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봉인된 채로 어둠에 속박되어 있을 때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알려줄까.”
포도주잔을 채워주려던 호엘리반이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눈을 홉떴다.
봉인에 관해서라면 지금까지 호엘리반이 엮어버린 일화 외에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던 루였다.
루가 말했다.
“기다림.”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호엘리반의 몸은 계속해서 굳어 있었다.
“……무엇을요?”
“단 한 사람의 발걸음.”
루는 호엘리반이 손에 쥐고 있던 포도주병을 가로채서 호엘리반과 자신의 빈 잔에 따랐다. 흰 손끝에서 흐르는 포도주는 맑은 핏물 같았다.
호엘리반은 어쩐지 숨이 막혀왔다.
“제가 그 발걸음이었나요?”
“그럴 리가. 너는 내게 오지 않았잖아. 불러냈을 뿐.”
“……그레데엘므가 당신의 발걸음이었나요?”
루가 짧은 조소를 흘리다가 곧 웃음기를 털어냈다. 그는 날이 선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똑바로 알아들으라는 듯이.
“사람.”
“…….”
“단 한 사람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루는 이어서 말했다.
“기다림에는 몇 가지가 필요해. 시간과 인내 그리고 갈망. 그게 많이 필요해. 퍼도 퍼도 끝이 없는 샘물처럼, 아주 많이.”
프시오가 떠나가 있던 약 일 년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호엘리반은 기다림을 배웠다. 그러므로 루가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했으나 그 시간을 체감하기란 어려웠다. 일 년도 버거웠던 자신이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백 년의 시간을, 인간이라면 다 채우고 살아가지도 못할 그 시간을 감히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즉, 인내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다는 뜻이지.”
“…….”
“그런데 자꾸만 화가 치밀더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
“…….”
“있는 줄도 몰랐던 걸 빼앗겨서 그랬던 거야.”
“…….”
“마음.”
“!”
그 순간 호엘리반의 동공이 반사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다급하게 몸에 걸려 있는 보호 마법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콰지직…… 쾅!
그러나 호엘리반의 보호 마법이 무색하리만치 술잔과 포도주병은 처참하게 터져버렸고, 창문에 걸린 강화 유리에는 흐르는 빗물 같은 금이 주르륵 가버렸다.
제 앞의 데시안은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사납게 짓고 있었다.
“마음을 빼앗겨 버려서.”
호엘리반은 이제 정말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루는 이날 이때껏 호엘리반에게 이만한 마력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호엘리반은 온 방에 루의 마력에 대응할 만큼 강한 보호 마법을 거느라 진이 빠져갔다.
숨통이 막히면서 눈앞이 흐려지려고 할 때였다.
“루!”
돌연 나타난 라트올이 호엘리반의 뒤통수를 당겨서 품에 안고 소리쳤다.
“죽이려고 작정하신 거 아니면 그만둬요!”
“…….”
“마력 낮추시라고요!”
루는 뒤늦게 호흡 곤란으로 숨을 못 쉬는 호엘리반과 온통 금이 간 유리창, 그리고 부서진 술잔과 포도주병으로 난장판이 된 공간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루가 실소를 터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엉망이군…….
그사이 루의 마력이 떨어지자 라트올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호엘리반의 맥박을 짚었다. 다행히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라트올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죄송해요, 소리 질러서…….”
“호엘리반은.”
“……살아 있어요.”
“그 녀석 좀 부탁하지.”
루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동의 문을 열었다.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라트올의 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목 졸랐다면서요.”
“…….”
타타가 쓴 양피지 수기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온 라트올은 루의 침묵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맞나 보네.”
라트올은 타타가 보낸 양피지 수기를 떠올렸다.
[네 주인님 목을 죽일 것처럼 조르다가 갑자기 손을 탁 놓더라고.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더니 나오자마자 데리고 갔거든.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폭주가 멈췄어.]
결국 루가 그레데엘므와 마주친 것이다. 심지어 그레데엘므가 루를 데리고 갔고, 그날부터 그의 폭주가 멈췄다.
“두 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으로 물었으나 루는 완전히 예상에서 벗어난 답을 돌려주었다.
“딸기 케이크.”
“네……?”
“같이 딸기 케이크 먹었어.”
라트올은 아연했다.
그러니까 미친놈들끼리 만나서 딸기 케이크를…….
그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 * *
호엘리반이 깼을 땐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그의 옆에는 팔짱을 낀 라트올이 의자에 앉아서 침대에 발을 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라트올이 자신을 품에 안아 들던 모습이 떠오르자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안고 지랄.”
