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루에게 맹목적인 사랑이란 사실 오로지 받는 것이었다. 주거나 빼앗기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데시안에게 마음이라는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온기라고는 없는 내게 마음이 생겨난 것이.
꽃처럼 소리 없이 피어났으려나.
있는 줄도 몰랐기에 빼앗긴 줄도 몰랐던 마음이었다. 모르기에 화가 나는 이유도, 가라앉히는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무엇을 빼앗겼는지 이제는 알고 있지 않은가.
완전히 미쳐버린 그레데엘므가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분노도 갈급함도 굳이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루가 다이애나의 시신을 보며 느슨하게 말했다.
“내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꺅, 그랬구나!”
그레데엘므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얼마간 자지러지듯 꺄르르 웃었다.
“그래서 내 거처를 박살 낼 만큼 화가 났었구나!”
그러다 루의 옆에 대자로 뻗어서 발라당 누웠다. 붕 뜬 꽃잎들이 소리 없이 내려앉듯 그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널 봉인하고 난 후 내내 입구를 열어뒀었어.”
“…….”
“너도 알 거야.”
루가 조소를 흘렸다.
그것은 결코 관용이 아니었다.
어설픈 갈망 속에서 저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주는 참담한 비극이자, 루가 더욱 비참하길 원했던 그레데엘므의 잔인한 바람이었다.
루는 그 바람대로 봉인의 영역에 묶인 채 무척이나 참혹한 시간을 견뎠다.
어둠 속의 고요는 공허만큼이나 끔찍했다.
“애송아, 이번에는 단 하루야.”
“넓으신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고개를 돌린 그레데엘므는 팔다리를 위아래로 휘저었다. 그러자 가벼운 꽃잎들이 날리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 진창을 구르는 내가, 너는 우습지.”
어디까지가 바닥인지 모를 꽃무덤이었다.
“애송이도 나처럼 우스워질까.”
그레데엘므는 팔을 휘두르며 꽃을 그러모으더니 제 몸을 덮기 시작했다.
“제인이 너를 구원해 준다면 나는 밤하늘의 별이 되고 너는 사랑하는 인간을 잃게 될 거야. 그때 네가 얼마나 진창을 구를까! 얼마나 우스워질까!”
꽃 사이로 완벽하게 가려진 그레데엘므가 조그맣게 말했다.
“생각만 해도 좋아서 미치겠어…….”
루는 꽃 더미에 파묻힌 그레데엘므 쪽으로 상체를 가볍게 떨어트리고 그에게 달콤한 목소리를 속삭여 주었다.
“그럼 얌전히 미쳐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
“바라는 대로 별이 되게 해드릴 테니.”
“……좋아.”
* * *
“미안합니다.”
프시오의 시선이 붕대가 감긴 밀리타의 어깨에서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
“제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정말 괜찮아요, 프시오. 세실이 마물의 독성을 모두 제거해 줬는걸요. 붕대도 가벼운 타박상이라서 한 것뿐이에요.”
밀리타의 차근차근한 대답에도 프시오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에 보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괴로움이 여실히 묻어났다.
밀리타는 그런 프시오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어릴 적부터 만나고 싶었던 보육원 후원인은 어째서인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살면서 만난 어른 중에서 가장 강하고 다정했다.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모습도 좋았다.
그녀가 후원한 돈으로 어린 밀리타가 자라난 것과 진배없었으니.
밀리타에게 프시오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어른이었으며, 좋은 스승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실수로 인해 그늘지는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할 요량으로 프시오에게 엘마뉴엘에 온 뒤로 줄곧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프시오는 드래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이곳 사람들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던……데…….”
밀리타가 말끝을 흐렸다.
프시오의 안색이 아연하게 질렸기 때문이었다.
하얗게 질린 프시오의 얼굴은 처음 보았기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프시오의 안색을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별 뜻 없어요. 궁금해서 여쭤본 거였어요.”
정말이었다.
밀리타에게 순수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을 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게 다였다.
뜻 모를 정적 속에서 밀리타는 엘마뉴엘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드래곤 마스터들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프시오를 반가워했다.
그렇게 살가운 인사도 잠시, 그들은 이제 막 도착해서 짐도 다 풀지 못한 프시오를 붙잡고 한참 동안 드래곤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폭격과도 같던 질문은 펠드툰이 와서 그들을 떼어 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거, 애 좀 쉬게 합시다!
