뒤 불 꺼진 방 안.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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