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제인이 말했다.
“숨 쉬는 것도 편하고, 그래서 바람 부는 거 말고는…….”
“…….”
일말의 정적이 흐른 후, 세실이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마비력을 풀어봐. 천천히.”
“네.”
제인이 마비력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자 드래곤의 마력이 더 강하게 그녀를 휘감았고, 은색 머리카락도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너울거렸다.
세실이 물었다.
“어떻니.”
“……어, 신기하네요. 바람이 되게 많이 부는데 춥지는 않고.”
“……아니, 숨 쉬는 거.”
“편해요.”
“…….”
세실은 심각하게 당혹스러웠다.
제인을 둘러싼 드래곤의 마력은 자칫하면 폐가 터질 만큼 밀도가 높았다.
세실 정도의 신체계 마법사가 옆에 있으니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것이지, 아니라면 목숨을 길바닥에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걸 제인은 산들바람이 부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실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있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고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탁,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혹시, 루…… 기분이 안 좋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안 좋길래 네가…….
세실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제인이 대답했다.
“음. 저러다 누구 하나 죽이겠다 싶을 만큼요. 제가 저주에 걸리고 나서부터 쭉 그랬어요.”
루는 저를 보는 제인의 얼굴이 붉어질 때마다, 사랑한다고 속삭일 때마다, 그렇게 품에 안길 때마다 그레데엘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런 루의 분노를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챈 제인은 숨 쉬듯이 마비력을 올렸다. 그 결과, 루는 저도 모르는 사이 마력을 느슨하게 제어할 때가 많았고, 제인은 매 순간 자연스럽게 마비력을 더 올렸다.
그녀는 그렇게 지냈다.
“너…….”
그런데 살아있는 거니?
“저 왜요?”
“……아니다.”
“그런데 루가 기분이 안 좋은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야, 수련이나 하자.”
세실은 더 깊게 알고 싶지 않았다.
“드래곤 마력의 강도를 조금씩 올려 볼 테니까…… 숨 막히는 구간이 있으면 바로 손들어라. 견디지 말고.”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비력 측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먼발치에서 보자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 뭐냐? 괴물 아니냐……? 저렇게 밀도 높은 드래곤의 마력 안에서 숨을 쉰다고……?”
펠드툰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프시오에게 재차 물었다.
“저게 정말 인간이냐?”
제인은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드래곤 마력의 세기가 눈에 훤히 보이는 이들에게는 아연할 정도의 강도였다.
“저도 제인이 고강도 훈련을 하고 있다고 얼핏 듣긴 했는데 저 정도일 줄은…….”
밀리타와 카이의 움직임에 따라 방어 마법을 쓰느라 아주 잠시 눈을 돌렸던 프시오도 사색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펠드툰이 몸을 떨었다.
“어우, 나는 소름 끼쳐서 더는 못 보겠다.”
“……저도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밀리타와 카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펠드툰이 말했다.
“밀리타는 드래곤의 마력을 주입 받은 게 확실하더구나.”
“네. 그런데 뭔가 다르지 않아요?”
“……네가 짐작하는 게 맞다. 그림자 마법에, 그것도 생과 사를 확인하는 용도의 마나는 존재하지 않아.”
펠드툰이 전에 없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분명 드래곤의 마력을 인위적으로 변형시켜서 주입 받은 마나일 게다.”
프시오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몸에 무리가 갈까요.”
“일반적으로는 주입받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문제 될 게 없다. 밀리타의 마나는 이미 신체에 잘 흡수되어 있구나.”
“다행이네요.”
프시오는 밀리타의 마나를 처음 읽어냈던 날을 떠올리자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그녀에게 주입된 그림자 마법은 생과 사 이외에는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없는 구속마법이 함께 걸려 있었다. 그 마법을 푸는 데만 꼬박 삼 일이 걸렸었다.
프시오는 계속해서 밀리타와 카이의 움직임을 쫓으며 말했다.
“아저씨, 호엘리반은 지금까지 앙디스의 땅을 되찾아 주기 위해 페브리아의 결계에 구성된 요소들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징글징글한 새끼들. 아직도 애를 들들 볶고 그러냐?”
펠드툰의 눈에 앙디스인들은 아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동네 똥개와 다를 바 없었다. 봐달라고 앙앙 짖어대는 똥개들.
프시오는 손끝을 매만졌다.
프시오가 보기에 펠드툰은 아직 호엘리반을 향한 앙디스의 테러와 그 수위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네. 그러던 중에 페브리아의 결계가 신앙심을 마력으로 변환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신앙심을 마력으로……?
펠드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프시오를 응시했다. 하지만 프시오는 마물을 해치우는 밀리타와 카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저씨,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드래곤의 마석이 변환의 매개체일 확률이 높다고 봐요. 호엘리반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고요.”
“허…….”