그때 제인은 쓰러져 있었고, 카이는 워낙에 말수가 없는 편이었으니 아무도 그런 프시오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던 건데.
밀리타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화제를 돌리려 할 때였다.
프시오가 말했다.
“저는 콜드리센인이었습니다.”
콜드리센이라는 명칭에 밀리타의 입술이 조용히 벌어졌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밀리타, 제 진짜 이름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밀리타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프시오 로디테입니다.”
“……!”
로디테라는 성은 페브리아인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밀리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성이었다. 그 성을 가진 단 한 사람이 고유명사처럼 유명했기에.
밀리타의 낯빛에 설마, 하는 의혹이 스쳤다.
하지만 곧 작게 도리질했다.
비약이었다.
로디테라는 성을 가진 인물이 테라얀 로디테 한 명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 아버지는, 테라얀 로디테입니다.”
“…….”
밀리타는 프시오에게 말해야 했다.
저를 놀리지 말아 달라고. 그런 놀림을 받자고 물어본 질문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스승의 표정이 너무나 결연했다. 거짓이라는 의혹을 가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
프시오의 그늘이 밀리타의 얼굴까지 번져왔다.
콜드리센.
그 나라는 드래곤 나이트라는 막강한 군대를 휘두르며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하던 독보적인 제국이었으며, 동시에 어느 대기사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과거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 대기사가 바로 테라얀 로디테였다.
붉은 피를 내며 찬란한 영광을 거머쥔다는 뜻으로 콜드리센의 붉은 장미라 불리던 대기사.
페브리아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콜드리센의 모든 정복지부터, 그가 마지막까지 노렸던 해상 무역의 중심지인 셀로느까지 거머쥐면서 해상 중계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종교전쟁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경제적 기반과 넓은 땅, 전쟁 전술까지 얻게 된 것이었다.
결국, 역사서로만 남아버린 콜드리센은 지금의 페브리아를 있게 한 기틀과도 다름없었다.
그런데 프시오가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니.
테라얀 로디테의 여식이라니.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밀리타가 알기로 그는…… 미혼자였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프시오가 얼굴에 번져있던 그늘을 지워내고 아주 엷은 미소를 그려냈다.
“맞습니다.”
“…….”
“당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다. 저는…….”
프시오가 말을 잇지 못한 틈 사이로 밀리타가 비집고 들어왔다.
“근사한 이름이네요.”
존중과 존경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프시오 로디테.”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프시오의 목소리가 전보다 가벼워졌다.
“열 살 무렵, 콜드리센이 페브리아에 패한 뒤 엘마뉴엘에 정착했습니다. 제 국적은 지금도 엘마뉴엘이고요.”
“그랬군요.”
“네. 엘마뉴엘에 정착하고 나서부터 그림자 마법과 드래곤을 더 익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금술 마법사인 당신이 그림자 마법과 드래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거군요.”
프시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미소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밀리타가 숨을 천천히 들이켜다가 내쉬었다.
“프시오, 혹시…….”
이내 나직하게 물었다.
“마드리안 교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가요.”
밀리타는 그림자 마법을 배우는 대가로 프시오가 페브리아와 마드리안 교황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데 적지 않게 일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막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밀리타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브리아가 콜드리센의 자국민부터 연맹국까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빠르게 페브리아에 흡수했다는 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지금 페브리아의 우호적인 연맹국들도 실상은 콜드리센과 연맹을 맺었던 나라들인 것만 봐도 명백했다.
하지만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흡수되었다 한들 모든 콜드리센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프시오라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대제국이 된 페브리아였으니.
그러나 예상과 달리 프시오는 정적 끝에서 담백하게 대답했다.
“옛 콜드리센 사람으로서는 아닙니다. 이유는…… 천천히 말씀드리죠.”
“어째서요?”
“당신도 아직은 페브리아와 마드리안 교황에 대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으니, 서로 공평하게 시간을 두고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밀리타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프시오도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밀리타가 알려주는 은밀한 정보들은 크게 도움이 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막을 알기에는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밀리타, 일정대로 내일 엘마뉴엘을 떠날 예정입니다. 오늘은 그만 푹 쉬세요. 저는 펠드툰 아저씨께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그리로 오세요.”
밀리타가 이불을 가슴께에 끌어당기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