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81)화 (81/168)

81.

“와, 네가 사백 년 된 거북이구나!”

프시오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그녀를 당황하게 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제인이었다.

제인은 프시오의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말거나 깔깔거리면서 모닥불 근처에 있는 거북이 동상을 보며 조잘거렸다.

“우리 집에 있는 사백 살 먹은 데시안이랑 친구 하지 않을래? 너랑 동갑내기거든.”

프시오는 세실이 했던 말을 조용히 떠올렸다.

-수련은 잘 따라오고,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그게 이런 뜻이었어……?

프시오가 이렇듯 뒤늦게 당황하는 이유가 있었다.

제인은 보호 마법을 푼 이후, 세실의 가르침 아래 움직임이 느린 마물부터 재빠른 마물까지 차례대로 공격 단계를 높여가며 수련을 무리 없이 따라갔다.

게다가 펠드툰에게 정신계 치유마법의 원리와 기능에 대해서 포괄적인 설명을 들었고 간단한 실습까지 잘 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인은 묘약의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수련이 끝난 이후부터였다.

저녁밥을 잘 먹다가 갑자기 울컥거리며 입을 틀어막더니 헛소리를 해댔다.

-어떡하지. 루가 혼자 밥 먹을 모습이 그려져서 마음이…….

그녀의 말에 모두가 쩍 굳어버렸다.

곁에 있던 세실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능숙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아픈 아이에요. 다들 식사하세요.

그렇게 수련이 끝난 후부터 나사 빠진 사람처럼 돌변한 것이었다.

펠드툰도 제인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거북이 동상에게 말을 거는 그녀를 가리키며 세실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미친 거냐……?”

“……네, 아버지. 미쳤어요, 쟨.”

인간이 아닌 타락한 르젤이 만든 사랑의 묘약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저주였기에 세실은 펠드툰에게 묘약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펠드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숙소로 들어가려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제인을 당혹스럽게 보고 있던 프시오를 불렀다.

“프시오, 솜브 데려와라! 상태나 좀 보자.”

프시오는 번쩍 정신 차린 얼굴로 엘마뉴엘에 와서부터 줄곧 잠이 들어있는 솜브를 데리고 펠드툰을 따라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솜브를 넓은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솜브의 수면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어요.”

펠드툰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든 솜브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짧은 수염이 나 있는 턱을 매만졌다. 이어서 프시오가 안심하게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몸에 이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펠드툰이 이어서 물었다.

“솜브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

“똑같아요. 저랑 호엘리반, 그리고 세실이요.”

프시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데시안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때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던 펠드툰이 대뜸 말했다.

“세실에게 들었단다. 드호아망으로 돌아갔다면서?”

프시오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세실이 호엘리반의 거처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까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으리란 걸 알면서도 펠드툰이 알게 될까 싶어서 마음을 졸였다.

그의 거처에서 지내는 프시오는 다분히 건전한 생활을 했다.

떳떳하지 못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음에도 펠드툰에게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프시오가 손끝을 매만지는 사이, 펠드툰이 이어서 말했다.

“아무리 그 사실을 아는 게 너희뿐이라고 하더라도 얘야, 호엘리반을 쫓아다니는 앙디스 놈들이 있는 곳에 솜브를 두는 건 위험하다고 본다.”

“아…….”

프시오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는 탄식을 뱉었다.

“그래서 말인데, 솜브를 잠시 엘마뉴엘에 머물게 하는 건 어떻겠냐.”

“……솜브가 일어나면 얘기해 볼게요.”

솜브를 안아 든 프시오가 펠드툰의 숙소를 나가려 할 때였다.

“제인에게 진료받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문고리를 잡은 프시오는 또다시 난감함에 허우적거렸다.

펠드툰에게 했던 진료 거부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도 모자랐다.

펠드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프시오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확신하냐?”

펠드툰의 속뜻을 눈치챈 프시오가 강단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째서냐? 제인은 네 제자도 아니잖냐.”

“그러니까 확신하죠, 아저씨.”

프시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세실의 제자니까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던 펠드툰이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그랬구나.

네 확신은 제인이 아니라 내 딸을 향한 한결같은 믿음이었구나.

“나는 이번에도 너와 생각이 다르단다. 만일 네 확신이 틀리고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얘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괜찮으니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라.”

“…….”

“내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네 뒤에는 항상 내가 있단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아저씨…….”

“괜찮지 않냐, 이런 시아버지! 낄낄낄!”

그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요. 게다가 시아버지라니…….