“……넌 살려 줘도 지랄이고.”
천천히 눈을 뜬 라트올이 침대에서 다리를 내렸다.
호박씨를 까던 호엘리반은 들킨 사람답지 않게 픽 웃었다.
“안 잤어요?”
“어. 너 눈 뜨는 거 보고 가려고 했거든.”
“보여요, 닭살 돋은 거?”
호엘리반이 닭살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보여주자 라트올은 무심하게 중지를 펼쳐 들었다.
“간다.”
이동의 문을 열려던 라트올은 잡힌 손목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얘기 좀 해요.”
“싫어.”
“루, 괜찮아요?”
라트올은 자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인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호엘리반은 죽었을 거다.
호엘리반 역시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라트올이 짜증스레 말했다.
“그렇게 감싸줬는데도 대가리를 다쳤나,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너야말로 죽을 뻔한 거 몰라?”
호엘리반은 말없이 라트올에게 손바닥을 펼쳐서 들어 보였다.
라트올은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안았다고 지랄할 땐 언제고, 손이라도 잡자고?”
“금 갔어요.”
“……젠장.”
안경에 금이 간 줄도 모르고 있던 라트올이 순순히 그에게 안경을 넘기자 호엘리반은 연금술 마법으로 금방 고쳐주었다.
“루가 그런 거 고의가 아니잖아요. 저는 당신 덕분에 살아 있고요. 문제는 루예요. 마력 조절을 전혀 못 하던데 괜찮은 거 맞아요?”
“…….”
“앉아요. 당신 올려다보기 싫으니까.”
호엘리반이 불량스러운 태도로 옆에 있는 의자를 툭 쳤다.
안경을 고쳐 쓴 라트올은 의자에 대충 앉았다.
“하, 그냥 죽게 내버려 둘걸.”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히던 라트올은 호엘리반의 물음에 얼굴을 굳혔다.
“제인이요. 루 옆에 두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
그건 전혀 호엘리반다운 질문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상냥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서도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마음을 연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 호엘리반이었다.
그 외에 타산을 벗어난 부분에 시간을 쓰느니 조금이라도 더 배움을 익히고, 많은 업무를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독종이었다.
그런 그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인에게 마음을 열었을 리는 만무할 터였다.
굳은 표정을 말끔히 씻어낸 라트올이 천장을 향해 있던 고개를 내리고 코웃음을 쳤다.
“네 오지랖이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는데. 루에서 제인까지. 조금 있으면 나까지 걱정하겠다, 너.”
호엘리반은 라트올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둘 다, 이대로 둬도 상관없어요?”
엉거주춤 일어선 라트올이 의자의 등받이를 앞쪽으로 돌리고 다시 앉았다. 이내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 위에 팔을 포개고 얹은 그가 빈정거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너도 좀 웃긴다. 작년 이맘때였나.”
“…….”
“프시오 떠나고 너, 걔 없으면 안 된다는 거 깨달았을 때, 기억 안 나?”
“…….”
“난 그때 네가 사람 새낀가 싶던데.”
“…….”
“경험자로서 대충 알지 않아? 루는 제인이 옆에 없으면 더 돌아버릴 거.”
“그렇지만 마력을.”
“아, 마력 조절? 걱정 붙들어 매. 아무리 화가 나도 제인이 딱 숨넘어가기 직전에 참으시더라. 제인도 묘기 수준으로 마비력을 올리고.”
……그렇다는 말이지.
호엘리반은 작게 한숨을 쉬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라트올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력 조절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더 큰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사랑을 깨달은 순간’에 그토록 분개한 거지? 하루 이틀 뒤면 돌아올 사람에게, 왜?
“……루가 원하는 결말이 뭐예요?”
호엘리반이 라트올에게 결말에 관해 물은 건 몹시 오랜만이었다.
루와 그레데엘므가 시작한 이야기의 결말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루도, 그레데엘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추구하는 본질이 같았다.
아름다운 비극.
그들은 아름다운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완벽하지 않던 결말이었고, 지금은 더욱 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어긋나고 있는 건지 맞춰져 가고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이 이야기의 끝.
아름다운 비극을 관망하는 자리에 라트올은 루를 앉혀 놓으리라 수백 수천 번 다짐했다.
“관심 꺼.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제가 루를 깨웠잖아요.”
“……깨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막은 라트올은 클클거리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급기야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버석거리는 미소를 물고 있는 호엘리반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잖아?”
가소롭다는 얼굴로.
“그레데엘므가 널 이용한 거지. 넌 미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