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라트올은 호엘리반이 유독 싫어하는 ‘미끼’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긁어대는 이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살려둔 보람을 만끽하고 있는 그를 보며 호엘리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드호아망 도서관에서 책을 찾은 것도, 그 책으로 봉인되어 있던 루를 세상 밖으로 소환한 것도 저예요. 그런데도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 상관없는 일이야.”
“라트올.”
쓸데없이 진중한 부름에 흥이 깨져버린 라트올은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있던 의자를 제자리에 넣고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 네가 봉인되어 있던 루를 소환했어.”
라트올 역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루는 네게 자신의 안목과 미학에 관한 지식을 줬지. 그걸로 루와 너, 둘 사이의 계산은 끝난 거야. 완벽하게 끝.”
“…….”
“그러니까 엉뚱한 데서 관심 꺼. 호기심에 목숨 걸지 말라고. 너도 이제 그럴 나이 지났잖아.”
‘그럴 나이’라는 말에 호엘리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알다시피 난 주인님 뒤치다꺼리하기도 바빠. 너까지 손 가게 하지 마. 넌 그냥 내 안경이 금 갈 때마다 재깍재깍 복구나 하면서 오래오래 살라고.”
이동의 문을 연 라트올이 걸음을 떼려 하자 호엘리반이 낮게 읊조렸다.
“살려준 건 고맙게 생각해요.”
“그럼 내 별채로 보호 마법 건 유리창 좀 보내줘. 본채가 아작 날 때마다 갈아서 끼우게.”
호엘리반이 미약하게 웃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그럴게요.”
* * *
제자의 치정극을 본 다음 날.
세실은 제인과 밀리타가 아침부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세대 차이를 절감했다.
그들이 대화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어제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치부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요즘 애들은 다 저런가?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세실은 오후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밀리타와 카이, 그리고 프시오가 수련하던 언덕 근처에서 제인을 봐주고 있을 때였다.
“밀리타!”
프시오가 찢어질 듯이 소리 질렀다.
제인과 세실이 뒤를 돌아봤을 때 밀리타는 이미 어깨에 피를 흘리며 땅에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밀리타를 향해 달려갔다.
밀리타는 드래곤의 등에서 떨어지는 사이 의식을 잃은 듯싶었다. 곧바로 달려온 카이는 쓰러진 그녀를 안아서 프시오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상처의 깊이를 확인한 프시오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소독! 소독할 것부터!”
“내가 볼게. 어떻게 된 거야.”
숨을 몰아쉬며 묻는 세실에게 프시오가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마물 공격이 스쳤어. 독성이 있을 거야.”
* * *
그 시각.
그레데엘므는 거처로 가는 입구에서 걸음을 뚝 멈췄다.
그는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산산이 부서진 크리스털 조각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샐쭉한 미소를 짓더니 은근하게 콧노래를 불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사뿐한 그의 발걸음은 이내 왈츠를 추는 모양새가 되었다. 몇 번의 턴을 돌면서 춤을 추듯이 걸어갔다.
두꺼운 크리스털 내벽이 모두 난장판으로 부서진 홀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입구 벽에 아름다운 흑발의 데시안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레데엘므는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앞에 다가가서 쪼그려 앉았다.
“나랑 춤추러 왔어?”
“……한 번만.”
서서히 눈을 뜬 루가 목을 조르기 좋게 한 손을 펼쳐 들었다.
“한 번만 이리 와요.”
그레데엘므가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루가 재촉했다.
“와요, 어서.”
그레데엘므는 산뜻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에 목을 올렸다.
이내 차고 아름다운 손에 칼날 같은 독기와 살의가 가득 실렸다. 그렇게 루는 그레데엘므의 기도를 압박했다.
그레데엘므의 눈에 루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이토록 편안한 눈과 얼굴로 고요하고 차분하게 광활한 동굴 속 크리스탈을 모조리 깨부수었으리라.
루의 분노다웠다.
그레데엘므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고 꼴사납게 구는 그의 작태를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아, 우습다.
그래서 너도 내 손에서 웃었구나.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구나.
루의 손에 잡혀있는 그레데엘므는 즐거운 얼굴로 히죽거렸다. 당장은 죽이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이 거짓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거짓이면 더 좋을지도.
그 또한 사치스럽지 않은가.
마지막 단 한 줌의 숨으로 이 이야기를, 악연을 잘라내 버린다면 그 얼마나 허망하고도 사치스러운 비극이란 말인가!
그레데엘므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안 되지.”
그레데엘므의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던 루의 손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루는 잔기침하며 저절로 고개를 떨구는 그레데엘므의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죽으면 안 되지. 당신이나, 나나.”
그레데엘므가 숨을 조금씩 몰아쉬며 천천히 말했다.
“고분, 고분, 하게 구는 척…….”
곧이어 숨 쉬는 것이 조금 편해졌는지 머리채가 잡힌 그레데엘므가 방긋 웃는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내숭 떠는 거, 예뻐서 봐줄 만하던데 조금 더 떨어보렴.”
루가 웃으며 물었다.
“떨면.”
“내가 구르는 진창으로 데려가 줄게.”
진창이라.
루는 그레데엘므의 머리채를 밀면서 놓아주었다.