펠드툰도 다시 밀리타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인간의 믿음을 마력으로 변환한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말로 들렸으나, 밀리타에게 주입된 마나를 보니 아주 터무니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프시오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밀리타의 마나를 확인하고 싶어서지만, 그보다는 드래곤의 마력을 생명에 아무 지장을 주지 않고 주입하는 법을 알아내고 싶어서예요. 방법이 없을까요?”
펠드툰은 도무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녀석아, 그런 게 있겠냐?”
역시 없구나.
여기까지가 프시오가 생각한 지점이었다.
그녀는 뒤에 두었던 가방을 가지고 와서 열었다. 꽉 차게 들어있던 서류 뭉텅이를 꺼내어 펠드툰에게 건네주었다.
“도와주세요, 아저씨. 방법을 찾아야 해요.”
“…….”
“저는 앙디스를 제2의 엘마뉴엘로 만들 생각이에요. 그것도 드호아망 소속으로.”
펠드툰은 벌어진 턱을 다물지도, 그렇다고 꼴사납게 낄낄거리지도 못했다.
그는 깨달았다.
철저한 계획과 관리 속에서 목표한 바를 차근차근 이루던 맹랑한 녀석은 이제 없다는 사실을.
그저,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책략가의 눈을 한 어른이 있을 뿐.
“반드시.”
* * *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예요?”
호엘리반은 집무실 소파에 몇 시간째 누워있는 루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 위에는 시집 한 권이 올려있었다. 무언가 답답하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종종 취하는 행동이었다.
평소였으면 그대로 두었을 호엘리반이었으나 이달에 마무리해야 할 공문과 기타 서류가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
특히 세금 관련 업무로 신경이 곤두서있었기에 이 상황이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루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호엘리반은 그의 얼굴 위에 올려진 시집을 손에 들었다.
“뭐 때문에 그러세요?”
호엘리반은 저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루의 심기가 예상보다 더 불편해 보였다. 다시 그의 얼굴에 시집을 올려둘까 고민하던 차였다.
“호엘리반.”
“네.”
루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물었다.
“지금 네 시간은 어떻지?”
제 시간을 물으신다면, 바빠 죽겠는데 당신이 할 일 없이 여기 누워있어서 다소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말이죠.
호엘리반은 까칠한 진실은 저편으로 묻어두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저의가 뭔지 말씀해 주시면 성심성의껏 답해 드릴게요.”
호엘리반은 진심으로 성의를 다해 대답해 줄 요량이었다.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그를 돌려보내고 잔뜩 쌓인 업무에 집중할 테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문이 턱 막히는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프시오가 없는 네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지?”
호엘리반은 망치라도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프시오가 없는 시간…….
그래서였나.
종일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섰던 것들이 업무 때문이 아니라, 프시오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곁에 없어서.
이윽고 프시오가 처음 사직서를 내고 떠나던 날 이후에도 비슷한 나날이 이어졌던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호엘리반이 얼이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루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내 시간은.”
잠시 말을 멈췄던 루가 낮게 읊조렸다.
“무척 길고, 따분하고, 답답하게 흘러가거든. 뭔가 꽉 막힌 것처럼.”
제인의 이야기구나.
호엘리반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이제 막 저녁 일곱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세 시간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하다 하다 너까지 기다려야…….”
눈살을 찌푸린 루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윽고 호엘리반이 들고 있던 시집을 가져와서 얼굴에 덮어버렸다.
“열 시까지는 마무리할게요. 포도주나 한잔해요.”
호엘리반은 조용히 일을 시작했고, 루는 시집을 얼굴에 덮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간은 지겹게 흘러갔다.
그렇게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호엘리반은 루의 빈 술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고, 루는 느슨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브리아에서부터 지금까지 제인과 함께 보았던 수많은 밤하늘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말이지, 고양이가 참새를 사랑할 수 있나?”
루는 느릿하게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호엘리반, 어떻게 생각하지? 배고픈 고양이라면 잡아먹어야 하고, 배부른 고양이라면 가지고 놀아야 하는 게 이치이자 섭리 아닌가?”
맞은 편에서 포도주를 마시던 호엘리반이 잔을 내려두고 생글거렸다.
“데시안이 이치와 섭리를 논하는 것도 순리에 맞지는 않아 보이는데 말이죠. 그건 신의 규칙이니까요.”
순리에 맞지 않는다.
루도 호엘리반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이치와 섭리를 논하는 건 신의 규칙이고, 그 규칙은 신의 대리자인 르젤들, 혹은 인간들이나 따르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루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는 되물었다.
“고양이가 참새를 사랑할 수 있나?”
“제인이 당신에게 의미 없는 참새였다면 다른 참새를 가지고 놀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온종일 시집에 얼굴을 묻고 있을 일이 아니라.”
“의미 없는 참새.”
그런데 의미가 생겼다?
더군다나 그 의미가.
“사랑이라.”
작고 허무하게 읊조리던 루가 잔에 남아있던 포도주를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겼다.
“호엘리반.”
루의 부름에 고개를 든 호엘리반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봉인된 채로 어둠에 속박되어 있을 때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알려줄까.”