프시오가 시선 둘 곳이 없어 하며 갈팡질팡하는 동안 그는 한참이나 더 낄낄 웃었다.

“낄낄낄낄낄!”

* * *

프시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모닥불의 세기가 점점 약해져 갔다.

펠드툰이 두고 간 바구니에 손을 넣고 대충 헤집던 세실은 불의 마석을 서너 개쯤 꺼내어서 모닥불로 툭툭 던졌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성의라고는 없는 일렬의 행동에 불길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주변을 쓱 훑었다.

그러다가 밀리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인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였다. 그녀의 웃음은 한결같았다. 이쯤 되면 눈치채지 못하는 제인이 모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세실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켤 때였다.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을 가지고 온 제인이 밀리타 옆자리에 앉았다.

세실이 말했다.

“거북이 동상과 즐거운 시간 잘 보내고 왔니?”

제인이 투덜거렸다.

“별로요. 더 보고 싶기만 하고.”

“그거 어쩌니? 지랄도 병인데.”

“하긴.”

제인이 키득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러다 맥주가 반쯤 남았을 즈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막의 밤하늘 못지않게 넓은 은하수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순간, 제인의 은색 머리카락 끝에 기척이 닿았다.

어느 틈엔가 밀리타가 늘어트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다. 허벅지에 턱을 괴고서, 웃는 얼굴로.

장작이 타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유일하게 온기가 가득한 모닥불 주변으로 묘한 살얼음이 끼는 사이, 제인은 밀리타를 바라보며 살갑게 웃었다.

“나라고 생각해?”

밀리타가 눈을 굴리며 제인의 말을 헤아리려 했다. 그러다 이어지는 그녀의 물음에 은색 머리카락을 느리게 놓았다.

제인이 한 번 더 물었다.

“아니면 나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야 모르지.”

밀리타의 물음에 제인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이어서 대답했다.

“그런데 너도 모르는 것 같아서.”

밀리타는 말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미소처럼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얼핏 봐서는 감정을 읽어내기가 모호했다.

제인이 상체를 기울이며 밀리타의 귓가에 다가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모르는 척이거나.”

“…….”

제 자리로 돌아온 제인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맥주를 마저 비워냈다. 이내 세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숙소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인이 둔하다고 생각했던 세실은 이마를 긁적였다.

하기야, 담배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만들었던 파탐을 찰나의 끝 향만으로 알아챈 녀석이었다. 눈치든 감이든 예리하다는 걸 간과한 것은 자신이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스승님.”

몇 발자국 걷던 제인이 뒤를 돌았다.

“오늘도 잘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해야 당신한테 칭찬 한 번 들을 수 있어요?”

“없어, 넌.”

“왜요.”

“결국 포기할 거거든.”

“대쪽 같으셔라.”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던 제인은 곧 몸을 돌려서 숙소로 들어갔다.

모닥불의 열기가 다시 희미해지고 있었다.

밀리타는 작게 웃었다.

“차였네.”

* * *

아삭.

라트올은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의 눈은 지하 작업실 아래 칸에 저장된 녹니스의 원료를 향해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숨만 쉬어도 파동이 생긴다. 특히 인간의 정서는 파동이 풍부하다. 흡수되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잉여 파동은 세상에 차고 넘쳤다.

녹니스의 원료는 인간의 잉여 파동이었다.

그중에서도 유희, 향락, 쾌락과 같은 중독적인 파동.

중독적인 파동은 라트올의 세공과 루의 가공을 거친 후 외부로 유통한 마석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구조였다.

매년 납품 물량은 작업 용량의 10분의 1 정도였다. 나머지는 모두 별도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이번 원료가 마지막 작업일 것이다.

덮개를 닫고 의자에 앉은 라트올은 손에 쥔 사과를 다시 큼지막하게 베어 먹었다. 사과 씨부터 꼭지까지 남김없이 씹어먹은 뒤 진득한 손을 핥고 있을 때였다.

지하실 문에서 콕콕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주자 핍이 날개를 파닥거렸다.

라트올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호엘리반이랑 포도주를?”

루의 결근 소식을 전한 핍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시라지.”

라트올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모습을 낯설게 보던 핍은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위로 날아가 버렸다.

라트올 혼자서 작업을 시작하려던 순간,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마법 양피지에 타타 필체의 수기가 나타났다.

[네 주인님, 괜찮으셔?]

그걸 괜찮다고 할 수 있나. 제인이 없는 시간을 견디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이 사실을 타타가 알 리가…….

라트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알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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