“그러죠.”
그레데엘므가 깔깔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웃어야지, 애송아. 예쁘게.”
낮게 시선을 떨어트리던 루는 입을 막고 미친것처럼 숨을 죽이며 킬킬거렸다. 그러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고 그레데엘므의 눈동자에 나른한 미소를 담아주었다.
“가죠. 당신의 진창으로.”
그레데엘므는 신난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내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부서진 동굴에 진동이 일었다.
그르르-릉…….
쩌-적-.
크리스탈 조각이 눈처럼 쌓인 탓에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쩌적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바닥이 거침없이 갈라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두두둑, 쾅!
바닥이 완전히 부서지는 순간, 루와 그레데엘므가 그대로 떨어졌다.
소리 없이 이어지던 추락의 끝은 꽃무덤이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그래서 더 괴기하고 소름이 끼치는.
그렇게 꺾인 꽃들로 가득 메워진 꽃무덤으로 떨어지자 꽃과 꽃잎들이 가볍게 두둥실 떠오르다가 내려앉았다.
루는 얼굴 위로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진창이라고 하기엔 너무 화사한 거 아닌가.”
“내가 화사하잖아. 그러니 내 진창도 나처럼 화사해야지.”
먼저 몸을 일으켜 앉은 그레데엘므가 누워있는 루에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해.”
“…….”
“우리가 같이 나눠 먹었던 케이크의 주인공!”
“…….”
“그날, 생일이었거든.”
“……하.”
더디게 일어나 앉은 루는 낮게 실소했다.
그레데엘므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비석 아래 수십 가지의 꽃에 파묻힌 여자가 어지럽게 얽힌 넝쿨과 가시에 묶인 채 걸려 있었다.
루는 눈살을 찌푸리며 기억 너머로 잊고 있던 여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시온……. 이름이 시온이었나?
1세기가 넘도록 썩지도 않고 이곳에 있었던 건가?
그때 그레데엘므가 루의 생각을 끊어내듯 말했다.
“놀랐구나? 시온의 환생이야.”
웃는 얼굴을 하고서, 조금도 웃지 않은 채.
“이번 생의 이름은 다이애나였어.”
그레데엘므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난 죽을 때까지 시온이라고 불렀지. 저 아이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다이애나라고 했고.”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러고는 시신을 구경하는 모습으로 두 팔을 뒤로 뻗어서 몸을 젖혔고, 노랫소리에 박자를 맞추듯이 발끝을 까딱거렸다.
“시온을 죽인 게 애송이야, 나야?”
“…….”
“홀랑 잊어버린 건 아니지? 나는 아직도 백 년 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나. 어제처럼.”
루는 벽에 걸린 다이애나의 시신을 보는 게 어쩐지 불쾌했다. 그는 그대로 꽃무덤 위로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레데엘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나 아닌가. 시온을 죽인 건.”
“응. 나도 애송이라고 생각했었어. 네가 시온을 현혹해서 헛소리만 지껄이게 하지 않았어도 내 손으로 목을 졸라서 죽일 일은 없었을 거라고 말이야.”
그레데엘므의 말은 한 치의 왜곡도 없었다.
그가 끔찍하게 생각할 만한 말들을 고르고 골라내어 시온의 입을 통해서 듣도록 만들었다.
그때였다.
상념에 사로잡힌 루의 이마 위로 그레데엘므의 그림자가 덧씌워졌다. 그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루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어. 애송이가 죽인 거라고. 정말로.”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보군.”
“응. 사실 그동안 심술을 좀 부리고 다녔거든. 그러다 누가 날 찾아와서 그러는 거야!”
두 손에 꽃들을 한 움큼씩 쥔 그레데엘므가 흥분한 아이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잔 꽃잎들이 힘없이 흩날렸다.
그레데엘므는 손에 쥐고 있던 꽃들을 팡! 하는 느낌으로 머리 위에 던졌다.
꽃들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신을 사랑하는 눈을 하고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느냐고!”
신을 사랑하는.
시온의 입에서도 나온 말이자, 시온의 목을 조르게 한 말이기도 했다.
“내가 또! 또 목을 조르고 있지 뭐야!”
그레데엘므는 깔깔 웃으며 꽃무덤 위에서 춤을 췄다.
“그때 깨달은 거야! 시온을 죽인 게 나라는 걸! 네가 아니라 나라는 걸!”
“……그래서, 그 인간도 죽이셨나.”
루의 물음에 그레데엘므가 웃음도, 동작도 우뚝 멈추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고장 난 인형처럼.
“아니.”
“…….”
“신을 사랑하는 인간이거든. 그래서 보내 주기 싫더라고.”
그가 히죽 웃었다.
“신의 곁으로.”
그 대신 화풀이 상대로 명계 것들만 죽어 나갔던 거군.
루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눈앞의 시신은 다시 봐도 불쾌감이 일었다. 단순히 시신이라거나 시온과 닮아서가 아니었다.
“나를 봉인에서 풀어 준 이유가 이거였나 본데.”
그레데엘므가 토끼처럼 놀란 얼굴로 루를 바라보았다.
“꺅……!”
그러다 한없이 기쁜 얼굴로 눈을 곱게 휘었다.
“눈치챘구나, 애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